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은 ‘동맹’ 인질구출은 ‘외면’

美, “탈레반과 거래없다” 입장 고수

톰 케이시 미 국무부 부대변인이 정례브리핑을 통해 "이번 인질 추가 살해 사태는 탈레반의 사악함(viciousness)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美,“탈레반의 인질 살해는 사악”강경입장 비춰
정부의 '원칙 유연한 적용' 요청 사실상 거절


케이시 부대변인의 이런 발언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미국의 반응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23일과 25일 숀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이 “한국 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지지한다”며 한국 정부와 일정 거리를 두고 가급적 발언을 아껴왔다. 배형규 목사가 사망한 후에도 미국은 “슬프게도 한국 시민 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안다. 유족과 한국인들에게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는 말 외에 특별한 입장을 보이지 않아왔다.

미국이 이렇게 발언을 아껴온 것은 미국의 발언이 탈레반 세력들을 오히려 자극해 인질들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자체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더 주요하게는 “테러범과 거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입장에서 한국 인질을 석방하면서도, 미국이 내세웠던 원칙을 훼손시키지 않는 명분을 지킬 수 있는 묘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케이시 부대변인은 31일(현지시간) "지난 20여 년간 미국의 정책은 테러범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런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강조해 한국 정부의 ‘유연한 원칙의 적용’이라는 도움 요청을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미국이 이런 거절의 입장을 단호히 표명한 배경에는 "미국이 직접 나서라"고 요구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31일 청와대 천호선 대변인은 아프간 정부를 경유한 협상이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오히려 2명이 살해되자 "한국정부가 아프간 정부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단에는 한계가 있다"며 “많은 소중한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런 원칙적 입장을 유연하게 적용”해 줄 것을 미국에 요청한 바 있다.

시민사회 “미국이 직접 나서라”
파병에서는 '동맹' 인질구출은 등 돌려


인질의 생명이 촌각에 달린 시점에서 미국이 기존이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사실상 개입을 거절함으로써 ‘파병’에서는 동맹이지만, 인질 사건에 대해서는 외면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그 동안 한국 정부가 아프간 정부를 경유해 협상을 진행해 온 것이 사실상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인질 2명이 살해된 데 대해 미국이 직접 나설 것을 요구해왔다. 2001년 아프간 침략전쟁 이후 카불의 정권을 카르자리에게 이양한 것이 미국이고, 이번 사태의 책임이 미국의 침략전쟁과 한국 정부의 파병 공조에 있는 만큼 미국이 직접 나서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다.

미국이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도 미국 정부의 요청에 따른 아프간 파병에도 불구하고, 자국민을 구하는 데는 한미동맹이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한편, 어제 탈레반 측에서 석방을 요구한 수감자 가운데 3명은 미국이 직접 신병을 관리하는 대상이며 미국이 직접 승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이 나서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시민사회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피랍자 가족 20여 명은 오늘 오후 미 대사관을 방문하고 이번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미국과 국제사회가 나설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 아울러 가족들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무력 진압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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