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저항과 낯설지 않은 결말(?)
희망버스는 부산을 배경으로 한 장대한 서사이자 동시에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이다. 이는 지배세력의 탄압과 착취로 인한 죽음과 굶주림의 위협에 허덕이며 생존을 향한 가혹한 투쟁이다. 지금 한진중공업 뿐만 아니라 재능교육, 유성기업, 콜트콜텍, 발레오 공조 등 장투사업장들은 엄청난 기아와 절망과 죽음이 그들의 주위를 넘쳐흐르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힘겹게 벌여나가고 있다. 이제 희망버스는 희망 자전거, 희망 걷기, 희망 비행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되어 노동자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렇게 희망버스가 회를 거듭할수록 진화하는 것은 자발적인 대중의 현명함과 지혜로움 때문이다. 대중의 자발성과 창의성이 한층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물론 동지, 조직, 인민에 대한 애정과 평등의식으로 가득한 김진숙 동지의 헌신성과 진정성은 대중들의 자발성 발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제 희망버스의 진화와 함께 사회운동도 새로운 모델이 창출되면서 더욱 진화하고 있다.
▲ 3차 희망버스 |
대중이 자발적으로 희망버스에 참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살아생전에 전혀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강남땅에 수해 피해가 발생할 정도로 한국사회가 고위험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노동이 삶의 밑천인 대중들이 과거에는 노동문제를 생활영역의 밖에 존재하고 있어서 자신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생존의 문제이고 생활의 문제이고 내 자신과 내 가족 그리고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가져온 결과이다. 그동안 대중의 관심밖에 있었던 노동문제가 생존의 문제로 이동한 것인데, 이제서야 노동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김진숙 동지의 마른 어깨에 얹혀있던 버거운 짐도 나눠지게 되었다.
이제 한진중공업 사태는 한진중공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다. 대중의 자발적 저항이 정치적 출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야5당이 8월 3일 한진중공업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정책협의회를 운영키로 했으며, 8월 18일에 청문회를 열기로 여야가 합의하면서 조남호 회장의 증인 출석과 김진숙 동지의 참고인 출석을 채택하였다. 또한 진보신당의 노회찬 심상정 두 고문과 학계에서의 릴레이 농성이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 학자들을 중심으로 해법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됐으며, 각종 언론매체에서도 심층적인 보도와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필자의 단견으로는 이 모든 행위와 과정들이 문제 해결에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현재의 분위기와 정세가 희망적인 것은 맞지만 현실은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절망밖에 남지 않은 대중들이 희망버스를 통해 절망을 걷어차고 희망을 안고 왔지만 여전히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 희망버스가 거듭될수록 새로운 희망이 샘솟았고 당연히 그 기운을 몰아가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결말이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쌍용자동차와 기륭전자의 기억이 뚜렷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집요한 보수세력들의 천박한 인식
이미 정부여당과 한진 자본은 조남호의 기자회견과 청문회를 둘러싼 야당과의 합의과정에서 자신들의 본질을 드러냈다. 그들은 오로지 이윤추구의 무한욕망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노동자들은 태생적으로 관심 밖에 있는 잉여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보다 지배권력과 보수세력들의 인식과 관점은 본질적이다. 그래서 이들의 본질을 적확하게 꿰뚫는 것이 향후 사태의 본질과 문제 해결의 모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세력들이 시민사회와 진보진영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지난 7월 6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던 날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외국 언론에서 한국의 동계올림픽 유치의 집착에 대해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집착에 비교하면 한국 자본가들의 이윤추구를 위한 노동자 탄압의 집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의 형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 형제가 재산상속문제로 갈라선지 8년만인 금년 봄부터 화해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8년 동안 4건이나 되는 법정소송을 이어 가며 ‘루비콘강’을 건너는 듯 했지만 올 3월 8년간의 긴 소송을 모두 정리한 것이다. 그 동안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한진중공업이 이명박 정부의 비호와 총자본의 지원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조양호와의 화해가 현실화되면서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섣부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조남호 회장의 장기 외유에 대하여 정부여당과 청와대에서도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줬지만 그 배후에 경총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이와 관련하여 전경련과 경총은 재벌 회장들의 청문회 출석에 대하여 자신들을 범죄시한다고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국회와 시민사회를 농락했던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바로 한국의 독점자본이 얼마나 악의적이고 반동적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29일에는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제주 롯데호텔에서 개최한 하계포럼에서 “변화와 개혁을 못한 쪽을 좌파나 진보가 전복시키고 새로운 체제를 만든다”고 말했다. 진보진영과 좌파를 체제 전복 세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8월 12일에는 한상대 신임 검찰총장이 취임사에서 ‘종북좌익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이날 “아직도 북한에 대한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는 국가적 불행”이라며 “종북좌익세력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를 종북좌익세력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들의 발언은 단순히 어느 한 개인의 주관적 의견이나 관점이 아니라 보수세력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라는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작금의 이명박 정권의 행태와 내년도 총선과 대선을 고려하면 국가보안법이나 안보이데올로기를 내세워 공안정국을 강화하여 탄압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 예상된다.
이 뿐만 아니라 지난 2010년 1월 18일에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첫 회의에서 보수진영의 대표적인 논객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발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 국민은 두 부류로 나눠지는데, 헌법을 최고가치로 인정하고 법을 준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며, “후자는 사회통합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는 보통 이들을 래디컬스(Radicals)라 지칭하고, 교육과 법치의 대상으로 생각한다”며 “후자에 속하는 우리 국민 수는 20~25%”라고 주장했다. 즉 그의 주장은 최소한 국민의 5분의 1을 사회통합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말을 정리하면 한국사회에서 최소한 1000만 여명 정도는 급진적이기 때문에 종북 좌익 전복 세력이며 배제와 탄압의 대상인 것이다. 참으로 무섭고 섬뜩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들과 사상의 자유를 논하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 및 결사의 자유를 논할 가치가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보수세력들의 인식은 희망버스 참가자들에게도 딱지를 붙임으로써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3차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갔다 온 대중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보수세력들의 표적이 되어 ‘빨갱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땅에서 대중이 진보가 되는 길은, 아니 ‘좌빨’이 되는 길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희망버스 타기, 반값 등록금 집회 참석하기, 유성기업 지지 방문하기 등 주변에 널려 있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현재 보수세력들이 서울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희망버스의 사례에서 보듯이 내부 역량을 제고하고 일치단결을 위해 저변확대를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수세력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대중을 공격하는데, 안보이데올로기와 절묘하게 결합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집단폭력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이 공동체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받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보수세력을 위한 전위대 역할을 자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보수세력들이 집단폭력화하고 전위대를 자처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총단결을 통한 정권유지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 지난 60여 년 동안 반공만 외치다가 이데올로기를 개발하지도 못하면서 50년 체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벌을 비호하는 정치권력과 형제간의 우애가 확인되는 순간 그 동맹은 더욱 공고해지고 더욱 폭력화되는 것이다.
진보도 명품으로 거듭나자
그래서 진보세력이 이들과 맞서 싸우려면 명품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명품 진보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 진보의 정체성과 초심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확장과 심화를 통해 재구성하자는 것을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 진보세력에게 요구되는 것은 간결하다. 진보적 의제나 가치에 대해서는 즉시 실천해야 한다. 문제가 있으면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같이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공자, 마르크스, 사르트르 등 이념은 다르지만 인식과 실천의 통일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진리이다.
또한 진보세력은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 물론 현실의 역동적인 변화에 맞춰갈 필요는 있지만 특별한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한 수미일관해야 한다. 진보에게 명분과 원칙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고립을 자초하면서까지 고수할 필요는 없다. 명분과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연해 져야 할 것이다. 이번 한진중공업을 둘러싼 일부 논쟁을 보면, 정리해고가 불가피하고 진보적 해법이 비현실적이라고 일갈하면서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해법을 제시하는 자들이 진보를 운운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는 진보세력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에 속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번에 이들의 허무맹랑한 소리가 보수세력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주었는가. 그러다 강퇴당한다 조심하라.
진보세력은 자기만의 색깔을 갖고 목표를 정해서 끊임없이 공략해야 한다. 목표를 이룬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그 방법을 익히고 배워야 하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을 기획해야 한다. 나아가 목표를 추진할 수 있는 내용과 의제의 확보, 아이템을 개발해야 한다. 진보세력은 같은 길을 가다보면 같은 꿈을 꾸게 되고, 같은 꿈을 꾸면 꿈을 이룰 수 있다.
최근 일부 진보세력이 타인을 의식하거나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가 남과 다름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진보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대중의 의식이 나날이 높아지면서 점점 진보적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진보세력이 굳이 대중의 수준에 머무를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진보세력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도 한두 단계 앞서가는 급진세력이 되어야 한다. 이는 의지의 문제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학습하고 조직하고 투쟁함으로써 가능하다.
이 외에도 수 없이 많지만 이 정도만 해도 명품 진보로 충분히 거듭날 수 있다. 사실 명품 진보는 별거 아니다. 역사적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신나고 재미있게 열심히 운동하면 된다. 이렇게 진보세력이 명품으로 거듭난다면 간악하고 뻔뻔한 자본들의 화폐권력에 갇혀있는 한국사회가 재생될 수 있을 것이다.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에는 “상상해보세요.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게 사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소유가 없는 세상을”이라는 노래 말이 있다. 승리의 그날은 그리 멀지 않다. 4차 희망버스가 27일 서울에서 달릴 예정이다. 다시 한 번 달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