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과 통신의 기계적 결합에 대한 적응 혹은 커뮤니케이션의 미래에 대한 설계
우선, 그동안의 융합 관련 논의는 방송, 통신, 영화, 융합 서비스 등 다양한 미디어의 총체적 변화를 포착하며 미디어의 미래상을 적극적으로 구상해가며 적절한 정책 목표를 설정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방통 융합’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방송과 통신이라는 두 개 영역만의 통합, 더 좁게는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양대 기구 간의 이해 조정을 둘러싼 논쟁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융합기구는 이런 제한된 인식의 연장선에서 구성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한 논의 틀은 근본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 융합은 방송과 통신의 대립과 융합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현실의 변화에 대한 대응이 부처 및 기구의 이해 조정만으로 제한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비록 그동안 강력한 논의 주체들이 논쟁을 이끌며 각자의 담론을 각자의 미디어를 통해서 확산해왔기에 우리는 쉽게 이 논의구도를 빠져나오기 어렵지만, 미디어융합 시대 기구 개편의 문제는 기구가 주체가 되어 논쟁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구조 전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총체적 기획이라는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문제는 적응이 아니라 기획이고, 기술 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미디어 환경의 문제점을 해결하며 나아가 그 잠재력을 어떤 방향으로 실현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의 확인과 새로운 실천의 모색이 필요하다.
기술적 교체를 넘어서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총체적 ‘변화’의 구상
우선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 전환의 경우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듯 각각의 미디어들은 총체적으로 혁신되고 있다. 제작의 시스템, 전송의 시스템, 수용의 시스템을 포괄하는 모든 하드웨어는 교체되어야 하며 전송에 사용되는 주파수 역시 전면적으로 재편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 선택이 나온다.
한 가지 선택은 기존의 아날로그 방송 시스템의 기본적 질서를 크게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다시 말하면 기득권을 보장하는 수준에서, 혹은 올드 미디어적 상상력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선에서) 신호의 기술적 성격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선택은 어차피 모든 시스템을 혁신하는 마당에 기존의 시스템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화하지 못했던 요소들을 포괄시키고, 특히 기존 시스템이 수립된 이후 발생한 다른 변화들 혹은 심지어 수립되었을 때 이미 존재했지만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화들을 반영하고, 아울러 앞으로의 변화에 대한 전망에 기초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에 기초한 구상을 새로운 시스템에 포괄시키는 것이다.
현실은 전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후자를 모색해야 한다. 좀 더 설명하자면, 전통적인 규제 및 진흥의 체계는 산업상의 변화만을 반영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기존 체계는 그것이 수립된 이후 진행된 다른 변화들 혹은 심지어 수립되었을 때 이미 존재했지만 미처 고려하지 못한 변화들, 예컨대 모든 사회구성원이 수동적인 수용자의 위치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생산자이자 참여자로 전환되면서 벌어진 미디어 생산과 수용 시스템의 변화, 그리고 이미 80년대부터 주류 미디어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해서 존재해온 전업적 독립 제작 주체의 성장 등과 같은 다양한 변화 역시 온전하게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접근의 프레임워크는 융합 현상 자체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반영했어야 하는 변화, 그리고 반영해야 할 변화를 모두 포괄하는 총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융합기구 법제의 첫머리에서도 언급되는 미디어의 공공적 지향은 방송의 공공적 규제와 통신의 보편적 서비스라는 전통적 가치의 기계적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가치 체계 내에서 정확히 설명되거나 부각되지 못한 것까지를 종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방송통신 융합이 아니라, 미디어 융합
‘융합’ (Convergence) 상황은 총체적이다. 예를 들어 윈도우간의 홀드백을 기초로 지난 20년간 정착되어온 영상콘텐츠의 재생산 구조는 이제 기술적 변화 및 그를 반영하는 산업상의 변화에 따른 멀티플랫폼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 동일한 콘텐츠는 재판매될 뿐만 아니라 동시 판매되며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플랫폼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소비되고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 왜 ‘미디어’ 융합이 아니고 ‘방통’ 융합일까 ? 비록 방송과 통신의 경계 파괴가 융합 상황의 주요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왜 방송과 통신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일까? 답변은 간단하다. 방통융합이 아니라 미디어 융합이 현실의 변화이고, 그러니 기구의 재편은 당연히 미디어 융합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체적인 정책 목표에 대한 재검토, 공공성, 콘텐츠 등 핵심 개념의 재규정, 미디어 분류 기준의 재설정 등 논의의 기초를 만들어가기 위한 개념적 검토를 할 필요가 있으며, 산업진흥으로만 제한되지 않는 만화, 영화, 방송, 통신 등의 영역을 아우르는 커뮤니케이션 구조 전반의 발전에 대한 기획이 시도되어야 한다.
종합하자면, 현존하는 커뮤니케이션 구조 및 그 구조와 관련된 진흥과 규제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 해석에 기초해서 총체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바람직한 발전 전망을 설정하는 것, 그것이 융합 기구 개편을 고민하는 기본적 프레임이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논의를 활성화
사실 현재의 암울한 상황이 초래된 데는 비판적이며 생산적인 논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한 미디어 운동 주체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물론, 융합이 경계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미디어 운동은 미디어 융합 시대 이전부터 경계를 파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주류 미디어가 방송―영화―정보통신―신문 등 콘텐츠의 기호적 차이, 기술적 차이, 생산과 소비의 순환구조의 차이, 소유주체의 차이에 따라 자신의 진지를 구축하고 서로 경쟁하거나 혹은 적대적으로 합병해왔다면, 미디어 운동은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며 경계를 넘는 연대를 이루어냈으며 그런 점에서 융합의 맹아를 벌써부터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각 영역은 나름대로의 성과와 한계를 지니면서 80년대 이후 해당 미디어 영역에서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통하며 대안적, 민주적 공간을 확대해 나갔고, 동시에 해당 미디어의 구조를 규정하는 각종 법제와 관련된 이슈와 관련된 특정 정책에 저항하거나 특정 정책을 위해 투쟁하며 나름대로의 성과를 쌓아왔다. 그동안 법제 및 정책에 대한 개입은 모든 미디어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융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독립적 영상운동―정보통신운동―언론개혁운동 등으로 분별 정립되어 있던 미디어 운동이 미처 종합적 의제와 정책 및 규제/ 진흥 기구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 이전에, 이전의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서비스(IPTV)와 이전의 조직 체계를 파괴하는 새로운 기구(융합 기구)에 관한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면서, 연대와 기획의 한계가 마침내 드러나고 만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 새로운 상황은 아니다. 지난 10여 년간 미디어 운동을 포함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비록 군부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며 민주적 법제를 도입하긴 했지만―의미 있는 사회적 의제를 앞서서 제기하기 보다는 ‘대안 없음’을 강변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담론과 그 집행에 대해 ‘대응’을 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미디어 융합과 관련된 상황이 지금까지의 미디어 구조와 비교할 때 결코 쉽지 않은 조건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디어 융합 상황은 미디어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배경으로 하기에 그 변화의 속도가 빠르며, 그 연구 및 정책 입안의 주도권을 자본이 쥐고 있기에 개입이 쉽지 않고, 투자 유치와 경쟁을 위한 담론이 워낙 지배적인 까닭에 과장과 전문용어로 범벅이 되어있어 평범한 시민은 둘째 치고 전통적 미디어에 익숙한 이들조차도 그 온전한 이해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악조건은 그동안 여지없이 현실을 규정했다. 미디어 융합 상황이 법제 및 규제기구의 수준에서 공식화된 2007년, IPTV와 융합기구라는 현재 미디어 융합상황의 양대 이슈에 대한 미디어운동의 준비 정도는 현실의 필요성에 비해 턱없이 모자람이 입증된 것이다.
따라서 지난 10여 년간 빠른 속도로 성장한 시민사회 및 일반 이용자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것, 융합시대의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변화, 참여적 미디어의 확대 상황에서 미디어 그 자체에 대한 담론을 진정 쌍방향적으로 변화시킴으로서 집단적이면서 민주적인 지식생산의 메커니즘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제부터라도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고민과 제안, 그리고 정책결정기구의 개방적 태도가 전제되는 새로운 역학관계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동시에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그러한 소통과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의 구성이며, 다른 하나는 논의를 위한 출발점으로서의 융합기구의 정책목표와 그를 구현하기 위한 조직적 체계에 대한 제안이다. 여기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하자.
미래를 위한 선택 : 구상과 제안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 우선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식을 견지하면서 현실을 다시 살펴보자.
새롭게 구성된 융합위원회가 과연 보다 민주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만들어가는 데 얼마나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현재 확정된 조직체계는 양 조직을 기계적으로 통합하는 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그동안 관할 부서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이른바 융합 미디어를 관장하기 위해 일단 두 개의 기구를 묶어놓은 것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포괄적 비전과 그를 현실화하기 위한 계획은 아직 제출된 바가 없다. 물론 현재는 과도기의 상황이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내용이 채워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고 이러한 내용이 내부의 동력에 의해 제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의 출발점은 기구 외부에서 찾아야 할텐데 그것 역시 만만치 않다.
그동안 미디어 공공성 보장과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미디어 운동 진영은 최근의 기구 융합 상황에서 위원회의 독립성 확보, 위원장 선임 등과 관련하여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해왔고 여전히 하고 있지만, 그 역시 포괄적인 융합 기구의 정책 목표 및 그에 걸맞는 조직체계에 대한 적극적인 제안과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만일 지금 그러한 적극적인 구상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러한 문제의식이 반영되지 않은 채 만들어진 위원회 조직의 정책기획과 집행의 결과에만 대응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조직의 목표와 조직체계에 대한 개입과 제안이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제안의 내용을 제한하는 것이다. 원인에 대한 개입 없이 결과에 대해 싸우는 것, 항의는 익숙하지만 제안은 부족한 것, 이런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방송통신위원회 조직도 [출처: 방송통신위원회 홈페이지] |
이것은 그러한 제안을 만들기만 하면 그것이 100%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그러한 제안은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를 넘어설 수 있는 현실적 힘을 가지기 힘들며 다른 한편으로는 제안 역시 정보와 연구의 한계에 갇혀있기 때문에 검증되고 보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의 한계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지금과 다른 커뮤니케이션 구조, 미디어 질서를 만들어가는 실천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논의를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위해 기구가 필요한 것이고, 최소한의 변화와 최대한의 변화는 무엇인지 말이다.
토론을 위한 가설 1 : 융합기구의 정책 목표
토론의 활성화를 위한 한 가지 가설이 최근 출간된 보고서 『미디어 융합 시대, 어떤 미래를 그릴 것인가』에 실려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보고서를 참조하도록 하고, 여기서는 그 제안의 핵심 내용을 요약해보기로 한다.
우선 미디어 융합 기구의 최고 정책 목표는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그러한 가치 지향을 통해서 보장되어야 할 권리(들)의 결합이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욱 민주적인 소통을 확장해가기 위해 지향해야 할 가치가 지극히 추상적인 ‘공공성’ 담론을 넘어서서 구체화되어야 하며, 아울러 그러한 가치 지향을 통해 확보되고 확장되어야 할 사회 구성원 전체의 커뮤니케이션 관련 권리들이 마찬가지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가 없는 전자는 삶을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지표를 상실한 채 시스템의 전환만을 고집하는 뿌리 없는 관료주의로 흐를 수 있으며, 전자가 없는 후자는 권리의 보장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시스템의 구상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할 것이다.
토론을 위한 가설 2 : 3대 기초 영역
다음으로, 미디어 진흥과 규제의 가장 기초적인 구분 범주가 무엇인가가 결정되어야 한다. 기존의 미디어 정책은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의 구분, 네트워크―플랫폼―콘텐츠의 구분, 방송-사적 통신-융합미디어의 구분 등을 중심으로 논의되어왔다. 그 결과 총체적 시스템의 소비자이자 비판적 개입 주체이며 이제는 콘텐츠 생산주체로 성장하고 있는 광범위한 이용자의 커뮤니케이션 참여 및 아래로부터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는 언제나 부차적인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며 그 결과 관련 구조/제도/활동은 종합적인 정책 프레임에 포착되지 않은 채 한편으로는 시청자 혹은 이용자의 권리라는 최고 의제로 추상화되어 구체적 정책으로 구현되지 못하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예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미 진행된 변화, 그리고 진행 중이며 더욱 확장될 변화를 반영해야 할 융합 기구의 역할을 올바르게 설정하기 위해서는 정책 대상의 영역을 새롭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미디어정책의 기본적 범주는 전통적 구분 범주인 공영 미디어와 민영 미디어라는 2대 범주를 중심으로 (기술적 차이에 따른 전통적인 수직적 규제의 틀은 융합상황에 맞지 않는다) 하되, 이에 덧붙여 공동체에 의해 소유 운영되는 미디어 및 소유 운영 구조에 의한 구분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참여적 자율적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포괄하는 개념인 공공 미디어를 별도로 정책 범주화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선 네트워크 및 플랫폼의 소유구조 및 목표의 차별성에 기초해서 공영 미디어 영역과 민영 미디어 영역(상업 미디어 영역)이 구분될 수 있으며, 공공적 지향과 커뮤니케이션 권리 보장이라는 최상위 정책 목표를 이용자 및 비영리적 콘텐츠 생산주체 및 플랫폼의 활성화를 통해 구현하는 공공 미디어 영역을 제3의 영역으로 설정한다. 여기서 공영 미디어 영역은 PSP, 즉 공공 서비스 플랫폼 (Public service platform)의 의미에 가깝다. 모든 미디어가 사회적 공론장의 일부라는 점에서 모든 미디어는 공공적 가치 지향과 커뮤니케이션 권리 보장을 위한 규제와 진흥의 대상이지만, 특히 모든 지상파 방송 및 공적 지원을 받는 플랫폼 및 네트워크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미디어라는 점에서 이를 광의의 공영 미디어로 규정하고 진흥과 규제를 차별화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커뮤니케이션 구조의 총체적 발전 전망에 기초하여 진흥과 규제의 정책과 집행을 담당할 융합 기구는 기본적으로는 공공적 가치를 최고 의제로 삼으면서도, 동시에 미디어의 생산과 소통의 주체에 있어서 사회문화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영역과 산업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영역 모두를 관장해야 한다는 임무를 지닌다. 여기서 공영 미디어 및 공공 미디어 영역이 전자의 경우라면, 기업 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민영 미디어가 후자에 해당한다.
토론을 위한 가설 3 : 진흥의 분화와 규제의 통합
조직 내부 구성의 핵심 방향은 진흥의 분화와 규제의 통합이다. 진흥 기능은 네트워크 및 플랫폼의 소유구조 및 목표의 차별성에 기초해서 구분되는 양대 영역인 공영 미디어 진흥 영역과 민영 미디어 진흥 영역, 그리고 공공적 지향과 커뮤니케이션 권리 보장이라는 최상위 정책 목표를 이용자 및 비영리적 콘텐츠 생산주체 및 플랫폼의 활성화를 통해 구현하는 공공 미디어 진흥 영역의 3대 영역으로 구분한다. 반면에 규제 기능은 자원 관리의 측면을 포함하여 일원화된 체계를 수립하며, 개인정보보호 및 내용규제 부분은 각 영역의 독자적 성격을 고려하여 별도의 민간위원회로 구성한다.
여기서 규제의 일원화 및 진흥의 삼원화 배경은 다음과 같다. 규제 기능은 플랫폼, 네트워크, 콘텐츠 각 영역 내의 제한된 자원의 분배 및 보편적 질서의 수립과 차별적 규제라는 종합적 기능이라는 점에서 일원화된 통합적 정책 입안, 집행 체계를 필요로 한다. 규제관리 부서의 주요 기능은 시장 규제, 자원 관리 규제 및 공공 미디어 영역 진흥을 위한 규제 등을 포괄한다. 진흥 기능을 규제와 진흥이 구분되는 수준과 동일한 수준에서 다시 구분한 것은 각 진흥 영역이 최상위 추상 수준에서는 동일한 정책 목표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구체적인 정책 목표에서는 배타적이기도 하며(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미디어 vs. 비영리 미디어) 혹은 동일한 정책 목표를 상이한 방법으로(상업적 지향을 배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공영방송과 같은 대의제적 미디어 시스템과 직접 참여 방송 시스템은 미디어 재현의 메커니즘이 전혀 다르다)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진흥 영역의 담당 주체는 여타 진흥 주체와 규제의 프레임에는 합의하되 진흥의 프레임은 독립적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각 진흥 영역의 정책 목표는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민영 미디어 진흥 영역은 경제적 가치, 산업적 가치에 상대적으로 우선순위를 부여하며,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한 공정경쟁을 보장하고 이를 기초로 고용을 확대하는 것을 정책 목표로 지닌다. 공영 미디어 진흥 영역은 사회문화적 가치에 상대적으로 우선순위를 부여하며, 비영리적 주체인 공영방송 및 기타 공익적 성격의 네트워크, 플랫폼 및 콘텐츠가 진흥 대상으로서, 공론장의 구현, 다양한 이해관계의 통합 및 차별화, 사회적 의제 설정 등을 정책 목표로 가진다. 공공 미디어 진흥 영역은 비영리 참여적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활성화를 통해서 사회문화적 가치를 구현하며, 이용자 및 비영리적 콘텐츠 생산주체의 자기표현과 참여를 보장하는 네트워크, 콘텐츠 및 플랫폼의 활성화를 통한 공론장의 확장, 각종 커뮤니케이션 권리들의 보장에 그 정책 목표가 있다.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그동안 ‘시청자 지원’이라는 개념으로 축소되어 있었거나 혹은 산업적 가치와 사회문화적 가치의 갈등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져 온, 그러나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에 따라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공공 미디어 영역이, 공공적 가치의 지향과 미디어 기본권 확장이라는 최고 의제를 사회문화적 가치에 집중하여 현실에서 구현해온 참여적, 민주적 미디어 활성화를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직 체계의 최상위 구분 범주의 하나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을 위한 가설 4 : 공공미디어 진흥 부문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정책 범주로서 아직 제대로 정의된 바 없는 공공미디어 진흥부문을 좀 더 살펴본다면, 우선 그 정체성은 사회문화적 가치 구현에 초점을 맞추어, 참여적 미디어 진흥을 통한 공공성 강화 및 커뮤니케이션 권리 보장이 그 정책 목표이다. 그리고 이 진흥부문이 포괄해야 할 주요 사업 영역은 아래와 같다.
①공공적 콘텐츠 진흥 = 퍼블릭 액세스 + 독립제작
다양한 주체 및 콘텐츠의 표현과 소통을 보장하는 퍼블릭 액세스 활성화 및 기존의 외주 정책과 달리 콘텐츠의 내용과 형식의 실험적, 비판적 성격에 주목하는 독립제작부문의 활성화
②미디어교육 진흥
미디어 리터러시를 증진시키며 아울러 모든 미디어 영역에서 활동할 콘텐츠 생산 및 소비의 주체를 교육하는 시스템인 미디어 교육의 활성화, 공공 미디어 전 영역을 지원하는 지역 인프라인 지역영상미디어센터의 활성화
③공공적 플랫폼 진흥
각종 공공적 콘텐츠를 활성화하는 모든 플랫폼, 곧 공동체라디오, 공동체TV, 비영리인터넷 플랫폼, 퍼블릭 액세스 플랫폼의 활성화
④보편적 서비스 보장
이용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한 수신환경 개선, 단말기 등 하드웨어 보급, 자막 및 화면해설 서비스 지원, 사회 각 계급계층별 조건에 적합한 각종 정책의 개발과 집행
⑤이용자 권익보호
이용자 불만처리, 이용자 운동 지원, 콘텐츠의 공정 사용 보장, 대안 라이선스 채택 (접근, 이용 및 재배포) 을 통한 정보 공유의 활성화, 공공 아카이브 지원 및 설립 등 미디어 융합 시대 콘텐츠 생산과 수용 주체로서의 시민을 가리키는 ‘이용자’의 권익을 보호
⑥공공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진흥
FOSS(Free and open source software) 개발 및 지원, 범용 STB, 저가 라디오 송출 시스템, 온라인 멀티미디어 공유 시스템 등 공공 미디어 활성화를 위한 하드웨어 개발 및 지원
기구의 역할에 따른 구성개념도 : ‘진흥의 분화’와 ‘규제의 통합’
[출처: 『미디어 융합 시대, 어떤 미래를 그릴 것인가』, p. 130] |
늦었지만 올바르게
간단히 요약해본 이러한 새로운 제안은 더 많은 토론과 비판적 검증 보완이 필요로 한다. 고려해야 할 것도 많고, 많은 실천가들과 연구자들의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두 가지 한계만 지적해보자. 우선 여기서 제안된 내용 중 예를 들어 ‘공공미디어’ 영역은 그 표현 자체가 마치 이 영역만 공공적 성격을 지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다분하며 이 미디어 영역이 지니는 자율적, 참여적 성격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전반적인 체계에 있어서 최고 정책 목표와 진흥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진흥의 정책 내용 역시 네트워크-콘텐츠-플랫폼을 아우르며 전반적인 매체 영역에서 얼마나 보편적인 내용이 적용가능하며 각 매체별로는 어떤 차별화된 내용이 필요한가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예를 들어 그동안 선형적 편성 원리에 기초하여 구성된 방송 시스템에서 발전한 퍼블릭 액세스의 개념이 각종 미디어 영역에서 어떻게 확대되어야 하는지 그 구체적 내용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맥락에서,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사용되어온 정책 용어 역시 다시 규정될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대표적인 개념 중 한 예는 콘텐츠이다. ‘콘텐츠’라는 용어는 미디어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재의 추세에서 그 기술적 차이와 장르적 차이를 넘어설 수 있는 효율적인 개념이나, 그동안 산업적 가치 혹은 상품 가치 측면에서만 해석됨으로써 시장 영역과 비시장 영역에 대한 종합적 이해라는 문제의식에 걸맞지 않게 오용되어온 바 있다. 따라서 장르적 차이뿐만 아니라 콘텐츠 생산 주체 및 콘텐츠의 사회적 문화적 성격을 동시에 반영하는 비영리적, 공공적 성격의(그동안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콘텐츠로 포괄되지 않은) 콘텐츠를 포괄하는 새로운 개념 설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개념의 종합과 구분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실험적, 비판적, 대안적 콘텐츠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단기적 이윤 획득에 집중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시장의 실패를 낳게 되는 근시안적 산업 활성화 정책을 장기적 산업 발전 전략으로 변화시킬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아래로부터의 논의를 조직하고, 현장과 집중된 논의 체계간의 새로운 관계를 통해서 명제를 수정하고 그럼으로써 전체 미디어 운동이 합의하는 명제들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 없이 운동의 발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압축된 명제가 없으면 목표가 혼란스럽고 역량은 분산된다. 압축된 명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공유되고 현장으로부터 확인되고 인증되고 수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허구일 뿐이다.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력에 기반 한 기획과 논의의 조직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