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대치는 “과거 vs 미래”의 대치

[기고] 제주 강정 해군기지의 네 가지 이슈

‘강정 문제’에는 크게 네 가지 한국 사회의 중대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민주주의와 정치 소통의 문제. (민주주의 미성숙의 문제) 둘째, 국가의 문제. (국가주의의 문제) 셋째, 자주적 평화 질서 구축, 동북아 평화질서 구축, 미 제국주의의 문제, (평화질서 구축의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태평화의 문제 (대 생태자연 철학과 감성의 문제). 이 중 어느 하나만 빼놓아도 제주도 강정 마을에 집약되어 드러난 한국 사회의 문제를 제대로 짚어낼 수 없다고 생각된다.

  구럼비 발파를 앞두고 강정 일대는 온통 공권력의 천지가 되었다. [출처: 진달래산천]

강정 해군기지, 민주주의 미성숙 문제

먼저, 민주주의와 정치 소통의 문제. 최근 집권 여당 비상대책위원장 박근혜 씨는 ‘이 사안은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와 지역 주민들 간 합의가 끝난 사안’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강정 마을 해군기지 건설 안을 둘러싼 지난 몇 년간의 실제 스토리를 자세히 들어보면, 박 씨의 말이 전혀 엉터리임을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혹 과거에 그런 합의가 있었다 해도, 현 시점에 그토록 강경한 주민 저항, 전국적 시민 저항이 있다면, 이전 합의는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마땅할 것인 바, 저러한 ‘도리도리’ 식 고집 유지 방침을 내놓는다는 것은 집권 여당과 정부가 일부 제주도민이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 헌정 질서 자체와 민주 시민들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번 대선에서 야당 연합이 현 집권 여당을 누르고 승리를 한들, 이러한 근본적 민주주의 미성숙의 풍토를 혁신하지 못하는 한, 그 정권 교체는 대단한 사회 진보가 안 될 공산이 크다. 지금 문제는 ‘정치’ 자체의 혁신이다. 총선과 대선을, 단순히 ‘잃어버린 10년’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10+5’를 훌쩍 뛰어 넘어 정치인을, 정치 과정을, 정치 문화를 대대적으로 혁신해야 하는 무대이자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혁신의 바람으로 민주주의를 새로이 문화화하는 과제가 2012년 봄 우리 앞에 있고, '강정마을'이라는 종양은 이러한 과제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강정 해군기지, '국가주의'라는 괴물이 문제

둘째, 강정 마을에서 우리 모두는 ‘국가’라는 괴물을 본다. 보다 잘 말하면 ‘국가주의’라는 괴물이다. 국가주의란 국가가 국민을 모두 아우르는 공익의 테두리이므로, 국가의 이익을 증진하게 되면 그 안에 포섭되어 있는 국민 모두의 이익이 자연 증진된다는 전제 아래, 국가와 국민이 국익 창출 사업에 매진하고, 국가가 국민을 그 사업에 동원하는 일을 긍정/장려/옹호하는 이데올로기다.

이 국가 이익, 즉 국익에는 국가의 국방력 증대, 국가 안보의 보장도 포함이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음에도, 청문회는 청문회대로 하고, 구럼비 발파는 그것대로 한다는 해군의 강경 대응은 아마도 일종의 ‘뒷배’가 없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뒷배는 그러나 단순히 이 나라 정부 그리고 그 산하의 국방부가 아닐 것이다. 그 뒷배에는 국가주의의 논리에 잘 순응해오고 있고, 그 논리를 너무나도 당연한 가치로 내면화 해온 ‘국민-호출되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 국가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문화적 풍토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각종 토건 사업, 개발 사업의 무분별한 횡횡 역시 이러한 문화 풍토가 있기에 지속되어 올 수 있었다. 국가주의가 문화 풍토로 자리잡았기에, ‘국익’이니, ‘선진국’이니 하는 고리타분한 박정희 시대 말들이 21세기에까지 정치적 수사로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한민족의 기상을 세계만방에 떨치자’ -- 언뜻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바로 이러한 말과 민족/국가 웅비 사상이 우리가 우리의 몸에서 도려내야 할 결정적 암세포다. 구럼비 발파는 이 암세포의 한 가지 발흥 현상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이 암세포에 온 정신을 점령당한 이들의 사상을 상상해보자. 그 사람들 (예를 들어 발파를 추진하고 있는 해군 장성들)의 시선으로 보면 강정에 모여든 물 밖 평화운동가들은 국익 증진을 가로막는 소수의 역도들일 뿐이리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부 소수파들의 반대를 (반역, 민란으로 이름을 붙이고) 진압한다? -- 왕정 사회가 성립된 이래로 위정자들은 대대로 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제시자/실천자들이었다. 강정에서 우리는 이 오래된 괴물을 본다. 그러나 이 괴물은 많은 평범한 한국인들의 심간에 있다.

  구럼비 폭파 소식을 듣고 강정에 찾아온 '전쟁없는 세상' 청년활동가들 [출처: 진달래산천]

강정 해군기지, 미 제국주의 문제

셋째, 강정 문제에는 중미간 세력 싸움이라는 새로운 국제정치 국면에서의 한반도 평화 모색이라는 주제가 흐르고 있다. 먼저 상기해야 할 사실은, 오바마 행정부 등장 이래 USA는 단 한번도 (부시 행정부 때 추진해온) 팽창적 제국주의 정책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USA는 중국의 급부상, ‘팍스 차이나’ 시대의 도래 가능성에 긴장한 채, 대 중국 견제 수단을 다각도로 강구 중이다.

물론 한국 남변의 미 해군기지 건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추진되어 온 것임은 주지하는 바다. 문제는 USA의 팽창적 제국주의에 한국 정부가 그저 놀아만 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국제 질서 하에서 어떻게 전시 체제에서 평화 체제로 이동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하고, 그러한 방향에서 불필요한 중국 자극을 경계해야 마땅함에도, 이 나라 정부는 그저 ‘그간 해온 대로’ 한미군사동맹제일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따름이다. ‘그간 해온 대로’ 하는 것은 물론 그렇게 하는 이들이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맹신도들이기 때문이다.

강정 해군기지, 생태평화적 감성 문제

넷째 문제는 위의 세 문제에 비해 덜 중요한 지엽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감성과 문화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위의 ‘국가주의’의 문제만큼이나 중대하다. 이 문제를 의문문으로 풀면 이러하다. “자연은 인간 복지와 사회 발전을 위해 얼마든지 이용 가능한 ‘이용 장소’일 뿐인가?”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이러하다. “강정의 구럼비는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서든, 자연 풍광 감상을 위해서든 평가되는 가치만큼 적절히 이용하면 그만인 ‘이용 장소’일 뿐인가?” 위에서 언급한 국가주의 사상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이에게 이러한 질문은 도대체가 질문해볼 필요가 없는 질문일 것이다. 그 사람에게 이 질문은 ‘사과는 인간더러 먹으라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맹랑한 질문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오직 이 유용성의 눈으로 자연생태계를 보는 습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만 비로소 새로운 생태평화적 문명을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강정 구럼비가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곳이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관자에게, 방문자에게 제공하기 때문인 것인가? 우리는 단호히 아니라고 답변해야 한다.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동물-생명체로서 생명과 생명의 순환적 관계의 법리를, ‘여생즉오생(네가 살고 그리하여 내가 삶)’의 생명의 철리를 파지하고, 그러한 앎을 바탕으로 생태환경을 지각, 이해, 인지하는 일을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야만 비로소 자연을 이용 대상화하는 일의 자기 파괴적 성질이, 그 위험성이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물론 생태평화적 감성과 태도에서 유독 한국인만이 뒤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는 한국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 파괴를 경제 성장의 근본적 필요 요소로 삼아온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익숙한 그 모든 이들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주의’가 사회의 문화 기풍이 되어버린 사회인 한국에서 생태평화적 감성/가치관의 너른 확산은 (그렇지 않은 다른 사회보다 훨씬 더) 어렵고 또 중대하다. 강정은 이 확산의 기폭제가 되어야 한다.

  간신히 구럼비에 찾아든 박도현 수사(예수회)가 대자연 앞에 큰절을 올리고 있다. [출처: 진달래산천]

강정 해군기지, ‘과거 VS 미래’의 대치

종합하여 말하자면, 강정의 대치는 크게 보아 두 줄기 사상/세력의 대치다. 구시대적 정치 소통 방식을 고집하고, 국가주의의 강력한 실천자이며, 한미군사동맹을 국익 확보의 절대철칙으로 신봉하며, 생태평화 운운을 국익 신장, 경제 발전의 장애물일 뿐인 낭만적 태도로 일축하는 ‘국가주의자’들이 하나의 진영 아래 모여 있다.

물론 다른 진영에 있는 것은 보다 상식적인 정치 소통과 민주주의의 실현을 열망하고, ‘국민-피호출자’로서가 아니라 시민, 지역 주민으로서 몸을 움직이며,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과 군축을, 아니라 해도 적어도 전쟁 반대를 마음으로 소망하며, 생명에 대한 생명의 공명으로서 사태의 악화를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는 이들이다. 전자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과거이자 현 권력, 후자는 (그 나라의) 미래이자 비전인 바, 강정의 대치는 ‘과거 VS 미래’의 대치다.


덧붙이는 말

*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게재된 글입니다.
우석영(철학 연구자)_녹색정치 소식지 <하모니아>의 공동발행인이기도 하다. 연세 대학교, 시드니 대학교 대학원, 뉴사우스웨일즈 대학교 대학원을 유랑하며 사회학, 문학, 철학(세부전공: 창조성의 존재론) 분야를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 <낱말의 우주: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옮긴 책으로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살아 있는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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