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6일 ‘매값 폭행’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최철원 전 M&M 대표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했다. 최씨는 이날 석방됐다. 그는 지난해 10월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SK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던 탱크로리 기사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 등으로 폭행한 뒤 매 값으로 2000만원을 건넨 혐의로 기소됐다.
시민사회 대부분은 이 사건과 그 판결에 대해 분노했으리라 믿는다. 만약 이 사건이 한쪽에서 값을 돈으로 지불했으니 정당한 거래였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 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 판결이 옳지 않다면 그것은 폭력 자체와 폭력을 둘러싼 관계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법률적으로 폭력 자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근대국가에서 사인 상호간의 폭력은 엄중히 금지되었으며, 개인의 사적 분쟁은 사법부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오로지 국가만이 신체에 대한 강제를 행사할 수 있다는 국가의 물리력(폭력)독점의 원칙이 확립되어 있다. 이런 기준에 의해서 최철원의 폭력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
두 번째는 폭력 관계의 문제로 폭력이 발생한 양자간의 관계에서 사회적 통념에 근거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폭행한 자식과 자식이 부도덕한 일을 했다고 그 자식을 때린 부모의 경우에 대해 사회적 통념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이 시각에서는 폭력 행위 자체보다는 폭력을 발생하게 한 분노의 정당성에 주목하게 된다. 1인 시위를 벌였던 노동자가 맞을 만한 사람인가? 또는 맞을만한 짓을 했는가? 라는 질문을 그리고 폭력을 행사한 최씨의 분노는 때려야만 할 것인가? 또는 최씨는 때릴만한 위치에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다. 이 모든 질문에 그렇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이 판결이 나자마자 최씨를 구속해야 한다는 인터넷의 반응이 뜨거웠다.
이 폭력사건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과 학생 인권 조례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응은 너무 다르다. 그전부터 서명운동이 진행되었지만 지난 2월 8일부터는 청소년들이 거리에서 직접 서명을 받기 시작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인권조례제정을 위한 서명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5월 11일인 최종 마감일까지 8만 2천 장이 넘는 서명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거리 서명을 시작하기 전 5천 5백 장의 서명으로 시작해 현재 5만장을 넘어 6만을 향해 가고 있을 뿐이다.
긴 시간동안 청소년들의 절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이런 것은 시민사회 특히 대다수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무관심속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머리 모양이나 옷, 표현의 자유 등 학생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맞지 않을 권리,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한다.
나는 시민사회가 학생인권조례제정 운동에 대해 무관심한 듯이 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핵심적인 이유가 사상의 자유와 같은 추상 수준이 아니라 폭력의 문제에 있다고 판단한다. 폭력의 위장적인 표현인 체벌이 없이 학교라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대다수의 교사와 학부모들은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이 모두에게 보장된 보편적 권리이기는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학생은 인간이라는 보편성보다는 학생이라는 특수성이 먼저 작동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학벌사회이고 대학입시의 성공은 모든 교육적 목적에 우선한다. 이를 잘 알고 있기에 대다수 교사와 학부모들은 맞아서라도 지금 공부해야 나중에 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식과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니 학벌사회에게 모든 핑계를 넘기면 되는가? 학벌사회를 깨뜨리지 못하는 한 학생들은 계속 맞아야 하는 사람들인가? 도대체 학생들은 맞아도 될 짓을 하고 있는가? 학생 체벌을 하는 이들은 학교현장에서는 교사이고 학교 밖에서는 부모들이다. 특히 학교 안에서 체벌은 학생에 대한 교사의 폭력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학생들에 대한 체벌이 유지되고 있으며, 사회적인 공분이 되지 않는다. 교육을 위해서는 교사의 체벌이 정당하다거나 심지어 교권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체벌을 옹호하는 심리적 태도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그것은 맞는 자가 맞을만한 자라는 것, 맞을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얼마나 큰 잘못을 했기에 학생은 매를 맞을만한 자가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학교를 들여다보자. 대부분 체벌은 교실 수업 장면에서 이루어진다. 이미 짐작하고 있듯이 숙제를 포함해서 교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교사의 수업진행에 지체를 가져오는 학생들이 매를 맞는 학생들이다. 아마 그 학생들 중 일부는 어떤 경험적 이유로든 지금 수업 진행을 하는 교사에게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아마 그 학생들 중 일부는 이 수업뿐만 아니라 대부분 수업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아마 그 학생들 중 일부는 학교 수업 자체에 관심이 없을 수 있다. 또 그 외의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어떤 경우든 이 학생들은 맞을만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학생에 대한 교사의 폭력을 승인하고 있다. 아니 때리라고 부추기고 있다. 교사의 권력은 학벌사회에 입시의 도구가 되는 지식으로부터 온다. 교과서나 문제집의 지식 몇 개를 소리 높여 떠들고, 중요하다고 밑줄 긋게 하고, 그것으로 청소년들의 머리를 채우고, 생각을 얽어매고, 그리고 시험 쳐서 줄 세우고, 열등한 인간으로 밀어 넣는 학벌사회가 체벌을 유지하는 권력의 근원이다. 교사가 때려서라도 가르치려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 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은 체벌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누가 맞고 있는가이다. 학교의 모든 학생들이 맞고 있지 않다. 그런 야만적인 학교는 없다. 누군가는 항상 매를 맞고 있는 학교에서 누군가는 칭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맞는 학생은 칭찬을 받는 학생들을 위해서 맞는 것이다. 수업을 방해한다고 하지만 그 수업이 누구를 위한 누구의 수업인가를 확인해 보면 사태는 분명해진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체벌을 통해 제압하여 성공할 학생을 지켜주는 일이다. 스스로도 체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맞지 않는 학생들이다.
노동자의 의사표현을 돈을 던져주고 폭력을 휘둘러 막는 상황이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폭력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폭력을 통해 차별사회를 유지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학생이나 청소년이기 이전에 보편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열흘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그 시간은 폭력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학벌사회를 부정하는 길에 한 걸음 다가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도 청소년들은 우리가 다니는 길 어디에선가 호소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에 대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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