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5 남북합의의 정치학과 불안정한 동북아시아

[소셜파워] 8.25 합의의 최대 수혜자는 박근혜인가

8.25 합의 이후 남측의 실무접촉 제안에 대해 하루 만에 북측이 화답한 것을 두고 박근혜정부와 보수세력이 깜놀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의 최고존엄인 김정은이 일주일만에 나타나 이번 합의를 소중히 여기고 풍성한 결실로 가꿔가야 한다는 발언을 고려하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남한의 북한에 대한 불신 팽배와 북한의 남북관계 개선의 절박함을 반증하고 있다.

이번 합의를 놓고 일부 보수세력들은 아직도 손익과 승패를 따지고 있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다. 어느 일방이 굴욕적이거나 손해를 본 것도 아니며, 극한 상황으로 치닫는 치킨게임으로 보였지만 결국 윈윈게임이었다. 역시 남북관계는 적대적 의존관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북한의 의도된 연출과 선택

지뢰사건에서 시작된 일련의 흐름이 매우 긴박한 상황을 연출했다지만 전작권이 없고 의지도 박약한 박근혜 정부와 미국이 두려워 무모한 도발은 공멸을 불러오기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없는 김정은의 입장이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

물론 미국, 중국, 유엔사 등 누구도 확전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이 위기를 고조시켜 협상력을 높이는 전술을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9월 3일 전승절 행사를 앞둔 중국이 한반도가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이는 것을 반길 이유는 없다. 중국 외교관들이 22일 오후 비공개 방문했다는 미확인 언론 보도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의 개입과 역할은 더 적극적이었다. 그 동안 북한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미국은 이번에 북한의 군사적 위력과 내구력을 확인하면서 대화제의,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8.25 합의 환영, 북핵문제 대화 해결 의지 표명 등 북한의 존재감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손해를 감수하고 양보했다는 평가는 적합하지 않다. 북한이 지뢰사건에 대한 유감표시로 체면을 구겼다는 평가는 국제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에 충분히 감수할 만한 가치다. 북한에 대한 불신과 부정적 이미지가 굳어졌다는 평가도 과도하다. 오히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를 확인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의도적 무시가 중단되고 북미 관계 개선의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박근혜정부를 선택했을까? 현재 동북아시아는 5개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1개의 전체주의 국가가 3 vs 3 스트리트 파이터의 대결구도를 형성하면서 2인 3각 경기를 펼치는 복잡한 공간이다. 북중러의 삼각관계를 보면, 지난 2013년 3차 핵실험 강행 이후 최대 후견국이자 혈맹이었던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북한으로서는 든든한 우방이 절실해졌다. 시진핑이 김정은보다 박근혜를 먼저 만난 것은 충격적이었다. 특히 장성택 숙청은 북러관계를 신밀월시대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북한은 대외무역의 90%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파트너가 필요했고 러시아를 선택하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올해를 ‘북러 친선의 해’로 정하고 경제,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2014년 4월에 경제공동회의가 열려 북한의 채무 110억불 중 90%인 100억불을 탕감해줘서 양국간 경제협력이 정상화되었다. 북한의 노동자 2만여 명이 러시아에서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이는 푸틴의 신동방정책과 맞아 떨어지기도 하다.

군사협력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북한은 러시아를 통해 낙후된 재래식 무기를 현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북한이 구입하기 원하는 러시아 첨단 무기는 방공망을 강화하기 위한 S-300 지대공 미사일, 미그-29와 수호이-35 전투기, 4천 톤급 이상의 대형 군함과 T-80탱크, T-90탱크 등으로 알려졌다.

사실 북한의 핵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원천기술은 구소련에서 들어왔고, 금년 봄 실험에 성공한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에 사용된 부품도 일본 무역상을 통해서 들어왔지만 소련제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러시아와의 군사교류는 역사가 깊다. 올 가을에는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한마디로 따뜻한 북러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의 우려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한이 재래식무기를 현대화하고 핵무기 개발 노하우까지 알아낼까봐 우려하면서 북러관계를 ‘위험한 관계’라고 한다.

반면 북중관계는 냉랭하다. 양국간 고위급 접촉은 거의 사라졌다. 김영남, 리수용, 강석주, 최태복 등 북한의 외교라인이 세계를 누비면서도 중국을 외면하고 있다. 중국의 단둥과 북한의 신의주를 잇는 신압록강대교는 북중관계의 바로미터인데, 북중경제협력의 동력이 될 이 다리는 작년 10월 완공되었지만 북한이 맡은 도로건설을 미루는 바람에 아직도 개통이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8월 6일 막을 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 외교장관회의에서 그동안 관례적으로 이뤄졌던 북한과 중국의 외교장관 회담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졌다. “조국의 자유독립과 평화를 위한 성전에 고귀한 생명을 바친 인민군렬사들과 중국인민지원군렬사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립니다.”(조선중앙TV방송, 2015.7.26.).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강력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 중러간 신밀월이 북한에 긍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오히려 중러합동군사훈련은 미일합동군사훈련에 맞대응하는 것으로 동북아 불안정요인의 핵심이 될 것이다.

게다가 경제적 측면에서 러시아는 북한에게 계륵같은 존재다. 러시아가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북한에 접근하는 반면 북한은 러시아가 얻는 만큼의 경제적 전략적 이익을 얻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양측의 경제협력 규모가 1억달러도 채 안 된다. 전체 교역규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북한의 경제난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며 따라서 서로 신뢰할 만한 경협 파트너가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미국의 의도적 무시 또한 북한의 어려움을 호전시키기에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과의 경제협력을 통해서 북한 경제의 활로를 모색하는 실리적 선택을 한 것이다. 북한이 이번 남북회담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 중단은 요구하지 않으면서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를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러니 북한의 8.25 합의 이행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높기 때문에 기대해도 좋다.

8.25 합의의 최대 수혜자는 박근혜인가

한미일 관계에서 한국의 존재감 상실은 진작 시작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절반을 허송세월로 보냈는데, 중국과 일본에게는 눈치를 보면서 북한에만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 동안 보여주기식 외교 패션쇼 외교에 불과한 속빈 강정이었으며, 국내에서 하락한 지지율을 상승시키는 도구로 해외 순방을 활용하였다.

이러한 한계와 실패는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었다. 외교 안보 정보라인이 군출신들에게 독점되고, 문고리 측근과 검찰출신들로 채워진 청와대 실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들에게 북한은 붕괴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몇 년 안에 급변사태가 일어날 것을 전제로 정책을 수립하였다. 박근혜의 임기 내에 급변사태가 발생하여 흡수통일이라는 대박을 터뜨릴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쪽박’을 찰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대북 강경 일변도의 입장과 태도는 지지기반인 보수수구세력에게서 일반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특징으로, 이번 사태에서 박근혜의 ‘확실한 사과’ 원칙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번 기회에 북한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었지만 뜻대로 안되었던 것이다.

반면, 중국과 일본에는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민감한 한반도 정세를 다루기 위한 전략적 사고의 부재를 드러냈다. 일본의 재무장을 추구하고 있는 아베가 지난 4월 28일 미국을 방문하여 상하의원 합동연설을 한 것은 패전 70주년에 맞춰 2차대전 전범국가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지지하면서 한일간의 역사갈등에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베의 왜곡된 역사인식에는 미국의 지지에 의해 가능해 진 것이다.

박근혜가 임기 초반에는 일본과 북한에 대한 단호한 태도로 국내 지지율에서 재미를 많이 봤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짝사랑의 상대인 미국은 아베를 치켜세우며 격려해 주라고 당부했다. 그럴 때 마다 상대의 잘못을 탓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능을 덮었는데, 이제 그 시점도 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박근혜 정부는 왜소해 진 것이다. 북한 문제는 다음 ‘도발’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하는 일이 없었는데, 절묘한 시점에 긴장을 고조시켜 남북대화가 성사되었다.

특히 이번 과정에서의 안보결집효과가 오랜만에 빛을 발하였다. 한국갤럽이 8월 넷째 주(25~27일 3일간) 설문조사 결과 박근혜에 대한 긍정 평가가 49%에 달해 올해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지지율은 향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개혁의 추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국정개혁의 최대 호기인 셈이다. 게다가 중국과의 관계개선은 덤으로 얻었으니 이것야말로 일석이조요 금상첨화다. 그러니 원칙을 고수하지 못해서 확실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점, 모호한 합의문으로 인한 북한의 합의 번복 가능성 등이야 대수롭지 않다.

이렇게 박근혜 정부는 당분간 국내와 동북아시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8.25합의 최대 수혜자가 된 것이다. 미국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승절에 참여하기로 한 것은 매우 의미있는 것으로, 동북아시아의 정치지형을 재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는 북한고립화 정책의 일환이 아니라, 남북관계 개선과 공존-공영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한중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국정부는 북에 대해 일방적 안보가 아니라 ‘남북공동안보’를 추구하고, 동시에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도를 줄여나가는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 한마디로 진영을 뛰어넘는 외교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이런 선택은 현 시점에서 주저앉고 있는 남한경제에게 활로를 열어주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타도와 남북대결을 외치는 수구보수세력의 지지를 업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과연 이 길로 나설 수 있을까? 일정하게는 진전시키겠지만 대담하게는 나아가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럴수록 평화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을 바라는 국민들과는 물론 대북진출을 바라는 한국의 독점재벌과 박근혜 정부와의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외교안보는 사적영역이 아니라 공적영역이다. 교육, 교통, 의료, 전력 등 사회간접자본이 일상생활에서 기반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재화이기 때문에 공공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외교안보는 한 국가와 구성원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공공성을 유지해야 한다. 외교안보 정책은 대통령 개인의 업적이나 여당의 선거 승리를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준수한다면 블안정한 동북아시아가 평화의 공간으로 재구성될 것이다. [참세상연구소(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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