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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78호 Me,Dear] 제주 TV에서 제주 방언을 들을 수 있는 날

[편집자 주] ‘Me,Dear’은 78호부터 신설된 코너로, 일상에서 느낀 미디어와 관련된 소소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미디어에 대한 나의 단상이나 인상을 담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Me,Dear를 통해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박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의 편집위원으로 다른 분들과 함께 발행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이제 대학교를 졸업(해야)할 때가 되어서 그동안 밀린 공부를 몰아쳐서 하고 있다. 대부분의 시간을 전공인 인류학 공부에 투자하고 있는데, 인류학은 미디어운동과 전혀 관련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몇 년 간의 대학생활을 하면서 인류학의 관점이 미디어운동에 통찰을 주는 측면이 많다고 느껴왔다. 특히 이번에 <민속학> 수업을 들으며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민속학과 미디어운동이라? 얼핏 들어선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한번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민속학 수업을 하시던 중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제주 방언이 점점 쓰이지 않고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이것을 지켜내야 하는가?” 우리에겐 표준어가 존재한다. ‘표준’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중심’과 ‘보편’이다. 나머지는 곁다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곁다리인 방언을 지키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제주 방언이 사라져간다고 하더라도 당장 우리가 그것을 지켜내야 할 만한 어떤 명분이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것이 합리적이고 실용적인지,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왠지 탐탁지 않다. 우리들은 잠시 침묵했다. 위와 같은 혼란스러운 자기인식이 바로 그 이유일 것이다.

몇몇 학생들이 침묵을 깨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제주 방언을 연구적인 차원에서 보존해야한다는 학생도 있었고, 언어의 다양성이 가지는 장점에 대하여 얘기한 학생도 있었다. 내 관점은 조금 달랐다. 언어는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는 쓰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 제주 방언이 사라져가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 쓰이지 않는가? 그것은 제주 중심으로 삶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젠 과거와는 달리 제주 사람이 제주를 중심으로 생활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구하러, 자녀 교육 때문에, 서울로, 서울로, 옮겨간다. 대한민국의 땅은 광활하지만 모든 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제주 사람이 제주를 중심으로 생활할 수 없다면, 제주 방언이 지켜진다 한들 박제화 된 형태일 것이다. 따라서 언어 그 자체만을 보존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제주인들의 삶과 공동체를 복원하고 그것들을 자율적으로 지탱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제주 방언이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 쓰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즉, 방언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하나의 현상이며, 그 지역에 기반 한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보았다.

선생님은 내 의견을 듣고, 다시 질문하셨다. “그렇다면... 앞으로 제주 TV에서는 모두 제주 방언을 쓰도록 한다면, 이건 어떤가?” 그 질문에 그 자리에서 직접 대답하진 못했다. 왜냐면 제주 TV에서 일률적으로 제주 방언을 쓰도록 한다는 것은 너무 강제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크게 놀랐던 점은, 바로 민속학의 질문이 미디어운동의 질문과도 통해있다는 지점이었다.

한번 생각해보자. 지역 방송국들이 통폐합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그리고 지역 방송국에서 표준말로 전해주는 서울의 소식들... 이것은 서울이 보편이며, 서울말이 표준이라는 전제 위에서 가능하다. 보편은 이곳저곳에 침투하고 있다. 소위 대중매체라는 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감수성, 교양, 욕망까지 표준화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나 일정수준의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웃음을 가져다주는 스타MC가 채널을 점령할수록 지역MC의 일자리는 점점 사라져간다. 이것은 단지 ‘재미’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역의 자치, 자립과 지역성의 문제이다. 확장된 보편은 더 큰 효용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반드시 다른 부분의 위축이라는 비용을 치른다.

민속학에서 전통을 지켜야한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고리타분하기만한 얘기가 아니다. 전통은 지역 공동체가 결속되고, 거기서 삶이 지속적으로 영위될 때 자연스럽게 계승될 수 있다. 전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지역에서의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위치해 있다. 지역 TV에서 지역의 방언이 아무 거리낌 없이 쓰이는 날이 언젠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정책적으로 도입한다고 해봐야 일단 지역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들 서울만 바라보고 있다면, 지역 TV가 어떤 의미를 갖고 다가올 수 있을까. 방언 그 자체보다도 앞서는 것은 그 지역에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나는 미디어운동에 있어서도 바로 이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지역 미디어를 살리는 것, 지역의 이슈를 알리는 것 그 자체만이 목적이 될 수가 없다. 지역 미디어운동은 지역의 공동체 그리고 삶의 보전과 함께 가야할 것이다. 지금 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미디어운동들의 이념에 주목하자. 모든 것을 표준화하는 세상과 보편이 누리는 권위를 거부하는 것, 스스로가 발 딛고 있고 실제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이 중심이 되는 것, 지역이 더 이상 ‘주변’으로 남지 않게 되는 것... 이러한 생각들이 여물어 싹을 틔울 언젠가, 제주 TV에서 제주 방언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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