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해방을 위한 ‘자율적 과학’

[신간안내] 앤드류 콜리어, 이기홍·최대용 옮김, 『비판적 실재론, 로이 바스카의 과학철학』(후마니타스, 2010)



1. 과학은 자명하고 확고한 불변의 진리인가?

천안함 조사 결과를 두고 과학적 진실을 둘러싼 논란이 진행 중이다. 한쪽에는 엄밀한 과학적 실험과 검증을 거친 결과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조사 결과의 진실/진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 ‘과학적’ 절차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며 실험과 검증 그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4대강 개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에도 어김없이 ‘과학적’ 논거가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왜 엄밀하고, 투명하며,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과학적 활동을 둘러싼 논란이 사회적으로 끊이지 않는 것일까?

정치적 선택이나 의사 결정을 둘러싸고 의견이 첨예하게 갈등할 때, 특정 집단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동원하는 ‘과학’의 권위는 무엇에서 유래하는가. 도대체 ‘과학’이란 무엇인가. 실험과 관찰을 통해 획득한 지식이 과학인가. 그렇다면 실험과 관찰은 어떤 특징을 갖는 활동이기에 과학적 지식의 기초가 되는가. 과학자들끼리 타협해 합의한 지식이 과학인가. 그렇다면 과학자들은 왜, 어떻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합의에 도달하는가.

과학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특성과 구조를 분석하여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과학의 활동과 그 결과인 지식/진리를 관찰 가능한 대상들의 수준으로만 환원하는 실증주의 과학철학은 이미 오래전에 비판받고 상당 부분 기각되었지만 여전히 보통 사람의 그리고 다수의 인문사회과학자들의 사유 속에 과학에 대한 해명으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반면에, 실증주의 과학철학을 비판하고 과학의 사회적 성격(예컨대 과학적 진리를 과학자 공동체의 합의/협약으로 환원하는)을 강조하는 협약주의 과학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부인함으로써 과학에 대한 상식적인 믿음과 배치되고 있다.

‘비판적 실재론’은 이런 과학철학들의 합리적 핵심은 유지하면서 그것들 오류를 정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기획으로 출발한 과학철학이다. 이제 ‘비판적 실재론’은 구미의 학계에서 과학의 특성과 구조와 한계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넘어 여러 학문 분야의 연구에서 방법론적 지침으로 사용되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혁신하는 다학문적이고 국제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제시하는 이 책은 [특히 인간에 대한] 과학이라는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 과학이라는 무기로 싸우고자 하는 사람, 과학이라는 무기와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읽어야 한다.


2. 실증주의와 협약주의, 해석학을 넘어 : 과학은 경험에서 실재로 도약하는 활동이다

이 책은 비판적 실재론을 주도하고 대표하는 학자인 로이 바스카의 초기의 저작들을 종합하고 정리한 것으로, 과학철학 일반은 제1부 “초월적 실재론”으로, 사회과학 철학은 제2부 “비판적 자연주의”로 나누어 해설한다. 실제로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용어는 ‘초월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 — 바스카가 과학적 실천들을 분석하여 이끌어 낸 일반적 존재론을 가리키는 — 과 비판적 자연주의critical naturalism — 초월적 실재론이 인간 과학들에 대해 갖는 가능한 함의를 그가 발전시킨 것을 가리키는 — 라는 용어를 축약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바스카의 이론적 입장을 축적으로 제시하는 표현으로, 바스카 자신의 주저인 『실재론적 과학론』에서는 과학철학 일반을, 『자연주의의 가능성』에서는 사회과학 철학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바스카의 철학, 특히 자연과학 철학 일반을 다루고 있는 저서들은 여러 곳에서 문법적으로 분해되지 않을 만큼 난삽하고 논리적 단절과 비약이 많아, 접근하고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국내적으로 소개가 미흡한 실정이기도 하다. 반면에, 바스카의 철학을 소개하는 이 책은 단순히 바스카의 견해를 정리하고 해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논리적으로 보충하고, 때로는 바스카의 결함으로 생각되는 것을 정정해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단순한 해설서를 넘어 그 자체로 비판적 실재론의 전체적인 모습에 쉽게 접근하고 충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종합적인 소개서다.

먼저 ‘과학’의 특성과 관련해 바스카의 주장을 요약하면, 과학은 경험되는 ‘현상’에서 그 현상을 발생시킨 ‘어떤 것’(즉, 실재)을 찾아 나아가는, 추구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실재로의 (사유 속에서의) 도약’으로 특징지을 수 있으며, 이 도약 과정에서 인간은 귀납과 연역뿐 아니라 가추와 역행 추론으로 불리는 다양한 사유 방법들을 동원한다. 바로 이것이 ‘과학적 방법’이며, 통계나 모델 구성이나 실험 등은 다양한 사유 방법을 경험적으로 체현하는 것들이다.

이때 과학자들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추정하여 사유 속에 재구성한 실체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 자체는 구별되며 유사할 수도 있고 상이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인간의 지식이 언제나 오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그렇지만 모든 지식이 동일한 정도로 오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인식적 실천의 발전과 함께 기각・수정・발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은 실증주의와 협약주의 나아가 해석학적 철학과 대척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실증주의에서는 인간을 주어진 사실들을 수동적으로 감지하며, 그것의 일정한 결합을 기록하는 존재로 전제한다. 따라서 ‘경험주의적 존재론’은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것에 대해서만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실증주의/경험주의는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건간의 불변적 결합에 기초한 흄적 인과성만을 인정해 왔다. 하지만 사실상 ‘경험’은 인간의 인식 영역의 ‘범주’이며, 따라서 경험주의적 존재론은 인식의 범주와 (인간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존재의 범주를 혼동하는 범주 오류, 또는 ‘인식적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해석은 세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러한 불변적 결합이 왜 발생했는지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스카는 이러한 견해를 “인과법칙과 그것의 경험적 근거를 잘못 동일시한 것”이라 비판한다. 실증주의와는 달리 비판적 실재론은 ‘A에 의해 자극되었을 때 B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는 그러한 자연적 기제 M이 있다면, 그리고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A와 B의 연쇄가 필연적인 것’이 되며, 이때 자연적 기제 M은 A와 B의 연쇄를 설명해 주는 인과적 기제가 된다. 따라서 실증주의가 주장하는 A와 B의 연쇄가 인과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법칙의 경험적 근거일 따름이다.

게다가 비판적 실재론은 이러한 인과 기제 M은 경험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층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바스카는 이를 세 가지 층위로 구분한다. ‘경험적 영역’, ‘현실적 영역’, ‘실재적 영역’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성냥은 ‘발화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경우 현실적으로 발화하기도 하며, 발화한 것들 가운데 일부는 경험적으로 관찰된다. 이것들 각각을 실재적인 것, 현실적인 것, 경험적인 것으로 영역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인과 기제 M은 언제나 직접적으로 경험 속에 확인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의 실재성은 ‘물질적 사물들에 변동을 가져올 수 있는 실체의 능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곧,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점에서 과학은 지속적인 변증법 속에서 현상(또는 일련의 현상들)을 판별하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구성하고, 그 설명을 경험적으로 시험하는 세 국면적 발전 도식을 갖게 되며, 이렇게 하여 작동하는 발생 기제가 판별되면, 그 기제는 다시 설명해야 할 현상이 된다.

해석학 역시 이러한 비판을 벗어나기 어렵다. 해석학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 주목하며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연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석학에서는 자연과학이 경험적 규칙성을 기록하고 사건들을 예측적인 포괄 법칙에 포섭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반면, 인간의 행위는 특정한 목적을 가진 것이며 오로지 그 행위에 관련된 규칙 및 규범과 개념을 파악하는 것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만으로는 사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나아가 인간의 목적 자체가 허위적이거나 부적절할 것일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목적이 왜 발생했는지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다. 나아가, 이들이 생각하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실증주의적 과학관에 기초한 구분에 불과한 것으로, 현대 자연과학은 실증주의적, 경험주의적 방법론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3. 비판적 실재론과 사회과학

현재 사회과학 방법론의 정통으로 간주되는 실증주의를 비롯한 경험주의는 바로 경험적 규칙성과 사례.확증(또는 반증)의 독단에 기초하고 있다. 즉 법칙은 경험적 규칙성이거나 또는 그것에 의존하며, 그것들에 대한 적절한 통계와 예측을 통해 확증(또는 반증)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통의 설명은 존재하는 것을 경험적인 것으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으로 지나치게 제한적이며, 이에 기초한 이론을 실재에 대한 올바른 재현으로 승인한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으로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다.

이 점에서, 자연 발생적인 사유의 방식과 이것을 반영하는 철학적 경험주의는 그 실재를 신비화한다. 왜냐하면 경험주의는 사회적 실천인 과학을 통해 파악된 (사회적/이론적) 사실을, 자연적 사실로 만들기/믿기 때문이다. 사회적/이론적 사실들을 자연화함으로써 탄생하는 물신주의는, 그 사실들을 발생 또는 유지시키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설명을 좌절시키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게 된다. 요컨대 현실을 탈역사화하고 영구화하게 된다.

경험주의의 이러한 한계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사회 및 사회적 현상들에 관한 사실들이 오로지 개인들에 관한 사실들에 입각하여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채택하는 순간 이론가는 곤란에 처하게 되는데, 사회 분석의 기반으로서 ‘개인’을 불러내자마자, 그 ‘개인’을 설명하는 술어들이 ‘사회적인 술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가진 특별한 속성을 가리키는 술어들은 모두 그것들의 사용에서 사회적 맥락을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을 사회 분석을 위한 최초의 시작점으로 상정하자마자 다시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개인의 행위를 재정의 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하는가를 설명하긴 하지만, 인간이 무슨 행위를 하며 또한 그 행위를 왜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방법론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인간의 이성은 욕망의 효과적인 노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방식 속에서 인간들이 이성적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오로지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하는가를 설명할 뿐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인간 행위학(praxiology)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와 달리, 비판적 실재론은 인간 과학들이 본래 비판적이며 자기 비판적이라고 파악한다. 즉, 사회적 객체들에 대한 해명은 가치가 주입되어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치를 주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그리고 원시 과학적) 견해에 대한 과학적 비판은 본질적으로 해방적 충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일정한 허위의식, 또는 ‘허위’라고 지적할 수 있는 어떤 일정한 의식의 필연성을 우리가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의식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그것의 해소를 지향하는 행위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뒤따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비판적 실재론과 사회과학적 성과

전 세계적으로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에 기반을 두고 있거나, 이를 응용해 다양한 사회과학적 분석에 접합시키고 있는 이론적 흐름들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대표적인 좌파 이론가인 밥 제솝을 비롯한 일군의 조절 이론가들, 알렉스 캘리니코스, 에릭 올린 라이트, 지리학자인 마이클 웨버, 구성주의 국제정치 이론가인 A. 웬트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국내에서는, 바스카를 비롯한 비판적 실재론의 과학철학에 대한 소개는 간헐적이었지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차례┃


제1부 초월적 실재론

1장 왜 실재론인가? 왜 초월적인가?
더 강한 실재론과 더 약한 실재론?
현실주의의 부적절성
비실재론의 유혹
왜 철학인가?
초월적 논증
칸트와 바스카가 사용하는 ‘초월적 실재론’이라는 용어

2장 실험과 심층 실재론
실험은 어떻게 가능한가?
심층의 세 종류
과학의 작업
자연의 작업

3장 경험주의와 관념론의 불가능성
경험주의의 유산
인식적 오류
의지의 승리:근대 관념론
이데올로기로서 실증주의

4장 층화와 발현
발현적 층들의 환원 불가능성
층화된 세계에서의 삶에 관해
경향, 조건 그리고 결정론에 관한 문제들
계통의 전투


제2부 비판적 자연주의

5장 사회적 존재와 사회적 지식
사회에 관한 관계적 개념
변형적 사회 활동 모델
행위:원인으로서 이유
공시 발현적 힘의 물질론
사회적 지식

6장 설명과 해방
사회과학에서 설명적 비판
다른 종류의 설명적 비판들
비인식적 해방 모델, 인식적 윤리 모델?
철학과 사회주의

7장 개입
언어학:트레버 페이트만
정신분석학:데이비드 윌
경제학:토니 로슨
그 밖의 몇 가지 비판적 자연주의의 개입

8장 왜 비판적인가? 어떻게 자연주의자인가?
존재론적 구분
인식론적 덤불
인간 세계에 관한 과학적 연구는 어떠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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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실재론 , 과학철학 , 실증주의 , 바스카 , 협약주의 ,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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