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촛불, 국정조사라는 보를 허물고 민주주의의 수문을 열자

[기고] ‘예상’할 수 있는 촛불은 촛불이 아니다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전국 288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의혹 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시국회의)는 지난 10일 서울광장에서 '제6차 범국민 촛불대회'를 열고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지고, 새누리당이 국정조사를 방해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서울광장에는 시민 5만여 명이 든 촛불로 가득 찼으며, 이날 서울 이외에도 부산, 대구 등 전국 5곳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모두 약 10여만 명이 모였다고 시국회의는 밝혔다.

  지난 10일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에서 열린 7차 시국대회 [출처: 뉴스민]

국정조사가 촛불의 근본적 요구가 될 수 있는가?

그러나 광장의 촛불은 여전히 여야 국정조사 샅바 다툼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다. 야권은 사태의 본질에는 접근하지도 못한 채 새누리당의 쥐었다 놨다 하는 식의 협상 전략에 말려, 울며 겨자 먹기 식의 국정조사가 오히려 촛불의 분노를 가중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그제야 민주당은 여론에 등 떠밀리듯 거리투쟁에 발을 담갔지만, ‘대선불복’이라는 새누리당 프레임에 눈치 보고 있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는 선거 결과 승복의 전제조건인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애써 눈감으며 민주당의 장외투쟁을 야당의 대선불복으로 굳히면서 역공세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지난 18대 대선이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 경찰청 등 국가기관이 새누리당 정권연장을 위해 조직적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해 여당에 협력한 부정선거라는 점에는 근본적으로 전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이것이 부정선거이기 때문에 선거 자체가 무효라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대선에 대한 선거무효 소송을 내지 않았고,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불복의 태도조차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있다.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사실에 몸이 달아야 하는 것은 정작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이지만, 민주당은 거리투쟁을 선언하고도 오히려 정부와 여당 눈치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10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시국대회에 앞서 민주주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 촉구 국민보고대회를 열었다. [출처: 민주당]

대선불복이라는 새누리당의 공세에 대선불복은 절대 아니라는 민주당. 여론이 자신에게 악화하지 않는 적절한 수준에서 여야합의를 원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당이 요구하는 국정조사가 국정원의 대선개입이라는 사실관계를 얼마만큼 규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촛불의 투쟁 성과를 민주당의 국정조사의 성과로 가두어 둘 수는 없다. 국정조사가 촛불 시위의 요구 중 하나일 수 있으나, 국정조사 그 자체가 촛불의 요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촛불은 애초부터 민주당을 넘어서야 한다. 더 많은 요구와 더 많은 권리는 촛불 그 자체 투쟁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정원이 중립적일 수 있는가?

촛불은 국정원이 선거에 직접 개입해 민주주의가 유린당하였다며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중립적이어야 할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본질적인 문제인가?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 그 이름은 변해왔지만,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수사할 권리를 부여받은 국정원이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다.

그동안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권력은 노동자민중의 삶의 요구와 행동을 잠재우고자 온갖 폭력과 탄압을 저질렀다. 집회현장, 인터넷, 사람의 터전에서 정치권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감시를 강화하고, 연행하고, 구속하는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민주주의와 인권 투쟁의 성과를 한순간에 되돌리고, 파괴하고, 억눌러 왔다.

그래서 빙산의 일각처럼 지난 대선과정에서 직접적 선거개입이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개입 행위는 밝혀졌지만, 노동자민중을 감시하고 억압해왔다는 넓은 의미의 정치개입 베일은 아직 씌워져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동안 국정원은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여론을 잠재우고, 반값등록금 투쟁 확산을 차단하려 했고, KEC·발레오만도·상신 브레이크·유성기업 등 금속노조 핵심사업장에 대한 노조파괴 시나리오에도 개입한 사실 말이다.

국정조사 결과와 정치권의 국정원 개혁논의가 조삼모사라면 과장일까? 민중의 삶을 억압하고 개입해 온 국정원은 즉각 해체되어야 한다.

시민의 직접적 표현으로서 촛불

촛불은 타오르고 있지만, 아직 역동적이지 못하다. 촛불은 스스로 분노와 요구에 근거하여야 한다. 촛불은 더 이상 여야의 국정조사라는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촛불의 요구는 다양하게 확장되어야 하며, 그 다양성의 토대 위에 촛불 스스로 집단 토론과 성찰 속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직접행동』의 저자 카터는 “직접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력화(empowerment) 효과를 경험”한다고 말한다. “직접행동을 가담하는 이들이 공개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냄으로써 자부심과 존엄감을 얻을 수 있고,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으며 타인과 연대감을 고양시킨다”는 것이다. 촛불 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담은 넓은 자원’이다. 카터는 직접행동이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며 항의 행동이 집단적인 의사결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남아프리카 일부 타운십의 사례,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의 지역사회 협의체의 예를 든다.

촛불은 ‘민주공화국’의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국가의 주권을 누가 갖고 있고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실천하고 있다. 국회가 시민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촛불 스스로 민주주의 질서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와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리는 중요한 인권의 내용이기도 하다. 정부, 국회와 같은 대의민주주의 장치가 더는 시민의 의사를 대표하지 못할 때,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언론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 시민들이 직접 의사를 표현하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이며 인권이다.

현재 촛불 시위가 4.19혁명과 5.18 광주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 그리고 가까이는 지난 광우병쇠고기 촛불집회 등과 흔히 비교되는 것도 민주주의의 역사적 현장 속에 항상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와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밀어붙이는 건강한 힘은 결국 시민의 직접적인 참여와 의사 표현에 있다. 촛불의 힘은 의회 질서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의사표현으로 새롭게 ‘요구가 정치화’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촛불의 주인은 여야도 아닌 시민 자신의 권리의식이다.

촛불은 스스로 해답을 구해야 한다

이제 촛불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변해서는 안 될 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본질적 성격에 바탕을 두면서도 급격하게 변해 나가는 시대와 현실을 파악하고, 변해서는 안 될 가치와 희망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리고 발전적으로 실현할 것인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고 후자는 새로운 노력과 고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촛불의 요구는 다양할 수 있다. 국정원의 개혁 혹은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에서부터 애초부터 선거 자체가 부정이니 재선이 불가피하다는 입장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다양한 요구가 다양하게 녹아들고 또, 재조직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정 세력 혹은 특정 정당의 요구가 일반화되고 다른 입장이 ‘문제시’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 요구가 단일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광장에 닫힌 촛불, 저들이 보기에 촛불의 방향이 빤히 보이는 촛불을 저들은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상을 뛰어넘는 촛불, 광장을 뛰어넘어 민주주의 상상력의 동인이 되는 촛불은 당장의 숫자타령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촛불은 여전히 촛불 시위의 프로그램을 어떻게 세련되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눈덩이를 굴리듯 갇히지 않고 거리에서 광장에서 활보하면서 역동해야 한다. 전진하고 폭발하는 가운데 희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촛불은 스스로 해답을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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