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세월이 가고 어느 순간부터 빨간색이 정말로 좋아지더라구요. 제가 꼭 빨갱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초록색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면 빨간색은 뭔가 흥분되게 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요. 2002년에 한국에서 월드컵이 한창일 때 외국에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 돼라!”라고 적힌 빨간색 옷을 입고 새벽까지 길을 가고 지하철을 타고 다니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전 제가 없는 사이에 대한민국에서 혁명이 일어난 줄 알았습니다. ^^
토마토가 좋아요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서점이 털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빨갱이 사상을 주입하는 책들을 경찰들이 빼앗아가곤 했지요. 그들은 우리의 생각이 두려운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없애자고 하고 있으니깐요. 자본주의는 대강 고쳐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깐요. 자본가들에게 더 많은 나눔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짓누르고 괴롭히는 이 체제가 뿌리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깐요.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에게는 세금을 더 많이 매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쓸 집 한 채 말고는 집 없는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깐요. 방글라데시에서 왔건, 필리핀에서 왔건 모든 노동자들에게는 건강한 환경에서 일하고 국내외 노동자의 구별 없이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싸우고 있으니깐요. 미국의 부자들과 투식 투자자들을 위해 벌이는 전쟁은 당장에 그만 두라고 꽥꽥거리고 있으니깐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소득 4만 불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는 따뜻한 우정과 연대의 정신이라고 떠벌리고 있으니깐요.
빨간색은 열정과 새로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갱이입니다. 얼굴이 빨개서도 아니고, 빨간 내복을 입어서도 아니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빨개서 빨갱이입니다. 있는 놈들한테 붙어서 적당히 대강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놈들이 없는 놈들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 모든 인간과 자연이 서로를 감싸고 아끼며 행복하게 살자고 해서 빨갱이입니다.
지금 저들이 우리를 짓누른다고 해서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빨갱이이고, 사회주의자들입니다. 그것도 겉만 빨갛고 속은 하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겉도 속도 모두 빨간 진짜 빨갱이이고 싶은 빨갱이입니다. 그래서 전 토마토가 좋습니다. 겉도 속도 모두 빨갛잖아요. 필요에 따라 과일로도 쓸 수 있고, 야채로도 쓸 수 있지만 그 빨간 빛깔은 변하지 않으니깐요.
빨갱이 여러분 힘냅시다
[다음]에 ‘빨갱이’라는 글자를 넣고 검색을 해 봤더니 “빨갱이들이 최진실을 죽였다”라는 제목의 블로그 글이 뜹니다. 그래서 이게 또 무슨 일인가 싶어 그 글을 열어보니 내용은 이렇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이때다 싶어 소위 ‘사이버모욕법’을 ‘최진실법’으로 포장하는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내놓았다. 하다하다 이젠 고인의 이름까지 팔아 정치적 야욕을 쟁취하고야말겠다는 반인륜적인 착상까지 나온 것이다. 실로 점입가경이다....열도 받는 김에 술이나 한 병 살까하고 동네 슈퍼에 들렀더니 슈퍼 아저씨도 TV 앞에서 역정을 내며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에이, 이놈의 나라가 어찌 되려고 그러는 건지. 빨갱이 놈들이 댓글인가 뭔가를 가지고 아까운 탤런트 하나 죽였구먼. 에이, 더러운 빨갱이 놈들. 이놈의 빨갱이 놈들을 전부 잡아다 한강물에 빠트려 죽여 버리든지 해야지.”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게 우리 사는 현실입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 근처에 사는 한 할아버지도 수시로 술 먹고 와서 우리보고 ‘야 이 빨갱이들아!’ ‘김일성이가 그렇게 좋으냐!’하면서 사무실 바닥에 드러눕기도 합니다. 이 일이 누군가에게는 그냥 열 받고 말면 그만인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남성들이 없을 때는 사무실을 문을 꼭 잠그고 있어야 되나 집에 가야 되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 오기도 합니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일도 그렇고,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일도 그렇고 이명박 정권 들어 국가보안법이 더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사건이 터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해도 여러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좀 더 빨개 볼까?’하던 사람들도 ‘분홍색도 좋잖아. 꼭 빨간색이어야 되는 건 아니니깐’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특히 무서운 것은 빨갱이들이 스스로 자기 검열을 한다는 겁니다. 혹시 걸리지 않을까 싶은 거죠. 이런 자기 검열을 겉으로 얘기하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모르니깐 속으로만 몰래 검열을 하는 모습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대한민국에 빨갱이들이 얼마나 사는지 국정원은 알지 모르지만 저는 모릅니다. 다만 그 숫자가 몇 명이든 빨갱이 여러분들께 힘내시라고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기도 하지만 우린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바른 길을 가려는 사람들과 자신만의 이익을 하늘 높이 쌓으려는 사람들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때론 우리가 힘이 없어서 짓눌린다고 해도, 과거의 역사가 그랬듯이 앞으로의 역사도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변하게 될 겁니다. 우리 모두 용기와 힘을 냅시다. 우린 할 수 있습니다.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