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지 않으면 판결문은 종이 쪼가리 일 뿐

[농성일기](2) 철탑농성, 계절이 세 번 바뀌었지만

2월 22일

2월이 한참 지나도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 만큼 긴장이 없고 나홀로 멘붕이었던 거다. 2월초에 있었던 윤주형 동지 장례식을 비롯한 설날이 지나고 여기 현대차지부 정규직 집행부도 자칭 민주노조라고 하면서 회사나 다를 게 없다. 월요일 간담회를 끝으로 특별교섭을 중단한단다. 우리가 요구하는 게 너무 무리수란다. 이거는 회사가 할 소린데 그것도 노동조합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우리의 적은 누구인지 막강한 자본에게 원하청이 공동으로 한목소리를 내도 모자랄 판에 한편 생각하면 열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권에 너무 오래있었던 관료인가 보다. 억울하게 죽은 주검을 앞에 두고 같이 원한을 풀자고 투쟁하자고 했다면, 10년간 피 터지게 싸워 온 비정규직의 손을 잡고 한번 제대로 싸워 보자고 했다면, 지금 이런 상실감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뒤에서는 마치 ‘열심히 했는데 우리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런 말이나 하지 말지. 우리가 10년 동안 지켜온 조합깃발이다. 항상 열악한 상황에서 싸워 온 터라 그다지 실망도 없다.

겨울이 가고 이제 봄의 문턱에 들어섰다. 거기에 나의 긴장감도 풀렸는지 나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이상하던 나의 턱은 오늘에서야 탈이 나고 말았다. 입을 벌리면 두개골 연결 부분이 아프다. 거기에 두통까지 정말 미칠 지경이다. 그 덕분에 옆에 있는 병승이 형만 나 때문에 아침부터 고생이 많았다. 의사 선생님한테 전화하고, 그 처방으로 약사 선생님께 전화하고 그리고, 해고자 동지들에게까지 전화해서 약은 내 손에 들어 왔다. 내가 직접적인 표현은 못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말해야 됐건만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모성애의 본능을 느꼈다. 이틀 전에 속이 안 좋아 새벽마다 설사로 고통을 느낄 때, 나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냥 흐르는 시간에게 맡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많은 신세를 지는데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형님, 고맙고 미안하고, 형님을 우상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어요’ 나중에는 이 말을 꼭 해줘야겠다.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다. 신경이 거슬린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더 오기가 생긴다. 내일이면 다시 벌떡 일어나리라. 오늘까지만 환자고 내일부터는 농성자로 다시 돌아가리라. 맛있는 음식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렇지만 입을 확 벌리지 못해서 그림의 떡이다.


2월 25일

5년을 오로지 희생으로만 보낸 세월. 재벌에게는 특혜를 노동자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어디 이뿐이랴. 기업가 대통령, 온갖 구설수에 오르면서 임기를 마감한 5년 동안 삽질한 대통령, 마지막까지 열심히 일했다는 대통령이 오늘부로 민간인이 되고, 오늘은 여성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5년간 이끌어 갈 18대 대통령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33년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간다는 언론 보도는 순간 내 머릿속을 섬뜩하게 했다.

나는 박정희 시대에 어리기만 했기에 사실은 잘 모른다. 성장과정에서도 훌륭한 대통령으로만 역사에도 나오던 대통령의 환상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깨지게 된다. 그의 화려하고 웅장함속에 희생당한 국민들이 얼마인지 독재자 딸로서 정치권에서 많은 극찬을 받아온 그 딸이 바로 지금 우리 국정을 짊어지고 갈 대통령이라니...겉으로 봐도 독종같이 생겼다. 미래 전망은 길거리에서 5년을 싸워야 한다니... 아휴~ 안 보인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고통과 희생이 따라야 할지, 한숨부터 나오는 하루다.

저녁 집회가 끝나고 어머니께서 전화가 오셨다. 고생한 김에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나를 달래 주신다. 분명 오늘취임식에서 비정규직 문제 임기 내 해결하겠다는 뉴스를 보신 듯하다. 말대로 설움받는 비정규직의 문제 해결 해주면 더 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해를 넘기고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않은가. 무슨 뜻으로 정리하겠다 말했는지 모르겠다. 선거 후보자 시절에 내뱉은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어떻게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건지, 전혀 믿음이 안 간다. 공공은 그렇다치고 민간기업 규제도 못하고 오히려 재벌에게 놀아나는 정부가 과연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을까. 기대하지 말자. 정부가 정리해 주길 바라면서 우리 싸움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다. 우리는 이미 대법에서 불법파견이라 판정했고 구파견법에 따라 2년이 경과한 시점부터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판결이 있다. 이걸 지키려고 잃었던 것도 참 많았다

대통령이 누가 됐든 나의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만불평만 있다고 이 썩어 빠진 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뭉쳐 행동할 때만이 이 세상은 조금씩 바뀌지 않겠는가. 이걸 짧은 시간이지만 지금 서서히 내가 느끼고 있다. 절대로 가만히 있는 자에게 무엇을 주지 않는다. 이 무엇을 얻기 위해 많은 행동들을 해야 한다. 그걸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2월 28일

벌써 2월의 마지막 날이다. 바람은 마냥 따뜻한 봄날이다. 날씨가 나른해서 그런지 낮에 잠밖에 오질 않는다. 2005년 대우 창원공장에 노동부가 불법파견 판정을 하고 우리 현대차와 달리 검사가 벌금 700만원 약식 기소를 한다. 회사가 다시 정식재판 청구를 해 오늘에서야 대법원에서 다시 우리 노동자편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렸다. 여기에는 의장, 비의장 심지어 물류까지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한 것이다. 지금 계류 중인 아산지회판결도 이 영향에 준하는 판결이 나올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좋은 판결을 받아 놓고 싸울 당사자들이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다.

지금 금속노조창원 비정규직지회는 사고 처리되어 있는 지회다. 이제까지 회사는 김앤장이라는 대형 로펌회사를 이용해 불법파견이라는 말을 피해가기 위해 온갖 갖은 술수를 다 부렸다. 불법파견이 의심되는 자리에 대량으로 신규채용하고 거기 빠진 자리에는 촉탁직을 투입하고 또 공정분리를 지금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에 있을 집단소송판결 1심판결에 증거인멸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오늘을 계기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판결을 받고 행동하지 않으면 그냥 판결문 몇 장에 불과한 것이다. 대법판결의 가치를 지키려면 우리는 또 머리띠를 동여 메고 우리말이라고는 들어 주지도 않는 거대한 자본과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또 얼마의 긴 시간을 끌어야 할 지 미지수다. 그렇지만 우리가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낸다면 충분히 해볼만한 싸움이고 승산있는 싸움이다. 나도 조합원들에게 버티기만 하면 우린 이길 수 있을 거라 얘기 했고 또 다른 확신을 오늘 다시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이제 흩어진 현장 차근차근 조직해서 앞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3월 3일

이제 완전한 봄이다. 햇살은 따갑기만 하다. 봄기운 덕분에 자주 씻지 못한 나의 몸은 가렵다. 일주일에 한번 씻기 때문이다 잠시 휴전하고 따뜻한 탕에 들어가서 때 불려서 시원하게 때 밀고 싶다. 금요일이 3.1절이라서 4일을 쉰 거 같다. 황금연휴란 단어가 여기서도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이야. 그 덕분에 낮잠도 자고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내일부터 아침 출투가 없어지고 오후 출투로 바뀌는데 여기에 대비해 아침에 늦잠도 자뒀다.

근데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쌍차 대한문 분향소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나서 천막 1동이 전소됐다고 그런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다지만 하마터면 사람이 다칠 뻔 했다. 24명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누가 그런 사람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걸까? 이명박 대통령 취임하자마자 남대문이 화재로 전소되고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2주 만에 또다시 문화재가 한줌의 재로 변할뻔 했다. 까딱하다간 ‘함께 살자 농성촌’이 모든 범죄를 뒤집어 쓸 지경이다.

대한문 분향소는 24시간 경찰이 상주하고 있는데 방화범도 잡지 못하는 우리나라 경찰들 현실이다. 그러면서 힘없는 자들에게만 법의 잣대를 들이 대는 경찰, 서글픈 대한민국 현실이다. 엊그제는 3.1절이었지만 여기서 보이는 아파트에는 태극기 게양한 집을 못본 거 같다. 한심한 경찰들아, 노동자 감시하지 말고 구멍 난 민생치안이나 신경 쓰자.

오늘은 3월 3일 삼겹살데이란다. 누가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지금 축산농가 농민들은 돼지를 도축하지도 키우지도 못한단다. 그런데 아직까지 소비자 물가는 삼겹살 값이 부담 된다. 이따가 밑에서는 삼겹살 파티를 한단다. 당연히 우리에게도 할당량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해빠지는 저녁이 기대된다. 삼겹살에는 소주가 있어야하나 여기 특성상 삼겹살만 먹을 수 있는 행운이 어디냐. 날씨는 얄밉게도 좋기만 하다. 조금 있으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이 피겠지. 앙상하기만 했던 나뭇가지에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겠지. 그런 장면을 여기서 지켜봐야 한다니...에휴~~

3월 10일

3월도 어느덧 2주가 흘렀다. 저번 주부터 시작된 주간연속2교대도 많은 무리수가 있었지만 여기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있는가 보다. 어느덧 150일이 다 돼간다. 시간도 참 빠르다. 그 와중에 아직 우리의 성과는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 장기간 싸움에 해고자들도 생계에 많이 힘든가보다. 어느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이 싸움 선봉에서 이끌었던 동지들인데 근데 최근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해고자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자 다시 업체 복귀한다는 얘기다. 그러고 몇몇 동지들은 생계투쟁을 하고 있다. 지도부로서 해고자들 안정적인 생활임금을 지급해야 되는데 조합 재정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맘에 많이 걸린다. 한달 50만원~평균임금을 받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준 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업체 개별복직 건으로 논의를 한다니 물론 생계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걸 가지고 입도 못 대겠다. 나의 입장은 이 싸움 마무리할 때 한꺼번에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입장이다. 안에서 이걸 지켜보는 조합원들은 이 싸움 끝났다 생각할까봐 그게 제일 두려운 면이다. 이걸로 인해서 진짜 고생한 조합원들끼리 서로 등 돌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려고 해도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다. 우리 싸움이 소강상태였던 건 사실이다. 공장안에서도 뭔가 만들어서 싸움을 한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어제 한 동지랑 통화하면서 들어가고 싶단다. 근데 여기 철탑을 두고 들어가도 되겠냐고 되레 나한테 묻는다. 난 내 눈치 보지 말고 들어가라 했다. 이걸로 사람들 사이에서 벽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 했다. 그러고 오늘 또 해고되기 전 같은 업체에서 일하던 형이 이번 신규채용에 응시해서 정규직이 됐다고 오늘 전화가 와서 미안하다고 한다. 난 또다시 그렇게 생각 말고 앞으로 마주쳐도 원수가 아닌 아는 척하고 연락하면서 지내자 했다. 끊고 보니 내가 참 속 좋은 놈이구나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옥도 하고 싶었거늘...

기분도 가라앉는다. 다 잘되자고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김빠지지 말자. 의봉아 굳세어라 의봉아... 이 싸움 이겨서 사람다운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

3월 15일

진짜 따사로운 봄 날씨다. 어제까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만 이제야 구름 한 점 없는 진정한 봄 날씨다. 이제 조금 있으면 거리에는 온통 꽃들로 활개를 칠 생각하니 야속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연인들끼리 팔짱껴가면서 꽃구경 다닐 텐데 부럽기도 한 계절이다. 여기 올라와서 벌써 3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고 오늘이 150일차다. 좁은 공간에서 5개월이나 버텼을 생각에 내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엊그제는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께서 전화가 오셨다. 전주택시노동자들이 69일 농성 끝에 내려 왔다고 하니 어머니는 여기도 무슨 성과 없냐고 물으신다. 그리고 어머니한테 우리 상대는 현대차 정몽구라 했다. 어머니도 하루아침에 성과 날 리 없겠지만 그래도 전화를 하시면 좋은 소식 없냐고 형식적으로나마 물어보시는 어머니 마음을 알 것 같다. 한번은 이런 얘기를 하셨다. 부모는 100살 먹어도 자식 걱정한다고.

그리고 오늘 쌍차 고공농성자 3명중에 1분의 동지가 건강악화로 내려오신다는 얘기를 카톡 대화방에서 봤다. 겨울 내내 추위와 싸워야 했고 자기 자신과 끈질긴 싸움이었다. 거기는 영하 20도를 넘나든 추위에서 100일이라는 시간 동안 버텼으니 몸이 고장 안나면 사람이 아닐 거다. 빨리 내려가서 병원 치료 후 밑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죽지 않고 살아서 싸우려고 내려 보낸다고 한다. 이게 대한민국 노동자 현실이다.

이제 울산도 5달을 여기 있었던 터라 몸이 서서히 말을 듣질 않는다. 운동부족에다 서서히 밀려오는 봄기운의 긴장감까지 풀어져서일까? 다행히 내일 지회에서 의료진들을 올려서 건강상태를 체크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의료진들이 할 수 있는 건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피 뽑고 형식적인 것밖에 할 수 없다. 의료진들이 와서 치료가 기다려지는 게 아니고 사람들 왕래가 합법적으로 이뤄지는 게 기다려진다. 밑에서만 본 동지들을 잠깐의 시간이나마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게 최고의 힐링이다. 이시간은 이산가족 상봉이나 한 듯 말이다. 그런데 한 번씩 올라왔다 가면 그 허전함은 며칠을 가는데 그런데도 사람들 정이 기다려지는 건 뭘까?

3월 18일


어제 저녁부터 내린 봄비는 하마터면 5개월간 우리 보금자리를 물바다로 만들 뻔 했다. 사건의 전말은 새벽에 자는데 병승이 형이 부르길래 꿈에서 부르는 줄 알았다. 세 번째 부를 때야 꿈이 아니란 걸 알고 일어나서 나가보니 위에 햇빛 가리개 천막에 물이 고여 병승이 형 천막을 누르고 있었던 터라 병승이 형은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진짜 조금만 늦었으면 철탑 이재민이 될 뻔했다. 물이 얼마나 많이 차있던지 나의 힘으로 도저히 들리지가 않았다. 바로 옆에 보이는 칼로 천막을 잡아 째도 고인 물은 엄청났다. 세숫대야로 거짓말 좀 보태서 100번은 퍼낸 거 같아 물을 다 퍼내고 나니 온몸에 기운이 쪽 빠지고 말았다. 주변을 보니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어둑한 새벽인데 벌써부터 출근하는 차들로 분주해보였다. 그때 시간이 새벽 5시 50분, 생각해보니 이 시간에 여기 도착하려면 새벽 4시에나 일어나야 할 법한 시간인데 주간연속2교대가 아니고 사람잡는 2교대인 거 같다. 그건 그렇고 물 퍼낼 때 비를 잠깐 맞았는데 어느덧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것 같아 다시 침낭 안으로 들어가 아직 덜 잔 잠을 청해 본다. 잠깐 눈 붙혔다 생각했는데 아침 7시 50분이였다. 불과 2시간 전 일이었는데 아침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바람은 쌀쌀했지만 구름사이로 비친 햇살은 따사로웠다.

점심을 먹기 전에 뉴스 기사를 보니 울산공장장이 담화문을 발표했다. 비정규직의 교섭틀은 열려 있다고 했고 해고자들은 생계를 위해 업체에 복직시키고 이후 신규채용에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참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뭔가 발등에 붙이 떨어졌나. 작년 교섭이후로 중지된 교섭을 하자는 건 동의하나 지들 밑패는 다 깔고 우리 보고 또 그걸로 교섭하자고 구걸하다니 그렇지만 우린 신규채용을 받을 거면 작년 8월에 정리했을 터다. 아직까지 정신줄 놓고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네.

오후 집회가 끝나갈 무렵 공장 담벼락을 보니 벚꽃이 피고 있었다. 여기서 꽃이라고는 누가 올려놓은 꽃 사진 감상하는 거 밖에 없었는데 실제로 내 눈으로 꽃을 보다니... 한편 꽃이 현대차 공장 안에 있어서 꽃이 이쁘다는 느낌이 안 들고 저렇게 사악한 땅에서도 꽃이 피는 구나 그냥 그 정도 느낌.

그리고 뉴스기사를 보는데 현대기아 노무총괄 부회장 김억조가 사퇴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주간연속 2교대와 비정규직문제 때문이란다. 우리가 그냥 싸운 게 아니고 잘 싸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원 한명을 내려 앉혔으니. 그리고 낮에 담화문의 주인공은 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울산공장에 남는 단다. 노무총괄부회장직은 없어졌다나. 그럼 그렇지, 뭔가 있기 때문에 담화문을 내고 쌩쇼를 했구나. 그럼 담화문에 나와 있던 신규채용을 밀어붙일 게 뻔한 거다. 작년부터 신규채용에 혈안이 돼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지건만 내 마음도 굳건히 끝까지 가자고 다짐을 해 본다. 절대로 정규직은 그냥 주지 않으리. 우리의 피나는 노력 끝에 정규직의 열매가 열리지 않을까 싶다. 누웠는데 미친놈마냥 왜 자꾸 웃음이 날까! 우리 싸움 때문에 부회장 날아갔다 생각하니 어릴적 말로 꼬시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정몽구가 경영권에서 물러날 날을 기대하며 내일부터 또 머리띠 동여매고 싸워야 하느니라...

3월 20일

어제 중노위에서 다시한번 우리가 직접교섭을 요구하는 게 생떼가 아니란 걸 다시한번 입증하는 판정이 있었다. 50개 업체 423명 중 32개 업체 267명을 불법파견이라고 판정한 것이다. 이제는 우리가 명분 또한 확실히 생긴 것이다. 엊그제 윤갑한 사장이 담화문을 발표해 해고자들 생계운운하면서 업체복직을 하라고 한 것은 중노위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 회사는 ‘한명의 판결’이라는 말로 대법판결을 국한시켜 나가고 있었다. 과연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 동지들은 너무 잘 알고 있다. 8년의 법정 투쟁 끝에 유전자검사에서 진정한 사장은 정몽구란 걸 이제 다시 일어서서 반격을 준비해야 한다.

이 판결도 우리가 행동하지 않으면 그냥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물론 회사도 이번 중노위판정으로 쉽게 우리를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을 거다. 우리도 마냥 허무한 세월만 보내지 않을 거고 투쟁으로 쟁취할 거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정한 싸움이라 볼 수 있다. 하청 바지사장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집에 갈 날 얼마 남지 않았으니...

오늘이 춘분이란다. 절기상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다고. 이제 몸 챙기는 운동 좀 해야겠다. 장기간고공농성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는 동지들이 늘어가고 있다. 오늘 농성중이였던 홍종인 유성지회 지회장님도 151의 숫자로 농성을 마무리하셨다. 빠른 시일 내에 건강회복 하셔서 이제는 밑에서 당차게 투쟁을 하셨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항상 그러신다. 싸우려 해도 건강해야 싸운다고. 그리고 밥 꼭 챙겨 먹으라고... 더워지면 운동도 못하니 지금부터라도 조그마한 운동이라도 해야겠다. 이제까지 내가 게을러서 운동을 못 했던 거다. 여기서의 운동은 또 하나의 투쟁인 것이다. 그런데 봄날의 밤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춥다. 그래서 천막구석에 뒹굴던 방한복을 다시 꺼내 입어야 했다.

오늘 70만 민주노총을 이끌 임원선거가 있었는데 두 후보자 모두 과반을 넘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 민주노총이 이렇게 잠깐 머뭇하는 사이 정부와 자본은 우리의 틈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다. 빨리 민주노총이 노동자를 대변하는 노총이 되었음 한다. 정권과 자본에게 빼앗겼던 지난 날을 다시한번 투쟁으로 우리가 살아 있는 노동자란 것을 확실히 보여 줘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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