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놈들 전성시대

[칼럼] 정치공학 틀 속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계급

우연한 기회로 밤늦은 시간에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타이틀은 노동운동으로 치열한 한 시기를 보낸 나에게 차라리 시적인 시공간으로 주름져 있다. 운동의 열정과 그 담금질로 탄압을 경험했으니 절대 과거가 될 수 없는 리얼리티로 살아있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초헌법적 권력인 대통령이 자신을 보통사람으로 지칭하고 보통사람들이 편안한 사회를 누리게끔 민생치안에 힘쓰겠다며 벌인 ‘범죄와의 전쟁’이, 영화처럼 범죄와의 전쟁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음을 투쟁했던 노동자, 민중은 잘 알고 있다.

행복한 사회적 환경에서 인간적인 삶을 살아야 할 국가에서,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 불법자들은 오로지 조폭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영화에서는 철저하게 은폐되었으나 범죄 구성요건의 중심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이 있고, 형식적으로 혐오감의 상징, 문신그룹인 조폭을 끼워 넣었을 뿐이다. 자본의 폭력적 질서를 깨트리는 것이 정의라고 믿으며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맞서는 노동자계급은 ‘나쁜 놈’으로 각색되어 범죄자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권력과 자본에 대한 대립점은 철저하게 비켜가고 있으며 숱한 사실들을 은폐하였다는 점을 들추고 있는 것은 필자의 픽션에 대한 천박성과 예술에 대한 무지일 수도 있다.

나쁜 놈들 전성시대

이 영화의 부제는 나쁜 놈들 전성시대다. 흔히 갱(gang)영화는 조폭의 성공과 탐욕과 배신 등을 다루지만 그 캠프가 보여주려는 진정한 비판의 대상은 나쁜 권력과 그것이 지배, 작동하는 자본주의 세계의 비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메시지가 강한 영화일 수 있다. 조폭 영화를 보면 나쁜 권력이 떠올라야 하고 부정한 권력을 다룬 영화를 보면 조폭이 떠올라야한다. 그런 영화가 재미도 있고 캐릭터도 살아있고 메시지도 전달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 최익현은 비리세관으로 일하다 쫓겨난 뒤, 공무원출신을 내세워 한탕을 꿈꾸며 두 개 조직의 폭력배와 손잡고, 안기부를 매수하여 여러 개의 카지노로 돈을 번다. 이 캐릭터는 자본의 일면을 보여준다. 권력의 대역으로 등장하는 조범식 검사는 나쁜 권력의 하수인으로 조폭보다 더 폭력적인 방법으로, 없는 범죄 사실도 조작하는 놈이다.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영화의 막판에 검사가 주인공에게 묻는다.

“너는 조폭도 아니고 정치하는 놈도 아닌데 도대체 뭐냐?” 최익현은 비굴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나는 보통사람이라고...” 그랬을 것이다. 당시엔 노태우가 보통사람이었다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도 보통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도 청와대 뒷산에서 아침이슬을 부르는 보통사람일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노동자들을 향한 전쟁

역사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사수를 위해 없는 범죄를 구성하고, 공안통치의 일환으로 노동자계급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그 기세에 눌린 노동자계급은 공안정국이라는 정세에 호흡을 가다듬기에 급급하며 움츠려 들기도 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늘 자신들의 체제 유지 강화를 위해 위기상황의 정치적 돌파구 마련하려고, 공안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노동자계급을 억압하며 ‘범죄와의 전쟁’의 재물로 삼는다. 때로는 한반도에 평화라는 구실로, 때로는 노사관계 안정이라는 이유로, 때로는 사회 안정과 발전이라는 개소리를 짖어대며 허구적인 ‘사회정의’의 이데올로기 칼날을 휘둘렀던 게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이 영화 참 아리송하다. 메시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확실하게 그게 뭔지는 콕 짚어낼 수 없다. 누가, 어떤 놈이 최후의 승자이고 그 놈은 누굴 상징하는 건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엔 정말로 나쁜 놈들만 나온다. 여기서 나쁜 놈들만 나온다는 의미는 권력과 이권을 다투는 폭력과 자본은 있고 노동자계급이 없다는 뜻이다. 관객의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내기 위해 만든 영화에 논픽션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과도한 앵글일지도 모르지만 노동자계급이 실종된 영화에 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다.

소위 진보를 자칭하는 자들이 싸질러 놓은 오물효과

이전 자유주의권력(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핵심 노동정책이었던 정리해고, 비정규법으로 말미암아 죽임과 죽음의 행렬이 계속 되고 있는 ‘야만적 법과 제도’를 만든 바로 그 세력들이 이명박 정권이 집권을 시작하면서 ‘노동자의 벗’이며 진보정치세력으로 둔갑한다.

또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 노동자를 대상으로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던 그들을 동지로 받아들이는 노동자계급 정치는 국민승리21에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계급지향에서 민주노동, 그리고 진보정치를 거치며 표몰이 전략으로 일관했다. 노동자계급정치는 고사하고 진보의 질조차 자유주의적 성격으로 전환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어제의 적’과 동침을 마다하지 않는 ‘진보통합’에 대한, 철학과 역사관은 현실 노동정치의 프레임 속에서 파탄나고 있다.

올해엔 정치 일정이 이어지는 해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합집산과 권력의 향배에 따른 분석이 복잡한 정치공학의 잣대로 각 세력별로 계산기를 두들기기에 분주하다. 운동진영에서도 총선과 대선에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달린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전략으로 나열되는 보수, 진보만 등장할 뿐 노동자계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기준도 모호하다. 진보와 보수는 명확한 반대의 개념임에도 경계선이 불분명해짐을 방지하려고 설정한 정책과 공약의 논쟁구도를 열심히 만드는 중이다. 그러나 정치 일정이 임박해짐에 따라 원칙과 철학이 비어있는 공약, 정책 등에 차이는 없어지고 있다.

진보를 자처하는 세력들도 보수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복지담론을 내 세우고, 한미FTA, 비정규직, 정리해고, 불안정 노동에 대해 정책과 입장을 강변하지만, 그 주장과 정책들이 진정성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현실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자들은 신자유주의 도입의 역사적 오류와 반노동자적 정책으로 일관하며 노동자, 민중에게 폭력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신자유주의 추종자들과 진보세력이 손잡으며, 노동자계급의 꿈과 희망을 뒤로한 채, 정치적 입지만을 고려한 그들만의 정치공학수식을 풀어 낸, ‘진보통합’이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아울러 계급정치가 실종된 현실에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의 여파는 노동자계급의 의식 속에 대리정치의 관행만 안겨주고 있다. 노동자가 정치의 객체로 전락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세월의 뒤안길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다.

현안 쟁점을 기준으로 봐도 그렇다. 신자유주의를 동경하며, 한미FTA를 추진했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양산법을 만든 자들이 진보인가. 노동자의 기본권과 한미 FTA반대하며 저항했다는 이유로 1000여명의 노동자, 민중을 가두었던 자들이 진보일 수 있는가. 정리해고 된 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들을 삶의 벼랑에 내몰고 간접 살해한 그들이 진보일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자들이 싸질러놓은 오물들의 영향이 노동현장에 남아있다. 삶을 향해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참담한 몸부림으로. 노동자들은 엄동설한에 맨몸으로 노출되어 살인적인 혹한을 겪고 있다.

노동자, 민중을 향한 범죄행위

노동자계급의 삶은 픽션이 아니다. 어제의 거짓이 오늘의 진실로 바뀔 수 없고, 계급적 범주가 계절 따라 바뀌는 게 아니다. 때문에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자체도 계급성의 바운더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의 정권이,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국민주권을 팔아먹는 FTA를 추진하는 행위는 범죄행위이다.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비정상 고용형태를 정상적 고용형태로 만들고, 근로기준법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비정규보호법을 만든 반노동자적 행위는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자신의 일터에서 경영상의 이유 하나만으로 수천 명씩 쓰레기처럼 정리됨으로써, 삶의 의지를 잃고 죽음에 이르게 한 간접 살인 또한 범죄행위이다.

계급이라는 단어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진실에 대한 가치관에 동의한다면 영화처럼 ‘좋은 사람’과 ‘나쁜 놈’ 구분은 있어야하지 않은가? 노동자, 민중에게 해악을 끼치고 자본을 위해, 제국주의를 위해 나쁜 일을 하며, 노동자계급을 탄압한 일은 ‘나쁜 짓’이다.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 서 있던 자들은 시간이 경과되어도 여전히 ‘나쁜 놈’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이 전쟁을 선포해야할 대상과 무원칙하게 동거하는 것은, 고통과 좌절을 반복하는 것이며 해묵은 민주대연합의 망령이 노동자계급정치의 암울한 운명에 채찍을 가하는 꼴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통합을 기치로 내건 진보정치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배가시켜주는 대가로 노동자, 민중을 억압의 틀 속에 가둔, 역사적 범죄를 자행했던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며 오로지 정치공학의 계산대에서 기계적 결합만을 고집하며 노동자에게 지지해야한다고 강변한다. 권력을 잡기 위한 권모술수 그 이면에 끊임없이 타살당하는 노동자계급이 보이지 않는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투쟁의 처절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정치적 이합집산을 통한 무원칙한 타협과 표몰이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통해 자행되고 있는 자본과 권력의 범죄행위와 ‘나쁜 놈’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정치의 면모가 아닌가.

계급과 계급간의 대립지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정치다

분노와 삶의 고달픔이 반복되는 이유와 그것을 노동자의 책임으로 떠넘긴 세력이 누구이며, 그들이 과거에 자본에 대해, 제국주의에 대해,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 왔으며, 진정한 정책과 정치공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노동자계급이 배제되거나 줄 세워놓고 대리정치를 일삼는 정치는 노동자들에게는 일종의 함정이다. 때문에 노동자계급에게 범죄행위를 한 세력은 연합, 통합의 대상이기에 앞서 역사적으로 보면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야하는 대상일 것이다. 반이명박 전선이라는 모호한 쟁점보다는 반자본, 반제국주의를 분명히 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정치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영화를 보고나서 처음엔 너무 익숙한 것들의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SNS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새로운 것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권이 바뀌어도 세월이 흘러도 진정으로 포기할 수 없는 노동자의 가치관과 해방을 향한 전망은 주인공 최익현의 목숨처럼 질기게 입안에 혀로 붙여 밀고 있어야하는지 망설여진다. 주인공 최익현처럼 끈질기게 끝까지 살아남아야하는가 싸워야하는가.

밤길에 겨울비가 부슬부슬 거린다. 짙은 어둠에서 금새 구슬 같은 알갱이들이 혀 안에서 버석인다. 비는 이내 눈으로 바뀌고 빌어먹을 담배와 싸락눈을 함께 삼키며 긴 호흡을 진한 연기와 함께 내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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