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대통합 합의문 결정 ‘유보’, 왜?
첫 번째는 한국사회에서 급진적인 진보좌파정치세력이 재등장한 이후 그 목표가 무엇이었나에 대한 오랜 역사적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진보대통합’의 핵심적인 준거에 대한 물음이다. 이에 대한 답은 분명한데, 그것은 이념, 조직의 수준에서 자유주의정치세력으로부터의 독자성 확보라는 오랜 과제의 확인이기에 그렇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이들은 이미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 제도 안으로 진입함으로써 그 목표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정 그런가. 지금 이 문제의 핵심은 자유주의정치세력 내부의 ‘비판적 자유주의정치세력’–이른바 ‘개혁자유주의 세력’, ‘자유주의 좌파’라고도 불린다–과의 분리 문제가 아니다. 바로 그들 헤게모니의 유지에 핵심 매개 고리로 기능해 왔던, ‘비판적 지지’에 근거한 ‘민주연합론’을 주장했던, 그리고 지금도 대동소이한 주장을 하고 있는 진보 내부의 정치세력들과의 관계 정립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문제는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아니라 그들과 단절하지 못하는 진보내부의 세력들이다.
처음 ‘PD’의 일부가 추동하였으나 ‘정파연합당’이라는 비판을 받다 결국 ‘NL’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지금의 민주노동당, 그리고 애초 민주노동당 건설의 ‘주역’이었으나 탈당파가 되어 3년 이상 ‘허송세월’을 보낸 후 설상가상 지금은 ‘개혁자유주의적 성향의 당원들’-이른바 ‘촛불당원’-에 둘러싸여 그 존재 유무가 불투명해진 진보신당의 모습 등은 그러한 과제가 이미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현재 진행형인지 판단하는데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이와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이른바 ‘대통합이냐? 아니냐?’의 갈림길을 규정한 사안이 북한의 세습, 핵, 인권 등의 문제였다는 점이다. 다 알고 있듯이 이 사안들이 핵심 준거가 된 이유는 분단체제와 민족주의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사안이 진보대통합 논의의 성공과 실패의 준거가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다른 한편으로 서글픔을 감출 수 없는데, 아무리 ‘진보’에 대해 상이한 인식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진보대통합’인데, 어떻게 민족주의에 근거한 쟁점들이 통합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사안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자괴감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사안을 존재 이유로 삼고 있는 ‘급진민족주의세력’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그러한 대립축이 핵심적인 것으로 계속 재생산되는데 일조한 ‘반대세력들’의 행태 또한 성찰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 환경 및 생태, 여성, 평화, 이주자 등의 문제에서 ‘일정한 합의’를 보았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진보의 이름표를 단 한편의 보수적 희극’에 가깝다. 어떤 이들은 위에 열거한 사안들에 관해서는 큰 이견 없이 합의된 것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과연 그것이 어떤 선에서의 합의인지 알 길이 없다. 정작 논의에 들어가면 북한의 세습, 핵, 인권 등의 사안보다 오히려 더 복잡다단한 문제들일 터인데 말이다.
▲ 지난 6월 1일 새벽,‘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연석회의(연석회의)’가 대표자회의를 열어 사회당을 제외한 나머지 참가단체들이 최종합의문에 서명했다. [출처: 자료사진] |
마지막으로 진보좌파의 정치 및 연대와 관련된 것이다. 진보좌파정치는 국가와 자본의 안팎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다양한 내용과 형식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제도정치만을 정치라고 주장하는 세력, 혹은 그 반대를 주장하는 세력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항상 자신의 외부에 또 다른 진보좌파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진보좌파라면 정당을 만들고자 할 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여타 진보좌파세력들을 정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 논의구조 참여 여부와 무관하게 말이다.
그 ‘외부’에는 사회주의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시도하는 세력(사노위), 혹은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정치세력, 녹색정치세력 등 아직 정당의 틀을 지니지 못하였거나 정당의 틀 자체를 비판하는 세력, 나아가 그것을 부정하는 세력들조차 포함된다. 물론 이들과 당을 함께 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또 꼭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사노위만 하더라도 당의 성격과 위상 등의 차원에서 볼 때, 연석회의에 참여하는 세력들이 구상하는 당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좌파라면 집권을 목표로 하는 당을 함께 하지 않더라도 현안문제를 풀어나갈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지닌 관계들을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하기에 제도 안에 정당을 만들던, 다른 형태의 조직을 만들던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는 여타 좌파세력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과 명분을 만들어 놓는 것은 필수적이다. 최소한 이렇게 될 때만이 진보좌파 안에서 의미 있는 일상적 연대와 ‘비판적 지지’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석회의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의미 있는 고민이 없었다. 연석회의는 자유주의정치세력들과의 함께 할 여지는 남겨두면서도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진보좌파세력들에게는 한 치의 정치적 고려도 남겨 놓지 않고 있다. 단지 ‘대통합논의에 동참하라’는 것 이외에 말이다.
신자유주의정치세력과의 ‘거리두기’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진보대통합’ 논의가 시대적 징표를 담는 역사적 의미를 담보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그것의 가시적 표현인 신자유주의정치세력들과의 ‘거리두기’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진부하게 들릴지 모를, 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재차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 사회의 모든 사회관계들, 아니 이 지구상의 모든 관계들을 이윤과 시장의 논리에 의해 재편, 복속시키고자 하는 자본의 시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 더하여 신자유주의가 자신만이 현존하는 유일한 삶의 조직양식이며 모든 것의 존재 이유를 확인해 주는 유일한 규범적 준거라 강변하기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는 현존하는 또 다른 양식의 삶의 관계들, 그리고 그런 미래를 꿈꾸는 것을 원천적으로 부정, 봉쇄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에게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 되어 살거나 아니면 침묵하거나 죽거나’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김진숙의 85호 크레인투쟁, 거기에 연대하는 ‘희망버스’는 이에 대한 저항, 투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자유주의가 그 어떤 경제정책으로 축소 내지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투쟁이 진보좌파정치의 가장 핵심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넘지 않고 우회해서는 그 어떤 ‘자유/평등의 사회관계’를 단 한치도 진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반대로 이러한 현실은 자유주의정치세력들이 신자유주의를 특정한 경제(통상)정책, 혹은 비정규직, 구조조정을 당한 노동자와 같은 ‘특정 집단’의 문제로 집요하게 환원, 동일화하고자 하는 이유를 간취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가 정치의 핵심거처라는 점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과거 집권 시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한 착취, 수탈, 배제, 억압의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핵심세력이었으며, 지금도 그것과 단절하지 못하는 자신들이야말로 ‘보잘 것 없는 민주주의자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그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을 기껏해야 ‘정치의 외부’-그들에게 정치는 오로지 ‘제도정치’일 뿐이다-에서 발생하는 ‘집단적 갈등의 표현’ 혹은 ‘생존권을 위한 저항’ 정도로 폄훼하는 것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현재의 정황은 어떤가. 연석회의에서 이른바 ‘진보대통합’을 논의하는 세력들은 신자유주의노선에 대한 반성을 단지 한미FTA 체결에 대한 반성 정도로 보고 그 진정성이 확인되면 대통합 논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해 왔다. 여기에 더하여 신자유주의좌파 정치인 가운데 하나인 국참당 대표 유시민에게 그 반성의 징표로 ‘대선불출마 선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신자유주의를 단지 (통상)정책으로 보는, 혹은 신자유주의관계 속에서 특정 정치인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특정인을 통해 신자유주의 관계들의 변화 여부를 조망하고자 하는 ‘전도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국참당과 유시민이 그 조건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당황해하고 있다. ‘진정한 반성’이 아니니, 뭐니 궁색한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면서 말이다.
이러한 모습은 자유주의정치세력에 대한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의 행보를 규정하는 합의 속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 이른바 ‘연석회의 합의문’에 나타난 ‘진보대선후보 완주의 원칙’이 그것이다. 이것은 진보신당 경기도지사후보였던 심상정이 지난 해 6.2지방선거에서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국참당 후보 유시민을 지지하며 후보사퇴를 해버린 것과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보후보 완주문제’는 미리 못을 박을 것이 아니라, 선거연대의 가능성 속에서 고민되어야 하는 것으로 거기에서의 핵심문제는 그것이 ‘특정엘리트’에 의해 자의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앞에서 공식적인 과정을 거처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심상정사태’의 교훈인데, 완주를 ‘원칙’으로 못을 박아 버려 스스로 유연한 대응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행태는 연석회의가 말로만 신자유주의에 반대, 투쟁할 것을 합의했을 뿐, 그 정치세력과의 단절을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문제와 씨름하여 그것을 풀기보다 이른바 ‘통합당’을 만든다는 명분하에 자꾸 그것을 우회하다보니 그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합의문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결국 그 분란의 와중에서 대중적 신뢰를 잃는 것은 자유주의정치세력이 아니라 진보정치세력 자신이 되는 자기모순적인 상황을 계속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교연, 제도 안팎 진보좌파정치세력을 매개하는 조직으로 남아야
그렇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 최대 책임은 정파적 이해에 사로잡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세력이 아니라 바로 진보교연에 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연석회의 안에서 전체 진보좌파의 전망과 관련, 이런 문제들을 고민, 촉구할 수 있는 세력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진보교연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보교연은 단순히 연석회의에 참여하는 하나의 주체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고, 그렇기에 찬성, 비판 여부와 무관하게 모두 그 행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진보교연이 신자유주의정당인 국참당이 ‘진보대통합’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점, 그런 입장을 계속 견지하는 세력들과는 결별할 것임을 밝힌 점, 그리고 개혁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관계는 선거연대 속에서 고민되어야 한다는 것을 결정하여 그 마지노선을 제시한 것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의미 있는 행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냉정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이미 ‘진보대통합’ 논의가 ‘소통합’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달 후 진보신당의 이른바 ‘독자파’가 합류하고 민주노동당의 분당이후 무당적의 상태에 있는 구민노당원들이 다시 그 ‘통합당’에 복귀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들을 제외하면 진보좌파 가운데 이 ‘통합당’에 새로이 참가할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진보교연이 자신의 대의였던 ‘진보대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연석회의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심각히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왜냐하면 진보교연은 제도 안팎에서 진보좌파정치세력들을 매개하는 조직으로 남아 내년 양대 선거과정은 물론 선거이후의 정치를 이론, 실천의 수준해서 고민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보교연이 그 출범에 즈음하여 대중적으로 약속했던 것, 즉 “특정 정파가 아니라 진보정치세력 전체의 튼튼한 후원군의 역할을 다하겠다”고 선언한 것에도 부합하는 행보이다. 나아가 연석회의에 개입하고 있는 진보교연 회원들이 특정 정파가 아닌, 전체 진보좌파의 성장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귀중한 자산들이기에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