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1 : 오늘의 파업은 고전적 의미의 노동운동인가?
오늘날 유럽의 노동자계급은 장구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많은 역경을 딛고 집단지성을 축적한 사람들이다. 누가 지도하여 움직이는 투쟁이 아니다. 결핍과 억압, 낡은 가치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연스럽게 체화돼 있다. 이것이 비록 복잡한 현실에 대한 유토피아적 수사로 들릴지는 모르나 역사적 추세의 한 총괄임은 분명하다.
질문2 : 소련 붕괴 이후 코뮤니즘을 포함해 노동자 급진주의 운동의 종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나?
복지국가를 이룩함으로써 자신의 역사적 과제를 완수하였기에 노동자 급진주의 운동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암시하는 힘을 알고 있다. 투쟁의 목표구상들이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진부한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물론 레닌이 문제 해결의 공통분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더 이상 그러한 공통분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뮤니즘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까지도 유용한 논거들과 새롭게 타당성을 획득해가는 논거들을 연결하는 가운데 대중적 과제로서 그러나 언제나 ‘자본주의의 저편’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러한 과제로서 제기되어야 한다.
질문3 : 부단한 개인주의화 경향, 생활양식의 다원화 현상 및 고용구조의 변화로부터 사회변혁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통적인 노동조합적 기본 요구들이 기술적으로 전문화된 젊은 노동자들에게는 행위방식과 사회화의 차이로 인해 매우 낯설게 다가가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유지가 이미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다는 주장은 너무 많이 나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전통적인 노동조합 정책의 저편에서 전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 결정의 불투명성, 생산물 선택의 공동결정 가능성, 통제되지 않는 기술 변동에 따를 자격증에 대한 불안, 직업 경력의 부족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회관계의 이러한 개인주의화가 곧 ‘공동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치명적인 훼손과 이기적 쾌락주의의 확산 또는 자폐적 고립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단독자의 고독’을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조직되는 소규모 사회집단들은 앞선 산업사회에서와는 다른 형태와 모형으로 ‘공동생활의 복귀’를 위한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생업노동의 구성적 역할 또는 노동의 인격 형성 역할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는 얘기는 통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만, 한편 그것들은 사회 활동의 새로운 연결망을 형성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회변혁 활동의 주체적 수행 능력에 관하여 언급하려면 반드시 ‘제1세계’의 빈곤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시도해야만 할 것이다. 비록 19세기적 의미의 빈곤은 아니라 할지라도 새로운 빈곤층 - 일정한 서비스 인텔리, 실업자, 늙고 병든 연금생활자, 생활보호 대상자 등 - 에게는 ‘사회에 일반적으로 확대된’ 참여의 기회 및 풍부한 재화가 단지 남의 손에 놓인 떡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빈곤층의 존재는 현대화 비용이 사회의 약자 계층에게 전가됨을 의미한다. 19세기에도 산업혁명의 사회적, 인간적 비용을 상쇄하고자 그와 유사한 불평등이 첨예하게 조장되었으며 그로부터 노동운동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질문4 : 자본주의는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그 역사에서 자신의 존재적 한계를 돌파해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가치논리의 파국적 결과 외에도 해방을 지향하는 현대화의 잠재적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자본주의의 대항세력으로서 코뮤니즘은 합리적인 사고와 행위를 ‘결핍과 외적 강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활동 속에서 정립한다. 사회적 동의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경제 합리화의 속행은 정치적 행위 범주에서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질문5 : 뚜렷한 구심체를 형성하지 못하는 좌익의 무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먼저 공공업무 종사자와 전통적 노동귀족의 정당으로서 신시민적 향락주의에 빠져 있는 사민주의 정당들은 관찰 가능한 대안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프랑스, 영국, 독일의 사민주의자들이 노동자 이해관계 대신에 신중간 계층의 이해관계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및 오스트리아의 사민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신중간 계층의 안정적 동맹을 추구하고 있지만 앞의 나라들과 크게 다른 건 아니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노동자를 외면한 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입장으로 몰입해 있다.
이러한 일련의 추세는 고전적인 정당 구조와 정당 기능의 의미 상실을 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의사소통, 협력, 유연성의 장기적 효과에 달려 있는 의사 형성 과정을 위계적 구조의 형태로 영속화하려는 의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미 유럽 코뮤니스트는 인습적인 경직된 조직구조를 벗어나 변화 가능한 동맹지형에 당 조직의 기본구조를 일치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지난 시절을 성찰하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의 의사형성 과정은 정치적 통제체계의 질적 개선을 비롯한 과잉 기대들 중 일부의 완성을 예견케 한다.
질문6 : 코뮤니즘 활동가들에게도 개량적인 기획이 있는가?
코뮤니스트는 시민, 소비자, 이용자, 거주자 등의 입장에서 수행하는 개인적 자기노동을 사회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결코 지양될 수 없는 산 노동과 죽은 자본 간의 대립 외에도 ‘계급과 계층의 저편’에서 그것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대립들이 사회변화를 동반한다는 점도 알고 있다.
질문7 : 시장논리와 가치논리의 지배를 제거하기 위한 당면한 행동은?
일터뿐 아니라 생활세계의 전선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 연대가 중요하다. 연대는 유럽 코뮤니즘 역사에서 단지 화려한 어법의 도덕적 원칙이 결코 아니었다. 개인 고유의 이해관계를 인정하고 관철하기 위한 구체적 행위전제이자 행위인식이었다. 그러나 특권적 직업집단들이 자신들의 임금인상을 위해 성공적으로 투쟁하고 그에 따라 간접적으로 약자 집단들의 권리가 신장되거나 행위능력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연대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최선의 연대란 강자의 행위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동시에 약자의 입장도 대변하는 것이다.
현실성을 포괄하는 핵심을 갖춘 연대의 형태는 오래 전부터 ‘개인주의화의 역학’이라는 암초에 부딪쳐 난파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르고 있다”. 자아 선호, 개인 우선 및 부끄러움도 모르는 탈연대적 행위들은 ‘연대의 윤리’를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게 하며 노동자계급 내에서 구시대의 전통주의가 갖는 도덕적 빈곤을 심화시킨다. 인간관계 형태를 개선할 수 있는 연대는 개인의 많은 행위공간을 보장하려는 공동의 노력과 그에 대한 이해의 토대에서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상황은 현실분석적 판단을 넘는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불가피하게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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