▲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가운데 |
국제연대운동을 하겠다고 꼼지락 거린지도 몇 년이 흘러갑니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이며 이라크며 이런 저런 일들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늘 마음에 남는 말이 있다면 ‘아일랜드’라는 단어였습니다. 내가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는 것보다 내가 아일랜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안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아일랜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나 [블러디 선데이]와 같은 영화로 다가왔고, '블러디 선데이' 가운데 아일랜드인들이 "we shall overcome(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을 부르며 행진하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 영화 [블러디 선데이] 가운데 |
그리고 오늘은 아일랜드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라는 영화로 제게 찾아왔습니다. 이 영화는 [랜드앤프리덤]나 [빵과장미]와 같은 영화를 만든 켄로치 감독의 작품으로 1920년대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아일랜드인들을 그린 영화입니다.
점령도 싫고 수색도 싫다
먼저 영화는 영국 제국주의의 점령이 어떤 것인지를 그립니다. 영국군이 한 마을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는 영어로 이름과 직업 등을 얘기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 아일랜드인이 영어로 말하길 거부하고 게일어로 말을 하자 영국군은 17살의 이 사람을 끌고 갈서 살해합니다.
단지 점령군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싫었지만 언제부턴가 저는 ‘수색’이라는 말도 참 싫어졌습니다. 만약 우리가 살고 있는 집에 시도 때도 없이 군인들이 발로 문을 뻥뻥 차며 들어와 집안을 헤집어 놓고 사람들을 끌고 간다면 우리 심정을 어떨까요? 뭐 보고 놀란 가슴 뭐 보고 놀란다고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군홧발 소리인줄 알고 잠에서 깨어나지는 않을까요?
▲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가운데 |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영국군에 맞서 싸우는 모습입니다. 무기를 뺏고, 감옥에 갇혀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받고, 동지들이 총살당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등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치 지역에서 벌어지는 재판 과정입니다. 여성이 재판관으로 등장한 장면에서 부당한 금리를 요구하는 대부업자에 대항해 법정은 돈을 빌렸던 가난한 이의 편을 듭니다. 그러면서 ‘여기는 공화국의 법정이지 영국의 법정이 아닙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즉, 공화국은 민족적으로도, 계급적으로도 영국과는 다르다는 선언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랜드앤프리덤]에서 땅을 놓고 벌이는 농민들의 토론과정이 떠올랐고, 또 요즘 한국에서 문제가 많이 되고 있는 집 값 상승의 문제를 생각 했습니다. 집 값 해결의 과정은 어쩌면 단순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집은 자기에게는 필요 없는 집이므로 월세든 전세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에게 집의 이용권을 주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집주인이었던 사람이 돌려달라고 해도 다시 집을 돌려줄 필요도 없고, 더 이상의 사용료를 내야할 필요도 없는 거죠. 농지개혁을 하듯 주택개혁을 하는 겁니다. 다만 지금은 우리에게 이런 사회 정책을 실현할 힘이 없을 뿐입니다.
▲ 이라크인의 집을 수색하고 있는 미국 점령군 |
어쨌거나 영화는 계속 흘러 아일랜드인들이 일부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얻는 것을 가지고 갈라지게 됩니다. 자치권을 시작으로 미래에 더욱 나아가자는 입장과 아일랜드를 분할하고 영국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죠. 이 장면을 보면서 1993년 아라파트와 PLO가 이스라엘과 미국과 함께 맺었던 ‘오슬로협정’이 떠올랐습니다. 오슬로 협정으로 팔레스타인의 일부 지역에 자치정부가 들어서고 아라파트는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식민지 상태입니다. 그리고 오슬로 협정을 놓고 팔레스타인 내부는 갈리었고, 이스라엘과 미국은 자치정부에게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관리, 통제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영국군이 떠난 아일랜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협정에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갈라지고, 찬성하는 쪽은 정부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사복을 입었던 아일랜드인들이 이제는 군복을 맞춰 입는 군인이 되어 무기를 찾는다고 아일랜드인의 집을 수색합니다. 영화 첫 부분에서 영국군들에게 수색당하고 사람이 죽었던 바로 그 곳입니다. 집을 수색하러 온, 이제는 군복을 맞춰 입은 아일랜드인에게 또 다른 아일랜드인은 ‘너희가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지금껏 내가 너희들한테 음식과 쉴 곳을 줬는데.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말합니다.
영화의 끝은 영국과의 협정에 찬성하는 형과 반대하는 동생의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함께 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싸웠지만 이제는 전투과정에서 동생은 체포되고 형은 동생의 총살형을 집행합니다.
새로운 역사 쓰기
저들은 우리의 땅을 빼앗고, 우리의 몸을 지배했고, 마음까지 지배하려 했지.
지옥조차 인간에게 저지른 저들의 악행을 능가할 수 없겠지
저들이 씌운 저주스런 멍에를 부셔 버리고
인간의 권리를 위해 싸웠던 모든 이들
나의 아들아, 인류의 가장 고귀한 사람들이 저들의 일격으로 쓰러졌단다.
- [유언: 죽어 가는 사회주의자가 아들에게], 제임스 코널리
1916년 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제임스 코널리가 죽어갔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 영화 [랜드앤프리덤] 가운데 |
어차피 가까이서 보면 하나의 사건이나 한번의 투쟁이 세상을 확 바꿀 거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 하나의 인간이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되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개인은 나약하되 역사는 쉽게 끊어지지도 부러지지 않으며 강인하게 버티는 이유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하는 것은 시간이 많아서도, 할 일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더 이상 여린 목숨들 억울하게 죽지는 말자는 마음이고, 어차피 누구나 오면 가는 인생인데 제대로 한번 살아봤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다운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기 위해 굶주리는 아이들을 향해 총을 쏘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 하는 것이다. 내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이유는 인류애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황금의 지배라는 저주를 받아 왔다. 돈은 결코 문명의 적절한 토대가 될 수 없다. 사회를 다시 만들어야 할 때가 됐다. 우리는 세계적인 변화의 전야에 살고 있는 것이다. - 유진 뎁스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 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작정하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