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라시’에 감춰지는 노동자 민중의 고통

[양규헌 칼럼] 계급적 투쟁이 조직되어야 엄동설한을 극복할 수 있다

연말이 다가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라는 부담감이 엄습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따라 조급함과 후회는 물론이고 아쉬움과 안타까움 역시 반복된다. 그럼에도 새해라는 내일을 향해 자신을 위로하는 얄팍함이 드러나는 것은 노동자 민중의 현실이 점점 더 암울하기 때문이다. 사법부, 행정부, 국회로부터 차갑게 외면당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고, 하늘을 향해 광고탑에 오르고 공장의 굴뚝을 오른 사람들이 강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여전히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 그 희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 같기도 하지만, 이대로 절망으로 추락할 수 없다는 굳은 결의의 이름으로 ‘계급적 대응’을 촉구하는 것으로 들려온다.

일제시대 인가? 중국 후한 말 인가? 난데없이 ‘찌라시’와 ‘십상시’가 신문을 도배하고 있다. 술집에서 노가리 씹으며 할 수 있는 말들이 대통령의 입을 통해 ‘찌라시’, ‘대박’ 이라는 언어로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서 태연함 속에 감춰진 음흉한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일본의 속어나 방언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의도적으로 사용할 때 그 속에 담겨 있는 고도의 전략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청와대는 내부에서 가공되거나 공작된 국정농단, 인사문제를 비롯한 숱한 의혹들을 해명하기는커녕, 자신들이 생산한 공문을 휴지조각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불리한 정치적 쟁점을 비켜가기 위해서라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는 아무렇지 않다는 저질정치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국민을 속이고 기만함으로써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는 밑바탕에는 국가를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독선 그 자체가 깔려있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이 적으로 취급되는 세상

손자병법에 ‘전쟁은 속임수다’라는 말이 있다. 전쟁 자체가 속임수라기보다 전쟁 과정에 필연적으로 속임수가 많다는 것이고 이런 속임수는 늘 합법적인 전쟁의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반면에 클라우제비츠는 ‘속임수가 투자 대 효과 측면에서 실용적인 가치가 없다고 폄하하면서 지휘관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자질은 잔꾀를 부리는 재주보다 정확하고 날카로운 이해력이다‘라고 말했다. 동서양의 역사와 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되는 대목이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다고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적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을 죽였을 때 획득하는 정당성이 적이 아니었을 경우에는 통용될 수 없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통치수준이 정치적 기득권을 위해서는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짓거리도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따름이다. 작금의 우리 노동자 민중은 지배 권력으로부터 아군의 취급을 받고 있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이 그 도를 넘고 있다"며 "이는 국민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고 국가의 위상 추락과 외교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국정과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용납할 수 없는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것이다. 왕정정치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런 태도는 정당성은 고사하고 병적인 우월성에서 발현되는 유아독존과 아집, 불통은 물론 자가당착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번 국정농단, 십상시 사건에서 나타난 ‘찌라시’는 현 집권세력이 부도덕과 불법을 저질렀을 때 사용하는 단골메뉴이다. 지난 대선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비밀누설 의혹이 정치쟁점화 되었을 때, 이 천기를 누설한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은 그 회의록의 내용을 ‘찌라시 형태로 된 문건’에서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의 변명은 야당과 단체들에게 조롱을 받았지만 검찰은 그를 무혐의 처리함으로써 ‘찌라시’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고 피해갈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했으며 저들이 즐겨 사용하는 유행가가 돼버렸다.

사건의 본질은 지배권력 내부의 권력 따먹기 암투에 불과하다

최근 ‘찌라시’가 다시 부각된 것은 대통령의 비선과 관련된 이른바 ‘정윤회 문건’으로 촉발된 국정농단 의혹 때문이다. 대통령은 문제의 문건을 ‘찌라시’라 했고, 몇몇 일간지 논설위원도 딱 그 수준이라고 했다. 그 후 ‘찌라시’ 공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와대의 공식문건을 ‘찌라시’라고 스스로 규정했을 때, 청와대의 위상이 ‘찌라시’를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라면 그 문건은 ‘찌라시’가 맞다. 청와대가 생산한 문건의 품격을 그렇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격이지만 새삼스럽지는 않다. 농담이 섞인 말이라고 해도 ‘청와대 실세가 진돗개’, ‘청와대가 생산한 기록물을 찌라시’라는 말은 권력을 사유화라고 규정하지 않고는 내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박근혜정권 집권이후 인사문제를 비롯한 공약이행과정에서 보여줬던 허접함 또한 딱 그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찌라시’가 모든 언론을 도배함으로써 묻혀가는 노동자계급의 처절함과 절망감속에 희망을 담아야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문건유출 과정이 국기를 뒤흔들든, 십상시가 국정을 농단하든, 7인회가 대립전선 전략을 수립하든 별로 관심도 없지만 ‘찌라시’라는 속임수로 시작된 사건의 본질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설사 밝혀진다고 해도 그것의 본질과 성격은 결국 ‘그들만의 리그’에서 진행되는 허접한 권력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드러나고 있는 쟁탈전의 상황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정윤회 편을 드는 꼴이고, 새정치민주연합은 박지만을 응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집권여당으로부터 정치공세라는 비난까지 받아가며 새정치민주연합이 왜 이렇게 허접한 코미디 연출에 합세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느 쪽이 승리하고 어느 쪽이 패배해도 그 책임은 대통령이 져야하는 최악의 패이고, 야권에게는 꽃놀이패임이 명확한데 소위 제1야당이 당사자처럼 전열을 불태우고 있으니 노동자 민중의 판단에도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를 억압 착취함으로써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발상

노동정책은 경제정책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한다. 기하학적으로 보면 같은 질의 양면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개념은 완전 반대의 개념이다. 박근혜정권 취임 이후 노동정책을 제시한 것이 있다고 볼 수가 없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일자리 늘리기, 정규직 고용관행 정착, 사내하도급 근로자 보호, 정년연장, 경영상 해고의 요건 강화 등을 국정과제 중에 노동정책이라고 제시하고 있으나 그 본질은 경제정책일 뿐이다. 특히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에 대한 해답을 ‘정규직 해고요건 완화’라는 해괴한 논리로 들이대고 있다. 비정규직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규직도 불안정노동으로 평준화시키겠다는 발상이다. 비정규직에 대한 화살이 정규직을 향할 것이라는 전망을 10년 전부터 하였는데 서서히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고용의 유연성에 균형을 잡겠다’, ‘해고절차에 절차적 요건을 합리화 하겠다’는 박근혜정권의 방침은 노동자계급을 향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기업을 살찌우면서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논리로 무장한, 영악해지고 강해진 자본과 권력은 한통속이 되어 예리해진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바깥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절망의 벼랑에서 희망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의 야만적 공격이 ‘찌라시’와 ‘십상시’에 가려지면서 수면 아래서 노동자 목줄은 계속 조여 온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목숨을 담보로 사활을 건 투쟁이 계급적 연대가 아닌 개별적 선도투쟁의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데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자리한다. 집권세력의 무능함에 정치적 파열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싸움은 권력을 등에 업은 자본과 노동자 민중의 싸움, 즉 계급적 투쟁이 조직되어야 엄동설한을 극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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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 노동정책 , 정규직 ,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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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이

    배부른돼지 정치인들에게 노동의 쓴맛을 느끼게 해줘야 되지 않겠습니다~"더럽고 추악한 인간들 진도 앞바다에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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