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책임' 간데없고 '반미논란'만 나부껴

범여 '미국 역할론' 대두에.. 한나라 '반미'로 번질까 노심초사

두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아프가니스탄 피랍사태가 발생 15일째로 접어들고 있다. 정부는 연일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지만, 청와대가 자인했듯 한국정부의 독자적 해결 노력은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정치권 안팎에서는 미국의 전향적인 대처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은 '미국 역할론'이 '미국 책임론'으로 번질까 미리부터 진화에 나서는 분위기다.

한나라당, 해법 없이 "모든 협상방법 동원해라" 원론적 주문만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공식 브리핑을 통해 "엊그제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수감자 석방 맞교환은 우리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언급했는데, 정부의 책임회피성 발언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며 정부의 '외교력 부재'를 질타했다.

나 대변인은 이어 "정부는 탈레반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누구와 접촉해야 하는지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문을 했지만, 정작 사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나 대변인은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해결가능 한 협상방법을 동원해야한다"며 "우리 국민들의 귀중한 생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했다.

해법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날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에서 나왔지만, 이 역시도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는 수준의 일갈이었다. 한나라당 내 정보통인 정형근 최고위원은 "인질석방에서의 실질적인 진전을 보기 위해서도 아프간 정부의 교섭에 막연하게 의존하기보다는 총리와 외교부장관, 특히 대통령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정부가 총력으로 직접 나서야 한다"며 "채널을 확보해서 추가 인명피해를 적극적으로 막아야한다"고 주문했다.

한나라당, '반미'로 번질까 노심초사

이날 최고위원회에서는 사태해결을 위한 해법을 모색키 보다 '반미' 분위기가 확산될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형근 최고위원은 "인질석방 협상이 지지부진한 이유를 미국 책임으로 돌려 마치 미국이 비인도적이라는 인상을 국민들이 갖도록 호도하면서 오로지 반미 코드로 제2의 무슨 사건을 만들려고 하는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움직임은 인질석방 교섭은 물론 국익에도 절대 도움이 안 된다"며 "이러한 무책임하고 유치한 움직임, 특히 반미 움직임을 쟁점화하려는 행동은 절대 자제해야 한다"고 차단막을 쳤다.

정형근 최고위원이 언급한 '무슨 사건'은 2002년 발생한 '효순.미선이 장갑차 사망 사건'으로 이 사건은 국내 반미여론을 고조시켜, 2002년 대선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강두 한나라당 중앙위의장도 회의에서 "반미를 외치는 사람들, 특히 일부 정치단체들의 무분별한 반미 때문에 미국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게 정부 측 입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왜 미국에 더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지 국민에게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범여권, '미국 역할론' 고조

한편, 한나라당의 분위기와 달리 범여권에서는 미국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우원식 의원 등 범여권 의원 33명은 이날 공동성명을 내고 "우리 정부가 ‘한·미동맹의 공고한 발전을 도모’하고자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듯이, 이제 미국이 ‘공고한 한·미 동맹을 위해’ 우리 국민의 생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면 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공고한 동맹은 동맹 상대국 국민의 생명도 자국 국민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보호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며 "따라서 우리 국민의 생명이 미국의 선택에 달려있다면, 미국은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원들은 '미국 역할론' 강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대테러)전쟁의 이유가 무엇인지 불분명해지고 있으며, 나아가 잘못된 전제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하나둘씩 확인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장영달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도 이날 열린 의장단회의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고한 우리 국민의 추가 희생을 막는 것"이라며 "아프간 당국도 그렇지만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UN의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자세와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치권, '반미' 논란으로 책임 피해가자?

고 김선일 씨 피살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 역시 정리국면으로 갈수록 사태의 근본원인과 책임을 둘러싼 대내적 논란은 불거질 전망이다.

하나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이들도 이제는 스스로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이 벌인 '잘못된 전제에 의한 전쟁'에 대한 것. 그리고 이에 동조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어 레바논에까지 군대를 파병한 한국정부의 책임론이다.

이 중 파병정책에 대한 논란이 불거질 경우 그에 동조해 온 범여권과 한나라당 모두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때문에 정부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정부의 책임론을 입에 담지 않는다. 한나라당조차 '외교적 무능', '협상력.정보력 부재'를 질타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의 책임론은 다르다. 너나할 것 없이 이번 사태 해결의 열쇠를 미국이 쥐고 있다고 인정한다. 미국의 역할론이다. 그런데 미국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비극적 사태가 계속될 시 '미국 책임론'이 충분히 대두될 수 있다. 범여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이런 움직임이 감지된다. 과거 '대미 자주'를 외치며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후보가 그러했듯 '미국 책임론'은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카드가 될 수 있다.

반면, 그 내용과 상관없이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미국이 관련된 논란을 '반미'의 시그널로 해석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반미'라는 키워드는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다. '반미'가 정치적으로 득이 되는 세력이 있다면, 반대로 실이 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범여권의 '미국 역할론' 강조 움직임에 대해 '제2의 무슨 사건'이라며 발끈하고 나선 정형근 의원의 반응은 자연스럽다.

미국과 달리 노무현 정부와 정치권이 '능력'도 없으니, 이들에게 사태 해결을 위한 역할을 요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국정부와 정치권이 이 비극적 사태에 대한 책임까지 피해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반미' 논란 속에 미국의 전쟁에 동조한 노무현 정부와 각 정치세력들이 면죄부를 얻게 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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