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정치세력화의 출발점은 자본과의 투쟁에 있다

[진보논평] 지금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농성과 또 한 번의 파업

시간 급 3만원에서 6만원을 받으니 돈이 꽤 되더라는 비정규직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대학에서 하는 수업만 12시간이다. 같은 시간 서울대는 한 학기에 6시간을 가르치고 월급을 받는다. 정부의 국립대 성과연봉제 안이 나오기 전에 서울대는 이미 성과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단과대마다 차이는 있지만 1등과 꼴등 사이의 차이는 10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현재 서울대는 법인화 반대 투쟁 탓인지 몰라도 성과연봉제에 대해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다른 대학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교수들 간의 차등과 차별을 통해 경쟁을 유도하고 국내 국외 서열 경쟁으로 치닫는 것이 요즘 한국 사회 대학이다. 올해 들어 학생들이 4명이나 자살하면서 징벌적 등록금제를 통해 학생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았던 카이스트도 마찬가지다. 카이스트 학생이라고 등록금을 면제시켜 준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개혁 하겠다고 징벌형 등록금제를 도입해 살인적인 경쟁을 서남표식 개혁으로 바꿔치기한 카이스트도 문제다.

학생도 교수도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이제 전면적으로 저임금화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고 있다는 징후다. 상호경쟁은 가격 하락을 가져 오는 가격경쟁처럼 전 사회적으로 임금의 하락이라는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교수는 교원 외 교원이라는 듣보잡 직함을 얻으며 시간급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나라에서 다른 한 편에서는 최저임금 4,320원도 못 받는 노동자들의 숫자가 210만 명이나 된다. 돈 백도 손에 쥐지 못하는 비정규직 교수들 숫자를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거기에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이 되는 상황에서 최저임금으로는 돼지처럼 밥만 먹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사회보장이 거의 전무한 이 나라에서는 최저임금이든 생활임금이든 기본소득이든 이러한 소득과 임금으로는 말 그대로 하루 밥 세끼 정도나 해결하는 최저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아파트 값은 여전히 비싸고 사교육비 또한 많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자식을 둔 노동자들에게 경쟁이란 단어는 언감생심의 언어이자 듣보잡의 언어다. 노동자들에게 교수들의 무한 경쟁, 학생들의 경쟁은 차라리 사치에 가까운 말로 들린다. 장애인, 쪽방거주인 등을 생각하면 더 더욱 그러하다.

최근의 일은 아니지만 노동자민중들의 삶은 이미 저임금 구조로 내몰리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국가고용전략회의는 그것을 사후 추인하는 것뿐이다. 한 마디로 말해 ‘손에 돈 백도 쥐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거기다가 고용 불안정이 노동자민중으로 하여금 저임금 구조를 승인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자들 사이에 경쟁이 있다면 일자리 경쟁 정도나 있을까. 생존을 위한다는 측면에서는 모든 형태의 경쟁이 동일하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세상에서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정규직을 세습하려고 하는 현대차 정규직 지부가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작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파업 때 이미 알아봤던 것이지만 이것은 경쟁이라는 단어를 아예 뭉개버리고 차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태가 노동자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자신들이 속한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애써 외면하고 비정규직 교수 문제에는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정규직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의 계절이란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경쟁의 계절일 뿐이다. 최근 떠오르고 있는 민주대연합이나 진보대통합은 국회 의석수를 놓고 벌이는 권력경쟁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야당이든 진보정당이든 자본과 국가와 경쟁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본과 국가 안에 포섭되었으니 그들이 경쟁할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은 논리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무엇보다도 자본과 경쟁하고 투쟁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자들은 경쟁이나 투쟁보다는 테이블에 앉아 협상하거나 양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진보대통합이니 진보의 합창이니 하면서 진보세력과 경쟁하려고 하기 보다는 국가와 자본의 품 안으로 돌아간 진보세력의 품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며칠 전 프랑스 쁘와띠예에서는 버스 기사가 괴한의 칼을 찔리자 버스 기사들이 연대 파업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이와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버스 기사 주변으로 보호막을 설치했다. 연대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버스 기사의 보호막은 연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겠다는 사회의 무의식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현대차 세습 문제가 가장 극명한 예이긴 하지만, 그것 외에도 이러한 무의식은 현재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듯하다. 노동자 계급의 자기방어 대상은 자본과 국가일 뿐이다. 노동자 계급이 정치의 계절에 정치판을 찾는 것은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가 스스로 계급으로서의 노동자임을 포기했다는 사실의 반증일 뿐이다. 이집트에서는 정당이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요구하지만, 이 나라 정당들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농성을 해제하고 노동자들을 협상과 양보로 유도하는 달인들이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는 통합진보정당 건설을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요구하고 나서며 제 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앞으로 정치의 계절이 성큼 다가오면 이러한 일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의 계절이 아니라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자본의 계절에 살고 있다. 이집트 <인권을 위한 토지센터> 보고서를 보면 자본가는 경제성장율 8% 이하에는 노동자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제 2의 노동자정치세력화가 아니라 오히려 제 1의 노동자정치세력화다. 제 2의 노동자정치세력화는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투쟁을 회피하고 투쟁을 협상이나 타협으로 관리하며 진보대통합을 주장하고 그것을 노동자정치세력화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자, 자본과의 투쟁을 회피하고 국가를 통해 실리를 챙기고자 하는 이기주의의 발로이다. 지금은 민노당과 진보신당에게 말을 걸 시기가 아니라 저임금 불안정 노동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농성을 한 번 더, 파업을 한 번 더 투쟁으로 조직하며 자본과 경쟁하고 투쟁할 때다. 그것이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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