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도 좋은 존재를 만드는 오늘

[기고] 언제까지 존재를 배제당한 김주영, 박지우를 만들 것인가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 지하실 단칸방에 어린 우리 둘이서 /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줄도 몰라 /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 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 나와(…) /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인지도 몰라 /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 여기저기 옮겨 붙고 훨~ 훨~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훨 /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우리들의 죽음, 정태춘)

  9일 보건복지부 앞에서 고 박지우 양 장례식이 열렸다. [출처: 비마이너]

지난 7일, 경기도 파주에서 부모가 일하러 나간 사이 발생한 화재로 뇌병변 1급 장애가 있는 남동생을 구하려다 중태에 빠져 치료를 받아오던 박지우 양(13살)이 끝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울 행당동에서 집에 불이 났지만 혼자서 휠체어를 타지 못해 5초면 뛰쳐나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운명을 달리 했던 고 김주영 씨가 떠난 지 꼭 1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9일 저녁께는 대구 수성구 한 빌라에서 암 수술로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던 60대 남성이 후천적 장애로 혼자서 앉아 있기조차 힘든 생활을 하다 ‘장애로 서럽다’는 유서를 남긴 채 목을 매었습니다. 정태춘 씨가 1990년대에 발표한 ‘우리들의 죽음’이란 노래가 다시 오버랩되는 기분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이 ‘존재할 권리’를 거부당했습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오는 것이 있어야 하는, 주어야 받을 수 있는. 권리보다는 의무를 강조하는 오늘날 ‘합리적인’ 사회에서 비극은 단순한 사고나 사건, 말하고 싶지 않은 악몽 정도로 간주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저주스러운 형국은 고단한 삶을 기계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선택한 ‘집단적 자메뷰(jamais vu, 실제로 잘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 경험하는 듯이 느끼는 기억 착각)’현상일 수도 있겠습니다.

존재할 권리를 부정당한 자들과 그 부정에 대해 잊는 자들 사이에서 현 질서는 유지되어 왔습니다. 2005년 이맘때 무근육증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던 경남 함안의 40대 장애남성이 한파를 견디지 못한 수도배관이 터져 온 이불과 방바닥이 흥건히 젖자 그 자리에서 동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증장애인에 대한 활동보조제도의 필요성이 주장되었고, 장애인 당사자의 투쟁으로 2007년 정부는 이를 수용합니다.

하지만 장애등급기준으로 신청자격과 생활시간이 제한되고, 무소득자일지라도 자부담 비용을 내야하는 현재의 제도는 여전히 함안에서 사망한 조 모 씨의 죽음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조 씨는 ‘지체 5급’ 장애인이었습니다. 지금의 활동보조제도가 1급 장애인에게만 신청자격을 주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 씨에겐 지금도 그때도 변한 것은 없는 셈입니다.

모 언론은 24시간 활동보조지원을 요구하는 중증장애인들의 주장에 보건복지부 장애인서비스팀 관계자가 ‘예산문제가 간단치 않다’, ‘장애인에게 집중된 지원을 국민이 받아들이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여느 공무원이 하는 말처럼 매년 예산은 증가하고, 복지예산의 비중 역시 증가한다지만 쉽게 체감할 수 없다는 점과 예산편성의 우선순위 문제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공무원이 던진 질문은 우리에게 엄중하게 다가옵니다.

자격제한과 자부담을 없애는 문제와 함께 우리는 누군가에게 주고, 누군가에겐 주지 않는, 누군가에게 10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5만 주는 사회를 용인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답해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장애등급제가 없었다면, 활동보조서비스가 전면 보장되었다면 우리는 이 죽음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합리성과 예산 셈법 앞에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사회는 이렇게 암묵적으로 '필요한 존재'와 '필요하지 않은 존재' 혹은 '사라져도 좋은 존재'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가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그저 존재할 권리를 갖는 길은 무엇인지 고민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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