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진보세력에게 일종의 ‘업보’다. 자본주의의 호황과 불황 주기도 아닌, 선거 주기가 돌아올 때마다 진보 세력들이 들썩거린다. 선거라는 업보를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진보대연합을 꿈꾼다. 진보대연합의 취지 자체를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진보대연합 안에는 늘 그렇듯이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인 요구가 공백으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한국 사회에서 선거는 특이한 논리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다. 진보가 대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대연합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또 하나의 논리는 ‘그렇다고’의 논리다. 그렇다고 좌파는 뭐 대안이 있냐 하는 논리. 그리하여, 좌파에게 대안이 없으므로 좌파는 소수이므로 그렇다고 진보 또한 대안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대연합으로 선거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 이 두 가지 논리들의 논리적 귀결이다.
언제쯤이나 이 업보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변혁 구상 이전에 이 업보에서 해방되는 프로그램이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각종 선거 때마다 민주대연합, 진보대연합 얘기를 하고 있을 것인가? 비판적 지지 논리가, 후보 단일화 논리가 노동자 민중 진영의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한 것이 없을 텐데도 진보라 자칭 타칭 하는 진영에서는 도통 발상의 전환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 민중의 운명 전체를 국회에 맡긴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얘기인 데도 왜 자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대연합 운운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가 관철되는 것일까?
국가와 자본의 외부에 존재하는 좌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일까? 국가와 자본의 외부에 위치해 있으면서 국가와 자본 안의 진보 세력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전달하지 못해서일까? 안과 밖의 소통 과정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일까? 이런 의미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해 외부성의 관계를 갖는 좌파들이 체제 내의 진보 세력과 만난 이번 모임은 나름의 의미가 있을 터이다. 좌파와 진보는 분명히 다르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경계’ 위에서 진보와 좌파는 소통할 수는 있지만 어느 쪽의 삼투압이 더 높은지는 재봐야 안다. 그 삼투압 측정이 부르주아 선거처럼 후보단일화를 위한 물밑작업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삼투압 측정을 하자는데 그것이 선거공학으로 이어진다면 진보대연합, 다시 말해 좌파와 진보의 소통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의 경계 위에서 진보와 좌파는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만나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는, 진보는 좌파가 될 수 있지만 좌파는 진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좌파는, 진보가 좌파가 될 수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좌파가 진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좌파와 진보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비대칭성을 인정하는 것이 진보와 좌파가 소통할 수 있는 조건이다. 진보는 체제 안에서 체제 바깥의 좌파보다 좋은 조건을 누려 왔기 때문이다. 두 번째 진보는 좌파의 내용을 체제 안에서 프로그램화하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그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는 함께 해도 좋다. 이것이 진보에 대한 과도한 요구일까? 비대칭성을 인정 하자고 하면서 좌파는 인정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니 너무 과도한 것 아닌가 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비대칭성이다. 이 두 번째의 비대칭성까지 인정하자는 것이다.
어렵사리 만났다. 하지만 선거를 위해 만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대연합에 대한 공세적인 개입은 필요하다.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개입마저 포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계 위의 만남과 소통이 한국 사회 변혁을 위한 배양도구로 쓰여야 한다. 몰 적인 존재로서의 ‘당’으로 수렴되어 갈지 그 임계점까지만 갈지는 서로간의 삼투압을 측정해 가면서 ‘느린 걸음으로’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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