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솔로지스틱스 부당해고자 정택교 조합원 [출처: 철폐연대] |
정택교 조합원은 1986년 삼성물산 패션부문에 입사해 일하다가, 외환위기 이후 패션 물류부문을 인수·합병한 제일모직 소속이 되어 일했다. 2005년 제일모직의 물류부문 외주화로 한솔CSN(2014년 5월 한솔로지스틱스로 사명 변경)으로 다시 전적해 일하다가, 2012년 초 희망퇴직 강요를 거부한 뒤 6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대기발령 상태에 있다가 해고되었다. 2013년 7월 16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 판정을 받았고, 사측이 제기한 행정법원 소송의 결과가 오는 9월 나올 예정이다. 해고 이후 복직투쟁을 지속하고 있는 정택교 조합원을 7월 4일,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제일모직에서 한솔CSN으로 외주화되는 과정은 어떠했는가?
2005년 2월경에 한솔로 아웃소싱한다는 발표가 났다. 제일모직과 한솔이 구두로 고용승계 약속을 했기 때문에, 처음에 30명 정도는 아무 조건 없이 한솔로 왔다. 당시에 나는 관리직으로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거부 안 하고 왔고. 회사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그때 한 80명 정도의 직원이 스트라이크를 했다. 우리가 왜 아웃소싱 업체를 가냐? 분명히 여기 직원 데리고 가서 일정 기간 써먹고 강제로 해고시킨다거나 타사업장으로 보낼 것이다, 하는 불안함이 있었던 거다. 싸우던 동료들은 한 3개월 후에 30명 정도가 전적을 했다. 집회하고 싸우고 하니까 사측이 협상안을 내서 합의하고 2차로 왔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참... 지금 와서 봤을 때는, 우리가 같이 뭉쳐서 스트라이크를 했었어야 맞다. 그랬으면 우리가 한솔로 오지도 않았을 거고, 현재 제일모직 그대로 있었을 건데. 어떻게 보면 그게 큰 실수다. 다 그런다, 초창기에 왔던 사람들이 다 똑같이 얘기했다. 와서 보니까 고용보장, 고용승계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고, 차별대우를 했다.
한솔CSN에서 일할 때의 경험은 어떠했는가?
한솔 직원이 영업직까지 300명 정도 된다. 제일모직에서 60명 정도 넘어왔으니까 전체의 20% 정도였고, 초창기에 모두 의류물류를 담당하는 쪽으로 집중 배치됐다. 제일모직에서 온 직원들이 의류물류 부서에서는 많으니까 위화감 같은 건 없었는데, 기본적으로 중요한 업무는 맡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자기네들이 하고 비중이 낮은 업무들을 우리에게 줬다. 중요한 거 맡겨놨다가는 자를 수도 없고 자기네들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으니까. 의류물류 노하우가 어느 정도 전수된 뒤에는 인원을 빼서 제지물류 쪽으로 보내기도 했다. 거기 가서 적응 못 하면 그만 두고 가라는 거였다, 인원을 감축하려고.
인사고과나 승진에서도 차별이 심했다. 보통 근속이 일정 정도 되면 현재 직급에서 다음 직급으로 갈 때는 호봉이 올라가고 그때부터 승진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되는데, 얘네들은 만약 내가 올해 누락이 되면 그걸로 감점을 해서 그 다음에는 아예 응시 자격이 안 되게 만들어버렸다. 승진 시험은 업무 관련 주제 발표와 상‧하반기에 받은 업무 인사고과 점수 그리고 부서장의 임의고과로 매겨지는데, 일단 고과 잘 받아야 되고 부서장이 승진 시켜줘야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되는 거였다. 우리는 오래 일을 했으니까 주제발표는 잘 하는데, 부서장은 다 원래 한솔에 있던 사람들이고. 나머지에서 최하위 고과를 줘버리면 그만인 거다. 참고로 한솔의 정규직원들이 금천 물류센터에 왔을 때, 7년 동안 보니까 사원으로 온 사람들이 차장까지 올라갔다. 우리는 그대로 정체시켜놓고. 물론 한두 사람 시범케이스로 승진시켜주는 사람은 있었다. 그러면서 얘네들 주장은, 있지 않냐? 그런 거였다.
나 같은 경우는 삼성물산, 제일모직에 근무할 때는 B이하를 받은 적이 없다. 대부분 A고과를 받았고, 심지어 S고과, A고과자가 10명이라고 하면 몇 개 부서를 묶어서 한두 사람 주는 S고과를 여러 번 받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한솔에서는 계속 C고과였고, B고과는 한 번 받았다, 7년 동안. 한솔에서는 아예 제일모직 출신은 배제하는 게 정책이었다.
희망퇴직 거부와 대기발령 이후 해고 통보까지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가?
2011년부터 항상 보면 3,4월에 조정을 한다. 그때 제일모직 출신 나 포함해서 3명에 대해서 희망퇴직하고 용역회사로 가라는 제안이 있었다. 그때는 셋 다 거부했다. 그러니까 2012년에 또 같은 제안을 했다. 그래서 선배 한 명은 5월에 희망퇴직하고 한솔이 관리하는 용역회사로 갔는데, 한 달 간 근무하다가 그만 뒀다. 이 사람이 근속이 있는데 현장작업자로 보내버리니까, 젊은 사람들 지시 받고 일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월급도 적고 그러니까 그만 두고 나간 거다. 원래 한솔에 그대로 있었다면 그들을 관리하는 쪽인데, 거기 가서 지시 받고 일을 하라는 거니까 그렇게 일할 수도 없고.
나
랑 다른 한 선배는 제안을 거절하니까, 6월 1일자로 대기발령을 냈다. 말이 대기발령이지 고역을 주는 거다. 모멸감을 주면서 알아서 희망퇴직하고 용역회사 가라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었던 건데, 7개월을 계속 버티니까 해고 통지를 했다. 2012년 말일 날 종무식 한 시간 남겨두고 밥 먹으러 가자고 해서 갔더니 그 자리에서 우리 둘에게 해고통지서를 내밀었다. 2012년 12월 31일자로 해고통지 적어 놓고 그 밑에다가, 항상 협상의 문은 열려있다 이렇게 써놨었다. 희망퇴직 하라는 얘기다, 위로금 좀 받고 용역회사로 가라는 얘기였다.
선배는 열흘쯤 지나서 합의를 했다. 상의하면서 같이 싸우자, 이건 부당해고다, 얘기했었는데 주위에서 여러 가지 얘기가 나왔을 거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는 식으로. 그런 주변 반응에 위축되어서 그만 둔 것 같다. 스트레스도 받고 하니까 위로금 받고 정리한 거다. 그 선배도 회사에서 소개한 용역업체로 갔다가 한 달 정도 후에 그만 두고 나갔다, 조건이 안 맞아서. 지금은 두 분 다 다른 데 가서 일하고 있는데, 둘 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후회하고 있다. 나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로 구제신청을 했다.
▲ 2014.7.1. 제일모직 본사 앞 규탄집회 [출처: 철폐연대] |
복직투쟁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투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사실 처음에는, 삼성물산 입사부터 제일모직으로 해서 한솔로 오는 것까지도 회사의 방침에 수긍하고 충성하면서 온 것이기 때문에 부당해고 당했을 때 엄청나게 분하고 억울했다. 그 분을 참고 돈 몇 푼 받고 나가는 건 도저히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에 그 사람들 요구사항을 따라준다면 또 제2, 제3의 정택교가 나오는 거다. 왜냐하면 우리가 60명이나 넘어왔는데, 그 전에도 선배들 너덧 명이 그런 식으로 나갔다. 위로금 좀 받고. 나중에, 우리 세 명 먼저 정리하고 나머지를 정리하려고 그랬다, 그런 뒷얘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다 처음에 넘어온 사람들이었고 어떻게 보면 일 잘하고 성실한 사람들을 먼저 다 정리하고 나면 나머지들도 순순히 정리하기가 쉬울 테니까.
2005년 한솔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어떻게 보면 나는 ‘공신’이다. 사무실 관리직 중에서는 나 혼자 넘어왔다, 행정관리 했던 사람 중에서는. 처음에 넘어온 30명 중에 사무실 관리직은 나 하나였다. 그래서 더 억울한 거다. 남보다 더 충성했고, 동료들 후배들한테는 욕 얻어먹고. 사무실 직원들이 30명 있었는데 다 스트라이크 했다. 선배님 그럴 수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때 내가 배송 업무 맡고 있어서 난이도가 컸다. 물류에 차량이 없으면 안 되니까. 현장 작업자들이 작업하면 차량이 전국에 다 배송을 해야 하는데, 내가 기사들이랑 업체들을 관리했다. 기사들이랑 업체들이 나한테 와서 얘기를 했다, 내가 가는 대로 따라 움직이겠다. 나는 혼자서 움직인 게 아니라 이 사람들 100명 정도를 데리고 간 거다. 군대로 말하면 전차부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열 받는 거다. 내가 그렇게 넘어와서 뭘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건드리지는 말아야지. 어떻게 보면 공신인데 나를 해고까지 시키냐? 그건 아니다.
그래서 첫째는 내 자신의 억울함이 컸고, 두 번째는 여기서 끊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다. 내가 투쟁해서 전적한 동료들에 대한 차별을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몰라서 노무사를 소개 받아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노무사 선임해서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했고, 중앙노동위원회에서는 2013년 7월 16일에 부당해고 판정이 났다.
구제신청하고 나서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해서 3월부터 을지로3가 한솔 본사 앞에서 일인시위를 시작했다. 화원에 가서 장례식 화환에 다는 근조리본에다가 쓰고 싶은 문구를 새겨서 목에 걸고 서있었다. 국회의사당 앞에 가서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갔다가 공무원노조 반명자 전부위원장을 우연히 만나게 됐고, 그때 그분한테서 피켓 문구라든가 투쟁이나 회사에 대한 대응에 대해서도 조언을 듣고 했다. 그러다가 중노위에서 이겼는데도 사측은 행정소송을 내고, 반 전부위원장이 성과 없이 혼자서만 계속 싸우는 건 아닌 것 같다면서 김성환 위원장을 소개해줘서 삼성일반노조에 가입했다. 김성환 위원장이 알려줘서 2014년 1월부터 공동투쟁단에도 함께하게 됐다.
투쟁하면서 이전에 하지 않았던 혹은 몰랐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 같다. 어떠한가?
전에 농담으로 그런 얘기를 많이 했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단결, 단합이 잘 되는 세 집단이 해병대전우회, 고려대동문회, 호남향우회라고. 하나 추가한다면 해고자투쟁 동지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싸우고 있는 동지들에 대한 배려라든가 진짜 어느 조직에서도 볼 수 없는, 니 꺼 내 꺼 없이 함께 싸우는 모습에서 감명을 많이 받았다.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어느 사업장을 가든 내 것 같이 하는 그런 것들. 조직생활 많이 해봤지만, 다녀보면 정말 끈끈한 동료애가 상당히 강한 것 같다.
또 한 가지 느끼는 건... 보통 생각하는 나는 괜찮다, 하는 게 천만의 말씀이라는 거다. 나라고 괜찮은 건 없다. 나도 내가 한솔에 와서 해고를 당할 줄은 진짜 상상도 못했다. 아까 얘기했듯이, 정말 삼성물산 제일모직에서 나름대로 평가도 받았고, 한솔에 올 때도 스카웃되어서 선발대로 왔고, 그 많은 기사들 차량들 데리고 사무실 관리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공신처럼 왔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를 해고했다. 당시 현장은 작업자들이 다 안 왔기 때문에 어수선했고, 내가 그들을 데리고 와서 안정이 되고 초창기 제일모직, 한솔이 제대로 운영이 된 게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나만 괜찮다 하는 건 없다는 거다.
노동자가 있는 사회에서는 어떻든 간에 노동조합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게 하나의 방패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이 경제성장은 상당히 잘 했는데 아직까지도 자본가들의 정신 상태는 노동자들을 사람 취급 안 한다. 자기가 돈을 이만큼 번 건 노동자들이 정말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인데, 아직도 대다수는 노동자들을 그냥... 흔히 말하면 머슴처럼 생각하는 게 많다. 그리고 삼성도 이제 무노조라는 건 포기해야 한다. 시대가 변했고 사람 의식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오히려 삼성이기 때문에 앞장서서 노조를 더 장려하고 인정해야 한다.
투쟁하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그런 건 없다. 단지 경제적인 문제다. 실업급여 다 끝났고, 애들 둘이 대학교 다니고 있으니까. 근데 노동자들이 벌어놓은 돈 많지 않다. 뭐 다 뻔하지 않나. 그 부분 말고 다른 건 없다. 내가 한솔 본사 앞에서도 얘기하는데... 노동자는 한 달 벌어서 한 달 먹고 사는데 1년 반 동안 너희들이 나한테 고통을 많이 줬다, 그리고 나는 여의도에 가서 국회의원들한테 법 개정하라고 얘기한다. 만약 사측이 부당해고 시키면 회장도 사장도 거기 관련된 모든 놈들 월급을 주지 말고 동결시켜라, 그렇게 하면 부당해고 하겠냐. 그게 앞으로 한국의 기업들이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그냥 과태료 얼마 물리는 거, 자기 돈도 아닌데. 그게 무슨 진정한 장치냐, 그건 아니다.
남들이 말할 때는 이 투쟁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지만, 난 오히려 그런 거 더 좋아한다. 가끔 발언할 때 얘기한다. 계란도 계란 나름이다. 계란에서 병아리가 나오지 않나, 살아있는 생명체가 나온다. 바위는 죽은 바위고. 병아리 부리로 죽은 바위를 깨면 언젠가는 금이 간다, 삼성 본관 앞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지금 얘네들은, 들려오는 소문에, 잘못 잘랐다, 후회한다고 하더라. 통상적으로 보면 한두 달 사람들이 개기다가 가는데, 나는 보니까 그렇지 않으니까. 아, 이거 잘못 손댔다, 그런 얘기 한다고 들었다. 지금 한솔 그룹에서 봤을 때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투쟁하고 있는 거다. 이런 역사가 별로 없다고 들었다. 한솔도 무노조경영이 원칙인데, 아직까지 활동은 못 봤지만 한솔홈데코라는 데서 노조가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한솔로지스틱스 입장에서는, 이렇게 회사 앞에서 투쟁하는 게 내가 처음이고, 얘네들도 노사 관련해서 나로 인해 많이 배웠을 것이다.
▲ 삼성일반노조와 함께 하는 규탄집회 선전물 [출처: 철폐연대] |
그 밖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정말 잘못을 했는지는 사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내가 해고당할 짓을 했는지, 사측의 주장이 맞는지, 내가 봤을 때는 전혀 안 맞다. 해고의 사유가 전혀 안 되고, 쟤네들이 주장하는 것도 하나도 안 맞고. 희망퇴직하라고 용역회사 전직 권유하다가 거부하니까 해고시키고, 그래 놓고도 계속 협상하자고 했다. 12월 31일자로 해고시켜 놓고서는 노동부에 신고도 3월 15일에 했다. 실업급여 신청하려는데 해고 접수가 안 되어 있었다. 얘네들은 희망퇴직하고 나갔다고 하려고 계속 미뤄놓고 있었던 거다. 그러면서 계속 만나자, 얼마면 되겠냐고 한 거다.
내가 원하는 건 원직복직이다. 돈 필요 없으니까 제 자리 갖다 놔라, 니네들이 해고 시켰으니까 제 자리에 갖다 놓으라는 거다. 정상적인 절차였으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자기들도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아니까 계속 합의하자, 얼마면 되냐, 위로금 주겠다, 그러는 거다. 내가 제일모직에서 넘어올 때 고용보장, 고용승계 다 약속해서 넘어왔고 나도 와서 열심히 했고, 그런데 왜 내가 너희들한테 용역회사 가라는 거 안 들었다고 대기발령도 모자라서 해고를 시켜놓고, 뭐가 필요하냐. 내가 잘못한 게 없고, 내가 징계를 당했다거나 한 게 전혀 없고, 능력이 없니 뭐니 하는 건 쟤네들 얘기고. 희망퇴직 권유하다가 안 되니까 대기발령 내고 계속 강요하다가 해고한 게 사건의 본질이다.
2012년을 기점으로 정택교 조합원의 삶은 달라졌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보다는 일이 먼저였고, 나만 성실하면 억울한 일은 없을 거라는 암묵적인 믿음으로 살아왔던 그가 청천벽력과 같은 부당해고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어 나선 투쟁의 시간은 어느새 1년 반을 지나고 있다.
삼성물산에 입사해 제일모직 패션 물류부문으로, 다시 한솔CSN으로 전적되는 동안 그는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해왔다. 자본의 필요에 의한 이동이었지만, 스스로의 선택이었기에 의구심조차 묻어버리고 따른 결과를 부당한 해고로 마주해야 했다. 해고는 개인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불명예라고, 자신을 사회적으로 ‘전과자’로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해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개인적인’ 싸움이 이제는 함께 전적한 동료들을 지켜주는 저지선이 되고 있음을 그와 동료들 모두가 알고 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비용 논리를 앞세워 노동을 유연화한 자본과 이를 조장한 국가가 있다. 누군가 나서지 않으면 고통은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지만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맞서기로 한 싸움이다. 한솔로지스틱스 부당해고자, 삼성일반노동조합 정택교 조합원의 투쟁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