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서막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강타한 이후, 각국은 동시에 금리를 낮추고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쓰며 시중에 돈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비상조치에도 불구하고 채 2년이 못돼 유럽에서 소버린 리스크가 발생하고, 시중에 너무 많이 풀린 돈 때문에 물가인상의 압박으로 유동성 흡수에 나서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경기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쉽사리 긴축정책으로 돌아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금리인상을 필두로 한 출구전략을 서두를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이제 남은 것은 '환율'이 되었다.
경제정책에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r policy)’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각국이 자국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려서 수출을 늘리려 했던 데서 유래했다. 국내 경제조치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각국은 이제 자국의 화폐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또는 변동환율제에서 환율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자국의 화폐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아도 다른 나라의 화폐가치가 오르면 같은 효과를 낸다.
여기, 엔화의 가치가 치솟기 시작한다. 연일 엔화 대 달러 환율을 갈아치우고 엔화의 고공행진이 지속되었다. 그러자 지난 15일 일본 정부는 하루에 2조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입하면서 6년여만에 외환시장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엔화는 일본 정부가 개입하면서 달러당 82엔에서 85엔까지 가치가 하락했다. 하지만 며칠 후, 21일 미국 연준 FOMC에서 달러 추가 공급 발표를 하자 엔화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환율을 놓고 일본 정부와 미국 정부간에 방어와 공격을 주고 받았고, 결과적으로 일본정부의 환율방어 노력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 미 행정부는 이런 일본 정부의 환율시장 개입조치를 맹비난하고 나섰지만,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엔화 환율이 다시 상승한다면 정부가 개입할 것”이라고 시사했다.
이제 불똥은 다시 중국으로 튀었다. 최근 수 년동안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던 미국과 위험한 줄타기를 해 온 중국에 대해 미국은 전쟁선포와 같은 조치를 취하고 나섰다.
최근 미국은 중국이 위안화 절상을 하지 않는다면 ‘환율조작국 지정’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또한, 미국 상무부는 중국을 겨냥해 개별 기업에 대한 반덤핑·보복관세 면제범위 제한과 반덤핑 관세 인상, 수입업자에 대한 현금예치 의무 확대 등이 담긴 외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개선하기 위한 14개 조치를 발표했다.
여기에, 미국 하원 세입위원회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정부가 중국을 비롯해 대외무역에서 부당이득을 취하기 위해 환율을 조작하는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한 ‘공정무역을 위한 환율 개혁 법안’을 승인해 하원 본회의로 넘겼다. 한마디로 저평가 된 위안화는 수출보조금과 같으므로 미 상무부가 중국산 제품에 대해 상계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다. 이 법안을 두고 레빈 세입위원장은 “중국의 지속적인 환율 조작은 미국 경제와 고용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무역기구 (WTO)의 규칙에 따르라고 주장했다. 이 법안은 29일 하원을 통과할 전망이다.
현재 상황에서 환율전쟁을 부추기는 또 다른 수단이 있다. 바로 금리다. 금리인상은 환율을 자극한다. 금리가 높아지면 외환이 자국내로 향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자국 통화의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즉, 금리인상은 해당국 통화의 절상효과가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또한 끊임없이 중국에게 금리인상을 촉구했다. 중국은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금리인상은 마다하고 통화량을 흡수하는 시늉만 내왔다. 물론 다른 나라의 금리를 인상하라고 인상을 써 온 미국은 금리를 올리지 않고 있다. 지난 2008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사실상 제로 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상황은 점점 갈등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에 참석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회담을 가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원자바오 총리에게 “이번 회담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위안화”라며 “위안화 환율 문제로 발생한 미국과의 긴장관계를 풀기 위해 중국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위안화 환율이 세계시장에서 25~40%정도 저평가 된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원자바오 총리는 미국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위안화 환율 때문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높은 임금과 소비패턴 등 구조적 문제 탓이라고 주장했다. 미 의회가 주장하는대로 위안화 가치를 20% 이상 절상할 경우 중국기업들은 줄도산할 것이라고 밝혀 물러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오랜만에 만난 미·중 정상간의 화법은 이처럼 살벌한 것이었다.
무역전쟁으로의 확대 가능성
이런 식의 근민궁핍화정책은 환율을 비정상적으로 만들어 놓는다. 대공황 당시에는 환율전쟁이 너무 심해 화폐로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지 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환율전쟁이 심각한 이유는 무역전쟁을 야기한다는데 있다.
중국은 미 하원 세입위의 법안 처리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26일, 중국 정부는 미국산 식용 닭고기에 9월 27일부터 5년 동안 반덤핑관세를 부과한다고 밝혔다. 중국은 2월 미국산 닭고기 제품에 대한 반덤핑 과세를 임시 결정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가산 세율을 인상해서 집행하기로 했다.
중국 상무부는 이번 조치에 대해 “미국의 브로일러(구이용 영계) 제품의 덤핑과 국내 산업의 손해 사이의 인과 관계”를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중국 닭고기 업계도 “우리는 미국의 닭고기의 수입을 10년 전부터 인정하고 있는데, 미국은 우리의 참여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이것은 무역 불균형이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미국의 압박에 대해 이 같이 분명한 메시지를 던진 것은 미국이 위안화 문제를 겨냥해 무역보복조치가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이 중국 정부를 WTO에 제소했다. 론 커크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미국의 철강 및 전자결제 업계가 중국 정부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조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런 미국의 WTO 제소는 중국 정부의 위안화 가치 저평가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소극적인 상황에서 중국의 대미국 수출 상품에 대한 보복 조치의 성격이 짙다는 분석이다.
한편,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중국 정부가 태양광 모듈과 풍력 터빈 등 재생에너지 수출 장비에 대한 불공정한 보조금과 최저이율 대출을 지원해 세계무역기구(WTO) 조약을 위반했다고 미국 철강노조가 주장했다. 또한, 미 철강 노조는 탄원서를 제출해 미 정부가 이 문제를 WTO에 제소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같은 무역분쟁은 올해 갑자기 발생한 것은 아니다. 작년 9월 미국은 중국산 경트럭 및 자가용 저가 타이어에 대한 특별세이프가드 조치를 발동하기도 했다. 2008년 경제위기 들어서 미국은 지속적으로 중국에 시장개방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환율·무역 분쟁의 양상은 ▲미,중,일의 인내가 상호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 ▲환율 분쟁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점차 무역 분쟁으로 확대될 조짐을 보인다는 점, ▲경기침체가 지속되는 속에서 각국이 금리인상과 긴축정책의 압박을 더욱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주요국 간의 분쟁이 국제적인 양상으로 확대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EU의 대 중국 압박도 가속되고 있고, 미국은 EU 국가들의 과세제도를 문제삼고 WTO에 제소하는 등 분쟁이 확대되고 있다.
G20 서울회의, 전쟁터 될 것
일본이나 중국 등의 환율이 올라가면 우리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향상된다는 식의 근시안적 인식으로는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미국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면 결과적으로 원달러 환율도 떨어질 수밖에 없고 원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올라간다. 더 큰 문제는 주요국의 환율분쟁이 확전 일로에 있고 보호무역주의가 확장될 상황이라는 점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확대된 G20 정상회의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 이다. 금융제재만으로 합의에 허덕이고 있는데 여기에 환율과 무역문제까지 들고 나올 경우 G20 서울정상회의는 경제의 전쟁터로 돌변할 가능성도 있다.
각국이 자국의 환율방어에 대한 정당성을 얼마만큼 유지할지, 금리인상을 비롯한 통화량 조절을 놓고 상호간 합의를 볼 수 있을지, 정부부채의 총량과 위기관리 방식을 어떻게 조절할지, 은행과 금융자본의 유효적절한 통제방식을 찾을 수 있을지, 무엇보다 긴축인지 적극적 경기부양인지...더 이상 팽창시킬 통화량도, 재정상황의 여력도 없는 가운데, 각국이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하는 장이 G20 정상회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G20을 앞두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은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환율이 널뛰기 하고 화폐를 가지고 무역이 불가능해지자 2차대전 후에 생겨난 것이 바로 브레튼우즈체제다. 10년간의 대공황을 거쳐 결국 5년여의 세계대전을 겪은 후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가 찾아낸 방식으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여 순금 1온스=35달러로 금태환을 유지하고 미국 달러에 각국 통화를 고정시킨 고정환율제도를 형성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과잉자본은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축소되었다. 자본주의 경기순환은 일탈의 일탈을 거듭한 끝에 2차대전 종료와 함께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이 질서는 이미 수 백만명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고, 수 천만명의 난민과 폐허를 남긴 후였다.
이렇게 전쟁의 서막은 그 때나 지금이나 환율로 시작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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