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 발생 후 지금까지 말을 아껴오던 정치권이 일제히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역할론을 강조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을 비롯한 5당 원내대표는 이날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을 제외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등 원내 정당들은 이번 피랍사태에 대해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과 정부 대책을 촉구하는 원칙적 수준의 입장표명만 되풀이해왔다.
5당 원내대표, "미국과 유엔의 전향적인 자세와 역할 요청한다"
1일 김형오(한나라당), 장영달(열린우리당), 강봉균(통합민주당), 천영세(민주노동당), 정진석(국민중심당) 등 5당 원내대표는 공동성명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미국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공동성명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해 "무고한 인명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할 것을 촉구한다"며 "계속해서 원칙만을 되풀이하거나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또 다른 희생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갖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또 5당 원내대표들은 "무고한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인도적 협력이 절실하다"며 "당장의 인명살상을 막기 위한 미국 정부와 유엔의 적극적이고도 전향적인 자세와 역할을 정중히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정동영, "미국, 동맹국의 노력 다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
정당 차원이 아니더라도, 범여권 대선주자들을 중심으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물론 납치단체로 알려진 탈레반에 대한 비난은 두말할 것도 없다.
범여권 대선주자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은 1일 "아프간 정부와 미국 정부는 피랍자가 무사히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고 밝혔다.
정 전 의장은 "테러세력과는 협상없다는 국제 사회의 일반적으로 '보이는 원칙'을 지지하고 존중한다"며 "그러나 보이지 않는 원칙도 있고, 어떠한 원칙도 생명에 우선할 수는 없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미국정부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다.
그는 또 "미국은 아프간에 피랍되어있는 우리 국민이 안전하게 고국의 품으로 돌아 올수 있도록 진정한 동맹국의 노력을 다 해 줄 것을 거듭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한미동맹'을 강조했다.
천정배, "'테러세력과 협상 없다' 원칙 고수하는 미국 강력 규탄"
또 다른 대선주자인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도 이날 "아프간 피랍사태 해결을 위해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촉구했다.
정 전 의장의 입장 표명이 미국에 대한 '호소' 수준이었다면, 천 전 장관의 성명은 '비난'에 가까웠다. 천 전 장관은 이날 성명에서 "사실상 아프간 정부를 통제하는 미국이 테러세력과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직접적으로 미국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또 "이번 피랍사태는 미국의 대테러전쟁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하며, "그런 점에서 미국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이 사태의 당사국이라는 인식 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천 전 장관 역시 "미국이 적극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임하여 사태 해결을 함으로서 전통적인 한미동맹관계를 더욱 건강하고 굳건하게 발전시켜 나갈 것을 촉구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정치권 한목소리로 '미국.아프간 역할론' 강조, 왜?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대한 정치권의 이 같은 반응은 어제 청와대가 발표한 정부성명과 맥을 같이한다. 정치권은 "한국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라는 청와대의 '한국정부 역할 한계론'을 수용하는 한편, 약속이라도 한 듯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역할론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청와대의 어제 성명이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정치권의 반응은 미국정부의 역할론에 보다 무게가 실렸다.
노무현 정부와 마찬가지로, 정치권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역할론을 강조하고 나선 데에는 향후 전개될 정치적 책임론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여론은 피랍자들의 선교활동 등 개인적. 종교적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레바논 등 해외파병을 주도한 노무현 정부와 정치권의 책임은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천정배 전 장관이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 이번 사태가 '미국의 대테러전쟁'로 부터 연유했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어 보인다. 다만, 천 전 장관을 비롯해 정치권은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동조한 한국정부의 책임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고 싶은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천정배 전 장관, 정동영 전 의장, 김형오, 장영달, 강봉균, 정진석 원내대표 등 이들 모두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이라크 등에 대한 한국군의 파병을 용인한 당사자들이다. 때문에 비극적 사태가 계속되더라도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미국정부의 책임을 물을지언정 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책임론을 언급할 리 만무하다.
한나라당, '외교적 무능' 질타하면서도 "미국.아프간 전향적 태도 절실하다"
한편,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이번 사태 대응과 관련해 한국정부의 '외교적 무능력', '협상력 부재'를 질타하는 목소리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도 그리 힘을 받지는 못하는 모양새다. 한나라당 역시 '한국정부의 역할 한계론'을 수긍하는 분위기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1일 "탈레반에 붙잡혀 있는 인질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있는데도 정부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정부에 대한 성토를 늘어놓았지만, 전날 열린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역할론에 무게를 두는 발언이 쏟아졌다.
이날 회의에서 이주영 정책위의장은 "무엇보다도 아프가니스탄과 미국, 두 나라의 전향적인 태도가 절실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황진하 국제위원장도 "미국과 아프간 정부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설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라며 "5일 예정된 부시 대통령과 카르자이 대통령의 회담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다시 발생한 비극적 사태에 대해 어떠한 정치세력도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말하지 않는 가운데 피랍자 가족들은 오늘도 대국민 사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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