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이 노동운동의 희망인가

[양규헌 칼럼] 협동조합이 노동자의 희망이라는 것은 어불성설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를 맞으며 협동조합운동이 관심을 촉발시켰다. 자본주의가 위기를 반복하면서 대안 경제운동으로 사회적 경제조직인 협동조합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금융위기에 실제로 거대기업들이 직격탄을 맞고 쓰러졌으며 그 틈새를 비집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자 생활을 파괴하면서 법률적 완결구도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필연적으로 사회빈곤화(양극화) 결과를 가져왔고 불안정노동을 양산하면서 비정규직 자체가 정상적 고용형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극복하자는 대안으로 ‘자유로운 공동체’라는 협동조합이 미래사회에 대한 대안형태로 만들어지면서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2012년 12월 협동조합 기본법이 시행되고부터 협동조합 열풍이 불고 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회, 문화, 경제적 필요와 염원을 충족하고자 자발적으로 결합한 사람들의 사업체이자 결사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협동조합은 ‘이용자 소유기업’이다. 주식회사와 달리 협동조합 출자금은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주식배당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조합원인 이용자가 누구냐에 따라 소비자협동조합, 생산자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등으로 나뉜다.

한국에서도 1920년대부터 노동자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이 결성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국규모였던 조선노동공제회는 1921년 최초의 소비조합인 '조선노동공제회 소비조합'을 설립했다. 원산총파업을 주도한 원산노동연맹 역시 협동조합운동을 핵심 사업으로 설정하고, 의료생협·공제조합·신용조합 등 거의 모든 형태의 협동조합을 활발하게 운영했다. 70년대 동일방직과 원풍모방·대한전선그룹 노조에서도 소비자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 운동이 펼쳐졌다. 한국노총은 지원본부를 설치해 사업장의 협동조합 사업에 상당한 역량을 투여했고, 지금도 ‘한국노총복지할인마트’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협동조합 운동이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이다?

최근 협동조합의 중요성에 대해 도처에서 강연과 토론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 중에 관심을 끄는 주제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이다. 협동조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위기에 대응할 대안적 사회경제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협동조합이 각광을 받는다”고 한다. 한국노총의 황선자 연구위원은 “위기에 직면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협동조합 같은 사회적 경제와의 연계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협동조합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조직화 전략으로 유효하다”고 강조한다.

한겨레두레공제조합연합회 박승옥 대표는 “협동조합 운동은 사람들의 생활을 국가와 자본의 지배와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박 대표는 “70~80년대 노동조합은 사실 새로운 인간관계, 새로운 사람, 넉넉한 공동체로서 기능한 측면이 강했지만 과도한 전투적, 경제적 조합주의의 기묘한 결합으로 그 기능을 상실했다”며 “노조운동이 ‘노동자 중심성’을 버리고 시민사회단체들과 연계하면서 ‘대중의 지혜’를 결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경제 체질 변화와 더불어 ‘잡계급’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계급 분류가 애매해지고 있는 현실에서 의식 또한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진정한 대안모색 운동이라면 기존의 계급운동 시각을 과감히 재검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사실 박승옥 대표의 이 같은 주장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990년대 ‘노동운동 위기론’에서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과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비판 그리고 최근에는 ‘생태적 노동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며 진정한 대안은 협동조합이라고 한다. 또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도성장 시기를 제외하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협동과 연대의 협동사회경제체제인 협동조합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과제와 희망은 협동조합이라는 것이다.

협동조합을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으로 규정하는가

황선자 연구원, 박승옥 대표를 비롯한 협동조합 예찬론자들은 협동조합의 성공사례를 영국의 로치데일에서 찾으며 러시아혁명의 성공요인도 협동조합이었다고 규정해 버린다(박승옥). 이들은 영국의 로치데일 협동조합과 이탈리아의 사회적 협동조합, 프랑스의 노동자 협동조합, 러시아의 농촌공동체 ‘미르’ 활동의 역사성을 분석하며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은 같은 뿌리’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맑스와 레닌도 협동조합을 대안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협동조합은 맑스주의적’이므로 한국의 노동자와 진보주의자들은 그 역사성을 음미하라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 나타난 현상에만 주목할 뿐, 협동조합이 왕성했던 시기의 노동자상태와 현재 유럽 노동자계급의 조건과 과거 사회주의 체제에의 협동조합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영국은 오래 전에 노동자들이 설립한 협동조합으로 출발해, 여러 협동조합들과 함께 오늘날 영국의 대표적인 유통노조로 발전한 현상은 외면하는가. 맑스가 협동조합이라는 주제로 극찬하며 쓴 글이 있다는 소린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맑스는 ‘오언’을 비롯한 협동조합주의자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하며 협동조합이 “독점의 성장을 억제하거나 대중을 해방시킬 수 없고 심지어 빈곤조차 줄일 수 없다”고 비판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협동조합 대안론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협동조합이 ‘노동자 자주관리’라도 되는 양, 노동자에게 노동자 중심성을 버리라고 하는가.

다른 조건을 같은 상황으로 각색하며 내세우는 노동조합 무용론

한국의 노동운동 위기에 대한 무한한 걱정 끝에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을 주장하려면 근거로 제시한 유럽과 한국의 불평등과 불안정노동의 실태정도는 분석해야 한다. 또 노동자계급의 기본적 권리인 단결권의 제약과 노동조합의 조직형태에 대한 차이도 서술해야 설득력을 갖는다. 유럽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30~40%에 달하고 있으며 여기에 노동조합 조직형태는 완성된 산별로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한국 노동자들의 복지수준은 OECD국가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으며 비정규직의 임금분포는 정규직의 절반을 넘어서는 차별로 나타나고 심각한 고용불안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이들을 협동조합으로 조직하는가. 특수고용으로 낙인찍혀 노동법 적용도 받지 못하는 택배노동자들이 협동조합으로 조직되고 있는데 그들의 노동자성 쟁취투쟁에 대한 협동조합의 계획은 제출된 바 있는가. 알바노동자 노조는 불필요하며 협동조합으로 조직해야하는가. 한국의 노동자 조직률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합쳐도 10%가 되지 않는 최악의 상태라는 것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공격이 총체적이며 다양화 됐다는 뜻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노동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협동조합이라면 노동조합은 필요 없다는 말인가.

협동조합이 노동자의 희망이라는 것은 어불성설

협동조합만이 위기의 노동운동을 극복하기 위한 핵심 대안이라는 주장은 과도하다. 협동조합 예찬론자들은 노동조합이 시대착오인양 호도할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분절화’를 극복할 대안이 협동조합인지에 대해 답을 해야 한다.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협동조합이라면 ‘아름다운 공동체’로 출발했던 농협과 수협이 농민과 어민을 위해 존재하는 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답해야 한다. 주민들이 출자금을 모아 생협을 설립하여 값싸고 좋은 물건을 직거래를 통해 공급 받는 그런 협동조합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조직적 틀로서, 대안으로서 협동조합을 제시하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70~80년대 조직되었던 소비자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은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관리하는데 활용되었다. 노조위원장(지부장)은 당연직 이사장으로서 대출이라는 고삐를 잡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조합원이 전세자금을 대출받으려면 이사장인 위원장에게 잘 보여야하고 위원장은 이를 미끼로 조직 관리를 하며 어용의 뿌리를 튼튼하게 했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조합원이 주인이라는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은 경계를 넘어서면 기존의 기업과 운영방식이 다를 수 없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틀 내에서 움직이는 자본의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그 구도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점차 늘어나고 있는 협동조합이 처한 현실이다.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하에 협동조합 조합원들은 스스로 자본가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경제는 ‘죽느냐 사느냐’만을 요구할 뿐이며 그 속에서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요구에 충족하는 평등, 해방세상은 결국 협동조합이 아닌 다른 시스템을 요구한다. 협동조합도 자본주의 논리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협동조합의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도입한 ‘노동자 중심성’을 버리고 협동조합에 매진하라는 주장엔 ‘자본 중심성’이라는 의도가 깔려있으며 노동조합 해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이 국가와 자본의 지배와 종속으로부터 노동자·민중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본주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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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ㅁㅅㅎㄴ

    무식한놈. 사회과학을 수학으로 이해하고 있는 놈. 문화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모르는 놈. 맑스가 협동조합에 대해서 비판만 했다고? 웃기시네... 공부좀 더해라. 맑스는 비판적 종합으로 협동조합의 가능성과 한계를 얘기했다. 그게 변증법이거든.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얘기했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기계적 사고방식은 변증법과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쪽팔린줄 알고 입닥치고 살거라.

  • 헐 ㅋ

    대안이라는건 하나만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생각하는 길만이 대안이라는 사고 좀 버렸으면... 글쓴이나 그가 비판하는 이나... 에휴 .. 그리고 논리의 비약도 이제 그만..

  • 코뮤니스트

    ※ 노동자운동 내부에서 표현되는 칼럼의 주장이 반갑다. 댓글은 사실 딴지를 걸려는 의도가 아니라, 반가움에 대한 표현, 애정이다.
    현행의 노동자운동의 지리멸렬은 드러난 실천보다 더 이전, 운동의 철학적 빈곤-소위 활동가라는 이들의 사유없는 실천?-이 똬리를 틀고 있기에. 이 칼럼의 수준에 훨 못미치는, 80년대 학습한 이론을 기억에 의존해 반복적으로 배껴쓰는 현장활동가들의 인식수준을 알기에.
    노동자운동 내부에서부터 더 많은 이견의 공박, 토론의 홍수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이 죽으면 관계도, 조직도 결국 죽음 아니겠는가.

    "협동조합이 노동자들의 희망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는 말 또한 과도하다. 자본이 노동자들의 삶과 육체를 일상적으로 갉아먹는 사회에서, "노동자중심성"에 기반한 전투적 노동운동은 과연 자본의 바깥을 사유하면서 나아가고 있는가? '동일성'으로만 질주하는 현행의 한국 노동자운동의 질곡-생산성 중심주의-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협동조합 또한 노동조합에게 동일한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하에서 협동조합이 노동조합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적어도 코뮤니즘사회로의 운동의 확대와 상승을 바란다면 노동자운동에 대한 비판에 버럭하기보다 노동자운동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는 다양한 주장과 실천의 근거들을 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그 지배의 틈새를 공략하고자 모색되고 있는 다양한 흐름 중의 하나인 '협동조합운동'-협동조합운동=박승옥이 아니다-을 폄하하기보다 그 장점을 활용하여 노동자들이 숨쉴 틈과 체력을 비축해 가면서 동시에 자본의 바깥을 전망하고 만들어 가는, 도처에서 자본의 지배에 구멍을 내고자 하는 다양한 실천들과 협력하고 연대하면서 보다 상승된 '혁명적 기획'들을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부터 변화된 실천들을 내보이면서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노동자운동 바깥의 타자들-이름없이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무관심, 혹은 무시, 혹은 부정으로 일관한다면, 타자와의 연대와 공동성에 대한 사유와 실천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노동자운동이 잃을 것은 혁명이요, 얻을 것은 날개없는 추락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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