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고자 정권마다 다양한 대책들을 내놓았지만 사실상 그 정책이라는 것이 중산층의 내 집 마련을 목표로 진행되었을 뿐 철거민이나 세입자를 포함한 주거 빈곤층은 상대적으로 제외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이명박 정권은 임기 초부터 어느 정권보다 없는 사람들을 위한 주택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그동안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택 부동산 경기로 인해 서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아왔으나 최근 글로벌금융위기이후 전체적으로 주택가격 하락세가 두드러지면서 미분양은 물론 분양받은 주택도 입주를 포기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는 실정이다. 2010년 6월 전국 아파트의 실거래가 신고는 3만 454건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장이 얼어붙은 지난해 2월(2만 8741건)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상태다 1) 이처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어선지 오래인데도 약 25만 채 이상의 아파트가 미분양상태로써 주택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등 과잉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절실한 서민 주택의 정책이라 할 수 있는 임대주택 공급량이 이명박 정권 들어 연속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취임 첫 해인 2008년 임대주택 건설실적(사업승인 기준)은 2007년의 14만6000가구에서 20.54%(3만가구) 줄어든 11만6000가구에 그쳤다. 특히 주택공사의 경우 건설실적은 9만4000여가구에 불과해 2007년 11만7000가구에 비해 2만3000가구나 감소한 것으로 2009년 8월 24일 국토해양부 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이밖에도 영구임대·국민임대주택 등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4가구 중 1가구가량이 임대료를 체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대한주택공사로부터 제출받아 25일 공개한 ‘임대주택 임대료 체납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09년 6월말 현재 임대주택 39만6382가구 중 9만5288가구(24.0%)가 임대료를 체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2008년 말 체납률 20.7%보다 3.3%포인트 늘어난 것으로 조사된 것이다. 근본적으로 임대료가 저소득층의 주거비 지불능력보다 높게 책정돼 있는 데다 임대료 인상마저 잇따르고 있는 상태다. 다음은 서울지역 서민들의 신규 월세 비중을 살펴보면 2006년 8월에 전체 41.3%에 달했다. 이는 2004년과 2005년의 각각 38%와 39%이었으나 이제 월세가 40% 이상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재 다주택보유자 현황에 따르면 2채 이상의 주택을 보유하는 가구는 전국에 887,180가구에 달하고 있다. 이 중 165,126가구는 3채 이상의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100대 집 부자들이 보유한 주택은 모두 15,464채로 1인당 155채의 집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우리사회가 얼마나 주택소유의 편중현상과 그동안의 주택투기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금방 알 수 있는 수치라 하겠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주택 공급은 과잉상태에 있음에도 주거문제의 양극화는 해결되지 않는 기형적인 상태가 계속 될 전망이다.
한편 이명박 정권은 소수 상류층과 건설자본의 배만 불리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비판을 벗어나기 위해서 10년 동안 500만 호의 주택을 공급하되 150만 호는 저소득층과 무주택 서민을 위한 보금자리 주택으로 공급한다는 ‘국민 주거안정을 위한 도심공급 활성화 및 보금자리 주택건설방안’을 발표한 바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표면적인 해결책을 넘어 총체적인 주거불안정한 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주거 빈곤층에 대한 해결의 기미는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침체된 부동산 시장을 살린다는 명목아래 2008년 10월부터 건설자본을 살리기 위해 9조 2천억 원을 투입하고 있지만 좀처럼 부동산 경기가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2009년 세제개편안을 내놓아 ‘종부세와 양도세’ 무력화 방안을 추진하여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으며 분양권 전매제한’기간을 단축하고 선분양제 시행과 분양상한제를 부분적으로 폐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미국의 경기침체를 초래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이 한국의 부동산 시장과 가계부채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심각하고 위험한 수준에 와 있음에도 최근에는 ‘총부채상환비율’마저 적극 낮추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밖에도 ‘경제난국 극복 종합대책’의 일환으로서 수도권 재개발·재건축 강행과 각종 규제의 완화, 용적률 완화 등의 정책, 그리고 소형 주택 의무비율과 임대주택 의무비율 등 그동안 유지해 왔던 재건축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용산참사의 문제로 주거문제와 철거문제가 사회적인 의제로 떠오른 상황에도 2009년 5월 27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시정비법)’ 개정안을 제출하며 ‘조합원의 종전 토지 또는 건축물의 가격산정 시 조합원을 둔 세입자로 인하여 손실보상이 필요한 경우 세입자에 대한 손실보상액을 뺀 나머지 가격을 종전의 토지 또는 건축물의 가격으로 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하였다. 이는 재개발조합측이 개별 조합원들의 재산을 감정 평가할 때 조합원 건물에 세입자가 있는 경우 이 세입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주거 이전의 비용만큼 조합원 재산에 대한 감정 평가액에서 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밖에도 서울시가 아파트 재건축 연한 현행 20-40년의 단축을 시도하다가 제동에 걸린 사실도 있다. 한마디로 주택공급 정책으로 투기를 활성화시켜 경기를 살려보겠다는 것인데 이는 실질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고 서민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주택과 주거문제는 우리사회의 근대화와 함께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한 지 오래 되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자면 역대정권의 부동산 주택정책의 실패로부터 그 원인을 차근차근 짚어 봐야 하겠지만 이명박 정권은 임기 초부터 주택문제의 양극화를 더욱 부채질 하고 있어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 정권과 용산 4가 다섯 철거민의 죽음
▲ 2009년 1월 20일, 용산참사 현장의 모습 [출처: 한겨레 신문] |
2009년 1월 20일에는 용산동 4가에서 철거민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철연 소속의 용산동 4가 철거민 30여 명은 1월 19일부터 용산동 4가 5층 건물에서 생존권 수호를 외치며 저항했다. 이들은 그동안 용산동 4가 철거민들에 대한 정부와 건설사의 막무가내 식 철거행위와 생존권말살 정책에 대항하며 수차례에 걸쳐 책임 있는 이주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청해 왔었다. 그러나 정부와 건설회사는 그때마다 이를 무시해 왔고, 이에 철거민들은 자신의 생존을 포기할 수 없어 마지막까지 저항하고자 망루로 올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불과 하루만인 1월 20일 새벽 5시 30분부터 살인적인 진압작전에 돌입했고 이었다. 30여 명을 연행하고자 1천 2백 명의 경찰과 특공대가 투입되었으며 이들은 물대포와 쇠 파이프를 동원하여 폭력적인 연행을 자행하였다. 경찰은 크레인과 컨테이너박스를 이용하여 용역 깡패와 합동으로 특공대원을 투입하였고 무차별적인 진압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폭력연행과 화재연기에 내몰린 철거민들은 건물에서 떨어지는 등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용산참사 벌어진 이유는 서울시가 용산지역을 국제업무 기능을 갖춘 서울의 부도심으로 개발한다는 계획아래 속도전을 내는 과정 속에서 용산의 참사가 벌어진 것이었다.
이 사건은 사인에 대한 의문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검찰은 일방적으로 농성 철거민들에 의한 화염병 투척과 그로 인한 화재 발생으로 인하여 사망과 부상을 당했다는 식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수사를 진행하였다.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초기부터 검찰 사건기록의 약 3 천 쪽을 공개하지 않은 채 재판을 진행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검찰 기록을 공개하지 않은 것이었을까? 용산참사는 도시빈민 투쟁사에서 가장 어처구니없는 투쟁의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빈민운동의 분열과 새로운 모색은 없는가?
2천년대 들어 철거민조직의 분화도 계속되었다. 2002년 7월에는 전철련의 소속지역 가운데 당시 ‘안암동 철대위’와 도봉동 철대위, 황학동 삼일아파트 철대위, 포이동과 하왕십리 등의 철거민들이 새롭게 규합하여 ‘빈민해방철거민연합’(빈철련)을 출범시킨다. 이후 이들은 전철련에 잠시 몸담았던 ‘목동 철대위’와 함께 조직을 정비하고 이후 종로구 창신동·숭인동의 삼일아파트 투쟁과 용산동 5가 재개발사업 철거민 투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임대아파트 쟁취투쟁을 이끌게 된다. 특히 이들은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일대 비닐하우스 촌을 조직하게 된다.3) 포이동 266번지는 서울지역의 다른 철거민조직보다 규모가 컸으며 당시 인근에 있는 타워팰리스는 2천년대 부를 상징하는 공간으로써 포이동 266번지와 대비되어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많은 학생과 빈민조직의 지원을 받게 되고 빈민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빈철련내 조직운영을 둘러싼 갈등이 나면서 빈철련은 다시 분화되고 현재까지 동일 깃발을 사용하는 단체 2개가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2009년 왕십리 철대위 일부 그리고 황학동철대위 등이 결합하면서 또 다시 내부 분화를 겪게 되고 ‘철거민전선’이 만들어진다. 이밖에도 조직 내 불화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비교적 다른 빈민운동조직에 조직운영이 민주적이고 탄탄하다고 알려져 왔던 주거연합조차 2009년 용산참사 투쟁을 거치면서 내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아직까지 그 후유증이 치유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각각의 철거대중조직들은 90년대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있던 재개발·재건축, 특히 뉴타운 재개발 붐이 김대중 정권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새롭게 철거민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전철련의 투쟁방식은 어느 조직보다 비타협적이었고 투쟁적이었다. 가령 99년 시위현장에서 보수수구언론으로부터 사제 총사용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2000년에는 철거민대책을 요구하며 당시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사를 점거한 사건도 있었다. 2005년 오산에서는 철거를 시도하던 용역업체 직원이 사망하면서 전철련 소속의 회원 19명이 대규모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철련은 내부 조직운영에서의 문제와 상도동 투쟁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철거민의 정체성을 둘러싼 ‘상가주택의 조직화’ 문제 등의 이유를 걸고 ‘노동해방 철거민연합’으로 또다시 결별하게 된다.
한편 2천년대 초반까지 전철련은 전노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전국빈민연합’을 중심으로 공동의 운동을 전개해 왔었다. 그러나 2천년대 들어 민주노동당 가입을 둘러싼 정치방침 논란과 전빈련 내 전노련의 패권적인 조직운영 문제 등을 지적하며 전철련은 전빈련을 탈퇴하게 된다. 당시 민주노동당 공식 가입과 관련해서 전노련도 아직 논의의 초기 단계 였으나 일부 언론에서 당시 총선을 앞두고 몇몇 대중조직과 함께 배타적 지지를 한 것으로 보도가 되면서 2004년 9월 6일 오후 '전국철거민연합'에서는 전격적으로 "'전국빈민연합'은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라는 4장이 조금 넘는 분량의 성명서를 통해 전빈련 해체를 선언하게 된다.
이명박 정권과 노점상운동의 표류
노점상 운동조직도 내부 분열을 겪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1999년 들어 정기총회를 앞두고 의장단 선출을 둘러싸고 난항을 겪다가 2000년 전국노점상연합과 민주노점상총연합으로 분열하게 된다. 당시 분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 단속에 맞서서 공동 대응하고 그해 8월 박봉규 씨의 분신과 2003년 청계천복원공사를 둘러싼 노점상 행정대집행 등에 양 조직은 공동으로 대응하면서 ‘통합실무소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마침내 2003년 12월 29일에 고려대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양조직은 통합을 하게 된다.
이 당시 분열의 원인은 단순한 자리다툼이었다. 전노련의 의장직을 놓고 오랫동안 장기집권을 해왔던 이필두 의장에 대한 견제였고, 마침내 총회시점에 이필두 의장 측의 회원들이 총회 장소에 난입하여 총회를 방해하면서 시작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로 몇 개월 동안 대립을 하다가 결국 이필두 의장의 자리매매 사건이 폭로가 되면서 이필두 의장의 사과와 징계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는 일시적인 봉합 이었을 뿐 또다시 2천년 하반기에 재현이 되는데 민주노련 등 기타의 노점조직으로 분화되는 핵심적인 원인이기도 하였다.
한편 이명박 정권 들어 노점상에 대한 노점관리통제대책은 노점상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대표적으로 많은 구속자를 낳았던 이근재 열사 투쟁이 전개된 고양지역 노점상들에 대하여 ‘노점관리통제대책’이 집행되었으며 대통령선거가 끝난 다음날 수많은 시민들이 대선이라는 정치일정에 관심이 쏠려있는 것을 틈타 동대문 운동장에 대하여 기습적으로 일방적인 철거를 강행하고 있다. 당시 동대문 운동장 주변부에는 천명이 넘는 노점상들과 영세 상인들이 운동장과 함께 오랜 시기 삶에 터전을 일구어 왔다.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없이 한겨울 강제철거를 강행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대문야구장은 101년 한국야구역사의 성지이자 산 증인이기도 하며 수많은 이들의 기억이 살아있는 곳이다.
결국 노점상들에 대해서는 숭인동 풍물벼룩시장으로의 이전을 이끌어 냈지만, 동대문운동장철거반대라는 애초의 명분에 대해서는 노점상들의 이해와 이익이 관철되자 전노련이 ‘동대문 운동장 철거반대 공동대책위’에 발을 뺀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노점상 상층부의 일방적인 사업추진과 서울시와의 합의에 대해 논란을 넘어선 비판이 노점상과 외부 단체로부터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또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 2008년 서울시는 도시가 중심이 되어 디자인을 활용하여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취지아래 10월 10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잠실종합운동장과 서울도심에서 제1회 서울디자인올림픽이 개최하였다. 하지만 디자인을 통해 문화를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거리질서 확립이라는 목표아래 노점상에 대한 단속이 강행되었다. 이에 항의하여 문화연대, 빈곤사회연대 등 제 진보적인 사회단체 및 정당 등이 참여한 대책기구를 결성한 전노련과 전빈련은 결성식 날 서울시를 상대로 대대적인 집회를 계획하였으나 집회 전 서울시와의 면회를 통해서 일방적으로 집회를 취소하기에 이른다. 그런 가운데 결국 2009년 3월 26일 전노련은 서울시청 앞에서 개최된 자율질서사업 발대식을 하루 앞두고 서울시와 4개 항을 중심으로‘노점관리대책’에 대하여 소위 상층간부 선에서 회원 몰래 합의를 해주는 사건이 있었다. 이제 전노련은 전빈련이라는 상급단체의 이름으로 대외적인 연대사업들을 진행해 나갔지만 이들이 어떠한 투쟁을 전개한다고 해도 신뢰를 하지 않게 되었다.
‘노점관리대책’ 이란 한마디로 자치단체에서 노점상 개개인에 대한 실태조사를 시작으로 재산을 포함한 신상정보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결국에는 노점허용 재산기준초과금액을 설정하여 노점을 불허하고, 기준을 엄격히 부과하여 신 발생 노점의 억제와 기존 노점의 축소를 위한 도구로 악용되고 있는 정책이다. 특히 주요 간선도로는 금지구역으로 지정하거나 통행인이 없어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뒷길에다 유도구역을 지정해 시범거리를 조성하거나, 마차의 규격화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곳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노점상 행위가 자치단체의 관리대상으로 종속 되어 차츰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업들은 대부분 왜곡된 여론 작업을 통해 추진되거나 ‘노점상 관리 대책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해 관철되고 있다. 그런데 전노련은 노점상 운동의 구심이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조직이었음에도 노점상(빈민) 회원의 권리신장이라는 목적을 버리고 회원동의 없이 서울시의 요구에 도장을 찍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노련의 운영기조는 2009년 용산싸움에서 또다시 드러난다. 용산참사는 이명박정권의 개발정책이 빚어낸 가장 커다란 사안이었고 모든 빈민운동조직은 물론 전체운동진영의 결집을 요구하는 중요한 투쟁이었다. 이렇듯 용산참사를 둘러싼 투쟁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공동의 투쟁을 전개했어야 하지만 2009년 1월 용산참사 해결을 위한 도시빈민결의대회를 하루를 앞두고 전노련에서는 아무런 이유없이 조직동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게 된다. 이후 용산참사 장례식이 열릴 때 까지 일년 동안 전노련의 깃발은 용산투쟁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위와 같은 원인은 다 이유가 있었다. 고양투쟁으로 구속된 이필두 의장의 재판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는 사건은 또 있었다. 당시 이필두 의장의 항소심 재판 과정 속에서 최후진술을 통해 “자신은 서울시와 협력하고 투쟁을 자제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전노련을 엄호하고 지지했던 많은 연대단체와의 관계는 물론 전노련 내 좌파세력을 정리시켰다는 표현을 써가며 판사 앞에서 굴욕적인 자세를 보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용산참사 투쟁에 스스로 앞장서서 불참을 선언하였다”고 떳떳하게(?) 발언을 하였다. 이러한 참담한 상황에서 이제 남아있는 일부 활동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랫동안 함께했던 조직을 떠나는 것이었고 끝까지 남아서 조직을 지키는 일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새롭게 조직을 재편하는 길 이었다. 이 중 전노련의 다수 활동가는 ‘어용노조를 깨고 민주노조’를 건설 한다는 각오로 새로운 노점상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 시점은 하반기 전노련의 대의원대회로 또다시 이필두 의장이 규약을 어기고 출마를 결정하는 시기였다.
마침내 2009년 12월 15일, 전노련 중앙위에서 규약개정안이 검토되었다. 의장 임기를 2년에서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는 내용을 삭제(안)을 제출하였고 모든 규약과 임원선출은 대의원대회에서 선출하도록 한 규약규정을 무시한 채 이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이필두 의장 추대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 문제 제기를 하는 활동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회의장 밖으로 끌어내었다. 그러자 전노련 서울의 일부지역에서 일제히 중앙위의 부당함을 알리는 성명서가 발표되고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러한 탈퇴는 영남권까지 확산되고 마침내 약 22개 지역이 중심이 되어 2010년 1월 ‘민주노점상전국연합’을 새롭게 결성하기에 이른다.
- 빈민운동진영의 분열의 원인은 무엇인가?
빈민운동진영의 분열의 원인은 무엇이고 왜 최근 용산참사가 터진 후 이러한 문제들이 불거졌는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특히 전빈련 소속의 전노련을 중심으로 본다면 하나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작년 용산참사 문제는 대단히 커다란 사건이었고 이명박 정권으로 하여금 제 2의 촛불항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그동안 지역별 또는 중앙 차원에서 직 간접적으로 선을 닫고 있던 정보과 형사들의 개입을 통해 용산투쟁에 결합하는 것을 사전에 철저히 차단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아직도 지울 수 없다.
특히 전노련의 경우 그 조직대오와 숫자는 빈민운동진영에서는 가장 많은 회원들이 조직되어 있고 최근 이근재 열사 투쟁을 비롯하여 도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투쟁에 비춰 최소한 용산투쟁이 확산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조직이었기에 경찰쪽 정보라인에서는 기를 쓰고 용산투쟁에 개입하려는 것을 차단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껏 보여준 도시빈민투쟁을 선봉에서 이끌었다던 전노련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만 것이다.
다음은 내부로 돌아와 정치적인 사안을 둘러싼 문제는 없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철연은 당시 전노련과 함께 전빈련 소속이었던 시절인 2004년 총선이 끝난 직후 '전국빈민연합은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라는 문건을 통해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지지 방침 등 몇 가지 사안을 둘러싼 문제제기를 하며 탈퇴를 하게 된다. 전빈련 소속의 (전노련, 전철연)간 합의를 무시하고 정치방침에 대해 패권적으로 밀어부친 것에 대한 항의였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사안으로 그 후로도 매시기 조직 안에서는 주요 정치방침의 결정을 둘러싸고 종종 갈등이 벌어지곤 하였다. 물론 대중조직 내 정치방침을 둘러싼 갈등은 비단 전빈련 만의 문제로 볼 수는 없는 문제다. 다만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지 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방침을 관철시키기 이전에 대중조직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되고 무엇보다도 회원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사안에 대한 이해와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출발을 해야 하기에 그만큼 신중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평생을 잘못된 정치체제에서 살아온 분들에게 진보적인 정치조직과 운동단체를 소개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지만 회원대중들을 정치적 주체로 삼아 내겠다는 의지만 확실하면 해결이 안 될 것도 없었다.
이 땅의 모순을 온몸으로 격으로며 고통 받고 어렵게 사는 이들의 삶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먼저 정치적인 문제와 결정을 둘러싸고 해당 간부들 간의 상호소통을 통해 공통분모를 만들어 내었어야 했지만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입장 차이를 확인한 다음 조직의 절차에 맞춰 논의에 붙이면 활동가들 간의 신뢰가 깨지지 않고 한걸음은 전진 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를 추진하는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간부들 혹은 활동가들은 서둘러 정치방침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 속에서 회원과 활동가간 그리고 활동가와 활동가간에 불화와 갈등이 반복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2004년 전빈련의 분열 그리고 그 이후 각각의 조직이 분열되는 과정 속에서 표면상 드러나지 않았지만 커다란 이유였다.
두 번째로 원론적인 노선에 대한 문제이다. 이 부분은 다시 한번 언급을 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노점상 철거민 등 빈곤층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한 입장이다. 이러한 시각이 건전하게 내부에서 논쟁으로 승화되기보다는 어떠한 특정시기 가령 조직이 분화되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우월감의 반영이거나 서로를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령 철거민이 혹은 노점상이 빈민이냐, 아니냐 아니면 노동자냐 아니냐의 문제(철거민을 지역일반노조건설의 주체로 규정하는 문제와 철거민 구성원 가운데 일반상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노점상의 경우 비공식부문론에 입각해 노동자로 규정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러한 고민들은 조직운동의 중장기적 전망과 운동방향을 모색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토론주제라 할 것이지만 잘 정리되지 않은 수준에서 매우 극단적인 발언들로 “반 빈곤 빈민문제의 접근을 개량주의적 정책의 일환으로 자본의 분할 정책으로만 협소하게 치부하는 오류나 반면, 반 빈곤 빈민문제가 안고 있는 재생산공간으로서의 문제를 노동운동으로 환원하여 노동현장의 문제” 로만 이해하려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특히 위와 같은 원론들이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부딪히는 단속과 철거 같은 문제들과 실천적으로 어떻게 유기적으로 배치 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도시빈민 운동진영이 풀어야할 중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세번째로 빈민운동의 리더십을 둘러싼 문제다. 개인적으로 사실상 이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은데, 빈민대중조직의 정치적 리더십과 활동가들의 역할을 들 수 있다. 우리운동이 80년대 이후로 싹이 트면서 목숨과 구속을 담보로 처절한 투쟁을 전개해 왔듯이 빈민운동도 당시 이들이 앞장서서 온몸으로 보여주는 과정 속에서 빈민운동의 지도력이 구축되어 왔고 조직의 힘으로 결집되어왔다. 빈민운동 지도자들은 감옥을 자기 집 들락거리듯 희생을 밥 먹듯이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90년대와 2천년대로 접어들면서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어 조직 내 지도력으로 축적되기 보다는 경험과 희생을 앞세운 절대적 권력자로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독선적인 조직 운영의 리더십으로 변질되어 나갔다.
당연히 이들은 의식적인 측면에 있어서 발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점차 퇴행되어 나갔으며 운동의 동기부여가 과거에는 의리와 희생이었다면 이제는 조직 내 군림하거나 얄팍한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어떤 이는 해당조직의 정치세력화를 화두로 들고 나오는 사람도 없지 않았지만 어찌보면 정치적 욕망을 채우는 데 있어서 회원들을 대상화 시키거나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문제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는 그 조직 내 골간과 뼈대를 이루는 규약과 조직운영 방향이 있으나 내부 규율은 개인의 제왕적 카리스마와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인해 종종 무시되기 일쑤였다.
한편 위와 같은 문제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선진적인 활동가들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제대로 조직되지 못하고 개별적인 목소리로 사장되거나 때로는 고립되기도 하였다. 사실상 생존권을 위해 결성된 대중단체, 먹고사는 문제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 단체에서 활동가와 집행부의 의식적인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하고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활동이 회원 일반에게 영향을 미쳐 확대될 때만이 진보적인 도시빈민운동의 지향을 갖게 되는 것일 거다.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장기적인 방향과 정책을 세우고 규약에 근거해서 원칙을 지켜 나가며 대중과 함께 차근차근 호흡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들에게는 어찌보면 조직 내부 문제보다도 세상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 쉬운 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조직내부의 모순은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할이지 막막할 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한 개별 활동가의 노력으로 절대 극복되지 못하며 활동가 상호 협력과 공동의 노력으로 해당조직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를 기반으로 각각의 활동가들의 경험과 운동방향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검토될 때만이 조금이나마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전빈련과 전노련의 활동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인 사안과 운동을 둘러싼 원론적 논쟁보다도 조직 내 잘못된 경향에 맞서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빈민운동은 다른 대중운동에 비춰 운동진영 안에서도 소외되어 왔거나 이제까지 언급했듯이 열사들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이목을 받아 왔다. 따라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사실상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대중 조직 안에 헌신적인 활동가들의 노력을 언급했지만 대외적으로 연대단체의 개입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직의 실상을 대외적으로 진행되는 연대사업을 통해 함께 주목하고 해결하는 방식이 필요했지만 사실상 현재로써는 이 부분도 진전된 것이 없어 보인다. 최근 우리사회의 운동조직간 연대사업의 작풍이란 특정 이슈와 주제를 둘러싼 공동의 실천을 넘어 해당 조직의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는 풍토다. (해당조직 내 문제는 다른 단체들이 참견할 문제가 아니라는 식의 반응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주노총과 같은 커다란 조직에 대해서 비판과 개입은 하지 않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빈민운동조직은 자신들이 단속과 철거라는 어려움에 빠지면 이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연대단위를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데 그치는 실리주의적 태도와 반면 대중조직에 대하여 동원과 재정적 지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단체들 간의 또 다른 역편향이 분명 있는 것이다. 각각의 운동조직간 상호연관 속에서 조직 내외적인 문제와 모순을 유기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상호비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풍토는 도시빈민운동의 뿐만 아니라 전체 운동에도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 2천년대 새로운 반 빈곤 연대운동 빈곤사회연대
▲ 2004년 빈곤사회연대(준) 출범식을 앞두고 타워펠리스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모습 |
한편 새롭게 주목되는 것은 2천 년대 들어 IMF 이후 반 빈곤운동의 흐름이다. 2001년도에는 ‘주거복지연대’를 설립하여 주거권운동에 복지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며, 최저주거기준의 설정을 주장하고 주거기본권 제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 2002년 최저주거기준에 대한 조항을 주택법에 신설하는 성과를 얻는다. 4)
이밖에도 2001년 12월 최옥란 열사의 투쟁을 기점으로 불안정노동자와 광범위한 빈곤층과의 연대를 추진하는 등 기존의 시민단체 중심의 반 빈곤운동을 넘어 노점상, 철거민, 장애인과 노숙인 단체 그리고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연대’(이후 ‘빈곤철폐를 위한 사회연대’, 이하 빈곤사회연대)가 반 빈곤운동의 기치를 걸고 새롭게 등장하였다. 빈곤사회연대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에 따른 빈곤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당시 졸속으로 추진된 ‘기초생활보장법’의 한계와 문제를 지적하면서 ‘기초법 연석회의’ 등의 결성을 주도하거나 다양한 빈곤을 둘러싼 의제와 생활권의 문제를 제기하며 사업들을 펼쳐 나갔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04년 3월 30일 ‘빈곤해결을 위한사회연대(준)’의 발족하게 된다.5)
이제까지 살펴봤듯이 단속과 철거라는 문제에 직면한 처절한 투쟁이 노점상 철거민 등 당사자들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지만 2천년 대 이후 사회 각 부문으로 확산되고 있는 빈곤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대응기구가 절실히 필요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한 역할과 임무가 ‘빈곤사회연대’에게 쥐어졌던 것이다. ‘빈곤사회연대’는 전빈련 등과 공동으로 조직위원회를 결성하고 ‘전국빈민대회’를 개최하거나 빈곤문제에 대한 각 부문별 단위별 의제를 산출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2009년 용산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헌신적인 활동을 벌여 나가기도 하였다.
각주)-----------------
1) 경향신문, 2010년 7월 20일
2) 경향신문, 2009년 8월 26일
3) 길윤형, ‘두 개의 길, 전철협과 전철연’ 『한겨레 21 제558호』
4) 박현주, “도시재개발지구의 주거권 운동의 연구” 한남대 사회문화대학원 2006년. p31
5) 빈곤사회연대, http://antipoor.jinbo.net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