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정치놀이터 '미끄럼틀'이 오픈했다. 문화연대는 '미끄럼틀'에 대해 "급진적 행복을 찾아 상상력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라고 소개했다. 민중언론참세상은 '미끄럼틀' 중 '한장의 정치'를 기획 연재한다. '한장의 정치'는 "새로운 사회, 급진적 정책을 상상하고 공론화하기 위한 정책칼럼"으로 "만화가, 미술작가, 활동가, 교사, 평론가, 교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운동과 함께해온 이들이 상상하는 정책칼럼이 게재될 예정"이다.[편집자주]
나라 전체가 영어 공부의 광란에 휩싸인지 오래다(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번 대선판을 뒤흔들고 있는 것도 'BBK’라는 영어 알파벳이다. -_-;;). 문전성시를 이루는 영어유치원을 보라. 이제는 걸음마를 갓 뗀 애들부터 초중고 학생, 대학생, 직장인까지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생존’하기 힘들다고 여겨질 정도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동네 보습학원부터 종로의 유명 외국어 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기 위해 줄을 선다. 한 달에 몇십만원 정도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미래’를 위해 당연히 투자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어디 이 뿐이랴. 인터넷 토익시험 접수에 장애가 생긴 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9시 뉴스에 나올 정도고, 상황이 이렇다보니 토익시험 보러 1박2일, 2박3일 해외 원정까지 가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다. 만약 자신이 책상에 앉아 있다면 책상 위 혹은 책꽂이를 한 번 보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책상 앞에 영어책 한두 권은 놓여 있지 않을까? 이제는 ‘내가 왜 영어공부를 해야 하지?’라는 이유마저 잊은 채 ‘왠지 불안해서’ 혹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영어학원 문지방을 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영어공화국의 현실, 한국 사회의 영어 공부 ‘광란’에 대한 대선 후보들의 생각은 어떨까? 여론조사 1, 2, 3위를 달리고 있는 후보들 모두 영어교육과 사교육비 문제에 대한 공약을 늘어놓고 있지만, 한 마디로 어이가 없거나 혹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광란조장형’ 공약이 대부분이다.
이명박 후보의 ‘영어공교육 완성 프로젝트’는 누구나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지?) 아래 원어민 보조교사 확보를 통한 영어로 하는 수업을 확대하고, 또 교육국제화 특구 등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동영 후보는 초중고에 ‘영어 랭귀지 스쿨’ 설치, 영어 학습 시간을 900시간에서 2700시간으로 확대하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영어 교육 국가책임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아예 학교를 ‘영어공용지역’으로 만들겠단다. 영어 원어민 교사 채용 확대, 영어수업 시간 확대, 영어로 하는 강의 확대를 공약하고 있다.
연간 14조원이나 되는 영어 사교육비를 줄이겠다며 내세우는 공약이, 결국 ‘영어 공부의 강화’라니! 우리가 도대체 왜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 없이, 또 입시와 취업 등에 영어 성적의 비중이 지금과 같이 높게 설정되어 있는 한 ‘영어 공부의 강화’ 혹은 ‘영어 수업시간의 증대’는 결국 더 많은 사교육을 부추길 뿐이다. ‘유학, 어학연수 = 영어 능통’이 부와 경쟁력의 잣대가 되고 영어 구사 능력이 직무 능력 향상의 잣대로 작용하는 한 ‘영어 능력 향상’이라는 공약은, 영어에 대한 광란에 가까운 숭배를 더욱 부추길 뿐이다.
사실 영어의 세계 지배 문제는,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전 세계에는 대략 6천 개의 언어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약 2주에 하나 꼴로 언어가 사라지는 ‘언어살해’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영어가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수언어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어에 의한 세계 지배로 인한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영어에 의해 지배된 인터넷 환경은 어떤가. 영어에 매우 경도되어 있는 인터넷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국제적 정보교류를 가로막는 주요한 장애 요인이다. 과학, 예술, 문학 등이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방식이 영어잡지와 영어로 씌여진 책에 의해 좌우되면서, 비영어권의 과학과 문학, 예술의 발달과 소통이 가로막히고 있기도 하다. 물론 전 세계적인 영어 수업의 증대, 영어교육 산업의 확대로 인한 막대한 이윤이 어디로 흘러들어가고 있는가라는 매우 상식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왜 영어를?”이라는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의 ‘영어 광란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영어가 경쟁력과 부, 신분의 잣대가 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무시한 채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게 하고, 영어 학습 시간을 3배 이상 늘리고, 학교를 아예 영어공용지역으로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다. 영어가 필수과목이 되는 현실에 오히려 의문을 표시하는 후보, 졸업과 취업에 쓸데없이 토익, 토플점수 제출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후보, 영어 잘 하는 게 자랑일 수는 있으나 영어 못하는 것이 부끄럽거나 숨겨야 할 사실이 아닌 사회를 만들겠다는 대통령 후보가 그립다.
그나저나 왜 대통령 후보들은 토익점수 안 보나? 대학 졸업장 따는데도 토익점수가 필요하고, 회사 취직하는데도 필요한데, 대통령도 당연히 토익점수부터 제출해야 되는 것 아닐까?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토익 몇 점 이상이 적당할까? 만점? 900점? 8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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