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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에서 다시 일어나는 벼룩이자리

[강우근의 들꽃이야기](66) 벼룩이자리

모란이 큼직한 꽃송이를 활짝 펼쳤다. 자주색 꽃은 귀족적 자태를 맘껏 뽐낸다. 꽃향기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어찌 이리도 곱고 화려할까? 꽃잎은 꼭 종이를 만든 조화 같다. 아, 그렇구나! 모란은 사람이 만들어 낸 꽃이로구나.

모란 아래에는 지질이 궁상맞은 잡초들이 봄 잔치를 벌이고 있다. 모란을 가꾸면서 뽑고 베어 내도 잡초들은 또 다시 자라나서 저희들끼리 신 나는 봄꽃 잔치를 벌인다. 냉이, 꽃다지, 꽃마리, 제비꽃, 씀바귀……. 그 작은 땅에 도감을 한 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은 잡초들이 자란다. 그 잡초들 목록 끝 언저리에 벼룩이자리도 있다.


벼룩이자리는 길가나 밭둑 어디서나 흔히 자라는 한해살이 내지 두해살이풀이다. ‘유럽이 원산인 범세계적인 잡초이다.’(「한국식물검색도감」) 벼룩이자리는 자주 벼룩나물과 헛갈리는 풀이다. 벼룩나물을 벼룩이자리로 써 놓은 도감도 있어서 그런 혼란을 더 부추기는 것 같다. 벼룩이자리나 벼룩나물은 생김새가 비슷한 별꽃, 점도나도나물, 개미자리와 더불어 모두 석죽과에 속하는 풀이다. 벼룩이자리나 벼룩나물은 길가나 밭둑에서 흔히 자라는 풀이지만 도시에서는 벼룩나물보다 벼룩이자리를 더 쉽게 볼 수 있다. 시골의 길가나 밭둑을 다 덮여 버릴 듯 자라는 벼룩나물도 도시의 콘크리트 틈새에서는 벼룩이자리만큼 잘 자라지는 못한다.

벼룩이자리는 보도블록 틈새를 누비며 살아가는 개미자리와 밭둑을 뒤덮으며 살아가는 벼룩나물의 중간쯤에서 살아간다. 벼룩이자리는 벼룩나물보다는 개미자리를 더 닮았다. 살아가는 곳도 그렇지만 꽃의 생김새도 개미자리를 더 닮았다. 벼룩나물이나 별꽃은 꽃잎 끝이 깊게 패어 있어서 다섯 장의 꽃잎이 꼭 열 장처럼 보인다. 점나도나물은 꽃잎 끝이 조금 패여 있어서 꽃잎이 열 장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벼룩이자리에게는 이런 기교조차 사치인가 보다. 개미자리처럼 꽃잎이 전혀 패이지 않았다. 벼룩나물의 줄기가 부드러운 곡선이라면 벼룩이자리의 줄기는 곧은 직선이다.

벼룩이자리 줄기에는 아래로 향한 짧은 털이 나 있다. 이것은 물기를 낚아서 이슬을 맺히게 하고, 그것을 줄기를 따라 밑으로 흘려서 뿌리까지 가게 하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 이슬 한 방울까지 아껴가며 살아가지 않으면 척박한 도시 콘크리트 틈새에서 살아갈 수 없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진주알 맺힌 듯이 아침 이슬을 먹는 모란’이라고 노래했지만 정작 아침 이슬을 먹는 풀은 벼룩이자리이다. 모란에게 아침이슬은 ‘신선 노름’이지만 벼룩이자리에게 한 방울 아침이슬은 ‘일용할 양식’인 것이다.

모란에게는 과시와 도취는 있지만 자기 삶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식물학자는 이런 재배 식물들은 사람의 욕망, 특히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이용하여 ‘식물이 스스로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구사하는 전략’이라고 하지만 이런 삶은 기껏 해야 영혼을 팔아 버린 파우스트 같은 삶일 게다. 인간과 함께 진화해 온 잡초들은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야생을 잃지 않고 그들 스스로의 길을 간다. 모란이 멈추어 버린 길에서 벼룩이자리의 길은 시작된다.

의회주의자들은 말한다. 우리를 지지해 달라고. 그러면 우리가 대신 싸워서 너희들에게 베풀어 줄 것이라고. 그렇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삶이 없는 죽은 정치이다.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스스로 싸워서 얻어야 한다. ‘작은 양보’조차 얼마나 피나는 싸움으로 쟁취해 낸 것이었던가?

벼룩이자리는 개발로 망가진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절망이라 부르는 끄트머리에서 다시 삶을 일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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