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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3호 기획] 미디어운동, 10년을 논하다 : (2) 미디어센터

대담: 김명준(미디액트 소장) + 박수정(부천영상미디어센터 교육팀)

[편집자 주] 이 대담은 미디어운동 10년을 돌아보는 기획의 일환으로 지난 10년간의 미디어운동 역사를 분야별로 훑어보는 것이 그 주요 골자입니다. 하지만, 이 기획은 지난 역사를 소개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미디어운동을 둘러싼 각 분야의 선배들과 후배들의 만남을 통해 과거와 미래의 고리를 연결해보고, 선배들이 보는 후배들의 현재 활동, 후배들이 바라보는 선배들의 지난 역사까지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첫 번째 대담은 독립다큐멘터리 분야의 선배 김동원 감독과 후배 홍효은 감독의 만남이었으며, 이번 대담은 미디어센터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기 위해 김명준 미디액트 소장과 박수정 부천영상미디어센터 교육팀원의 대담으로 부천영상미디어센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수정: 제가 대학 다닐 때, ‘언론운동과 대안미디어’라는 소장님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 제가 진짜 많이 졸았거든요. (웃음) 학기가 끝나고 제가 감사했다고 메일을 쓰니까, 소장님이 뭐라고 답장 주셨는지 기억나세요?

명준: 아니. 뭐라고 했는데?

수정: 매일 졸았으면서 기억나는 게 있기나 하냐고.

명준: 맞아. 수정이가 1학기 때는 많이 졸았어. 그것도 항상 맨 앞에 앉아서. (일동 웃음)

수정: 초반에는 수업이 어렵게 느껴져서 그랬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중에 ‘청개구리’ 활동을 시작 하면서 수업 내용에 관심이 많이 생기기 시작했고, 복학하고 나서는 아주 열심히 수업을 들었죠. 제가 반장도 했었잖아요.

명준: 그랬지. 이번 학기 수업에도 청개구리 친구들이 많더라고.

수정: 청개구리가 만들어지고 자리를 잡는 데 소장님께서 도움을 아주 많이 주셨죠. 이름도 바꿔 주셨잖아요. 원래는 대안언론동아리였는데, 소장님께서 언론보다는 미디어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서 대안미디어동아리로 바꿨었거든요. 또, 여름이면 캠프를 했는데, 소장님께서 연결을 해주셔서 미디어센터, 공동체 라디오, 울산사내방송, 민주노총 등에 가서 자기도 하고 그랬죠. 한동안은 청개구리가 정말 잘 나갔었어요. 사람도 많이 모이고.

명준: 그 뒤로는 좀 침체되었던 것 같아. 대표가 학생회장 되서 사고를 좀 치면서. (웃음)

수정: 제가 많이 졸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소장님 수업은 그 해의 그 시점의 사안들을 바로바로 수업시간에 이야기해주셔서 좋았어요. 관련 영상도 많이 보여주셨고, 특히 기억나는 게 베네수엘라의 민중혁명을 다룬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라는 다큐멘터리였는데, 그 영상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휴학하고 남미에 다녀와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얄라셩’에서 미디액트까지

수정: 소장님은 어떻게 처음 미디어 운동을 시작하시게 됐나요? ‘얄라셩’에서 활동하셨단 얘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명준: 이거 워낙 옛날 얘기라 (한숨) 얄라셩에서 활동을 시작한 게 내가 대학교 2학년 때니까 어휴, 벌써 30년 전이네. 그 때 나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그냥 하도 심심해 하니까 큰 형(김홍준 감독)이 자기 서클에서 한 번 같이 활동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해서 시작하게 됐지.

수정: 얄라셩이면 청개구리와 비슷한 모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청개구리는 미디액트 같은 곳이 멘토 역할을 해주면서 정말 큰 도움을 받았었는데 당시에도 그런 곳이 있었나요?

명준: 그 때만 해도 대학교 영화서클이라곤 얄라셩 하나밖에 없을 때였고, 우리를 이끌어 줄 선배들도 별로 없었어. 내 윗세대 선배들은 내가 얄라셩을 시작했을 때 쯤, 전부 다 서클을 나가서 ‘서울영상집단(이하 서영집)’을 만들었거든. 그래서 얄라셩에 남은 사람들 중엔 결과적으로 내가 제일 선배가 됐고, 당시에 나와 상당히 친했던 김인수 선배(현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는 서클을 나간 사람들 중 막내 격이였어. 선배들 작업하면 우리 둘이서 뒤치다꺼리를 많이 했었던 기억이 나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 나는 선배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거나 그러지는 못했던 것 같고, 계속 자력갱생하면서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수정: 이끌어주는 선배들이 없었다니 많이 힘드셨겠어요.

명준: 워낙 초기였던 영화/영상 운동의 특수성 때문이었겠지만, 정파운동이나 노동조합 운동 진영에서도 우리를 지도하거나 이끌어줄 역량이 없었어. 나는 그런 상황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기 보다는 장단점이 있었다고 보는데, 장점이라면 운동의 관행이나 관습에 별로 얽매일 필요가 없었던 점, 그리고 역사적 한계가 분명한 정파의 지도에 의해 속박당할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판단하면서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 단점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 속 에서 스스로 헤쳐 나가며 왔기 때문에 현재 후배들이 겪는 어려움이나 그들의 메커니즘, 생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야.

수정: 영화운동이나 영상운동이라는 개념이 당시에는 상당히 생소했나 봐요?

명준: 그랬지. 당시에 영화는 사회적으로도 그랬지만 운동적으로도 딴따라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주변에 운동하는 친구들은 우리를 변방의 아이들 취급을 하곤 했었어. 당시 운동권이라는 게 지하조직이었던 탓에 오히려 관료적 성격이 강한 측면이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한테는 고급 정보 같은 건 잘 안주고 그랬어. 그 때 내가 쓴 글들을 보면 “영화도 운동이 될 수 있어요.” 라는 읍소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지. (웃음)

수정: ‘노동자뉴스제작단(이하 노뉴단)’의 초기 멤버이기도 하시죠? 학교를 졸업하시고 나서 바로 노뉴단 활동을 시작하신 건가요?

명준: 그 전에 군대를 갔다 왔지. 난 87년을 군대에서 보낸 케이스인데, 당시에 운동권들은 군대 내에 스터디를 조직해서 의식화 교육을 하곤 했었어. 나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우리끼리라도 군대문화를 민주화해보자는 차원으로 우리 내무반에 구타 없애기 정도의 활동은 했었지. 제대하고 나서 89년인가에 노뉴단 일을 시작했는데, 노동운동에는 관심을 쭉 가지고는 있었지만 꼭 영상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건 아니었어. 그래서 노뉴단을 시작하자는 제의가 왔을 때, 거의 한 달 정도를 도망다녔지(웃음). 내가 원래 특별히 “이거 아니면 안 돼!” 하는 식으로 세게 뭔가를 고집하는 스타일이 아니야. 축구하고 낚시를 빼면 좋아하는 것도 별로 없고.

수정: 얄라셩, 서영집, 노뉴단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90년대 중반까지 오셨는데 당시에 소장님과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분들은 이후에 각자 행보가 많이 달랐죠?

명준: 아까 얘기했던 서영집의 김인수 선배와는 특히 친했고 지금은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이 된 김의석 감독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30년 넘게 세월이 흘러 현재 도달한 각자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좀 재미있는 것 같아. 특히 90년대 초반에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지식인 운동이 붕괴되면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이 싹 다 빠져나가게 됐는데, 그렇게 한동안 침체기를 겪다가 95년쯤부터 영화 운동하던 사람들이 문화산업 쪽으로 대거 이동을 시작했지. 물론 개중엔 벤처기업을 한다던지 정치권으로 간다던지 심지어 다단계(!)사업을 벌인 사람도 있었지만, 기존 활동의 연장을 꾀한 친구들 중 많은 수는 당시에 충무로로 진출했고, 지금 한국 영화산업의 힘 있는 존재로 성장한 경우가 많았어. 나는 이런 상황이 기록되고 분석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그 세대들의 활약이 지금도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더 그렇지. 한국의 영화산업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재편의 과정 속에 있었고 80년대 운동권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이러한 인적구성이 주류영화계 내부에 일정한 비판의 흐름들 을 만들어내는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연구해볼 필요가 있을 거야.

수정: 미디어센터와 관련해서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셨나요?

명준: 나는 90년대 초중반을 노뉴단 활동과 영화잡지 ‘키노’를 병행하면서 보냈는데, 92년 이후로는 제작 쪽에는 완전히 손을 떼고 주로 한국의 영상/미디어 운동의 전략적 변화와 관련된 초점들, 즉 표현의 자유, 퍼블릭액세스,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 정보통신미디어를 포함한 새로운 융합상황의 등장 등을 정리하는 데 주력했지. 미디어센터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아이디어는 노동운동의 경험에서 출발한 건데, 노뉴 단이나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미디어교육을 하면서 느낀 인상적인 경험들과 국제적인 사례들을 보면서 미디어교육을 위한 인프라가 우리도 가능하겠구나 하고 생각한 거지. 미디어센터를 보는 흔한 시선들 중에 하나는 미디어센 터는 제도적인 거다, 운동이라고 볼 수도 없다는 시각인데 난 그런 생각들은 되게 단선적이라고 생각해. 미디어센터가 출발한 최초의 계기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표현의 자유를 중심으로 제도적 영역을 둘러싼 싸움을 해왔던 80,90년대의 상황이 90년대 후반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는 변화로 넘어가면서, 기존운동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되 제도적 형식을 갖추고 공적 지원을 끌어들여 할 수 있는 새로운 운동의 영역/프로젝트들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했던 거고, 그 중에 여러 가지를 고민해보다가 미디어센터를 선택했던 거지.

수정: 굳이 미디어센터였던 이유가 있다면 뭐였나요? 공동체 방송국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명준: 그렇지. 참 역사라는 게 우연과 필연으로 점철되어 있는 건데.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내가 공동체 라디오를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그 때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 아무도 관심이 없었거든. 국민주방송의 경우도 결국 AFKN 채널 환수에는 실패했지 만, 국민주방송 운동에 정치적 힘을 좀 더 실어서 밀어붙였다면, 그래서 지역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 개국으로까지 이어졌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거야. 공동체 라디오 중심의 미디어센터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는 거지.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보면 미디어센터라는 모델이 한국에서 흔히 보는 부천영상미디어센터와 같은 것만 있는 건 아니거든. 가장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플랫폼/콘텐츠를 중심으로 미디어센터 역할을 하는 액세스 방송사니까.

수정: 현재의 미디어센터 모델이 탄생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명준: 또 이런 것도 있어. 처음에 ‘미디액트’의 공간으로 알아본 장소는 신사동에 있는 영화관이었어. 애초에 영진위의 계획은 미디어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을 하나의 공간 속에 두는 거였거든. 하지만, 그런 적당한 공간을 찾는 데는 결국 실패했고, 광화문에 있는 일민미술관 5층에 미디액트가 들어가게 됐지. 만약 그 때, 적당한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면 미디어센터는 복합상영관 형태의 모델로 계속 발전해 갔을 거야. 사실 광화문 공간도 영진위가 아니라 내가 직접 구한 건데, ‘주간동아’에 영화평을 썼던 인연으로 알고 지내던 분이 다큐멘터리 아카이브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한번 만나보러 일민미술관에 가봤더니 5층이 텅 비어있는 거야. 보니까, 층고가 낮아서 상영관을 설치할 수 없는 걸 빼고는 다 좋더라고. 그 점이 아쉽긴 했지만, 당시 워낙 공간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제안을 했지.

수정: 미디어센터에 상영관이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저희 부천센터는 상영관이 없어서 스튜디오에 청테이프로 천을 붙여서 상영관을 급조했거든요. 교육 결과물을 바로 바로 상영관이나 공동체 방송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명준: 사실 한국의 상황에서는 미디어센터와 방송 플랫폼, 상영관이 다 함께 붙어있는 형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해. 하지만 전술적으로 봤을 때, 이 모든 것이 함께 있으면 사실상 거대 권력이 되기 때문에, 미디어운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나 지역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위험할 수도 있어. 나는 이런 통합 모델에 대해서 그 동안 강력히 주장하지는 않았었는데, 서울에서는 우리가 일정한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미디액트를 만들다

수정: 미디액트가 광화문에 있을 당시, 미디액트는 미디어 활동을 하는 전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독보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도 미디액트에게서 도움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거든요. 미디액트를 설립/운영하면서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 힘들었던 점이 있다면 뭘까요?

명준: 글쎄,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데? 난 좋고 힘든 것에 대한 감각이 좀 무딘 것 같아. 남들은 고생한다고 힘들겠다고 하는데, 난 그냥 늘 무덤덤하고 “이거 때문에 요 새 너무 힘들어!” 그런 말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지금 뭐가 문제고 이걸 어떻게 해결하고 앞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가야겠다는 고민은 항상 있는데, 지금 뭐가 힘들고 뭐가 좋고 이런 프레임은 내 안에 없거든. 좀 비인간적인 면이 있나봐, 나는. (웃음) 그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정서적이고 감상적인 사람은 많으니까,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할거라고 자기 위안을 하곤 하지.

수정: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디어센터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를 때, 미디액트를 처음 만드신 거잖아요? 그래도 혼자 센터를 만드신 건 아닐 테고, 누구와 같이 어떻게 논의해서 미디어센터를 만들게 되셨고, 미디액트에 대한 최초 의 반응은 어땠는지 말씀해주세요.

명준: 당시에 노뉴단의 모든 구성원들이 미디어센터에 대해 공감했던 건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나 혼자 비밀리에 추진했던 건 물론 아니었고, 처음에는 노뉴단 내에 있었던 미디어운동 연구팀의 조두영이나 하주영, 정지연 등과 주로 논의를 했던 것 같아. 우리끼리 ‘프리즘’이라는 온라인 뉴스레터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미디어운동과 관련된 이론적 내용들, 공동체 방송의 해외사례들 등을 열심히 썼지. 당시에는 그런 내용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곳이 프리즘 하나였기 때문에 상당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 그러던 중에 영진위가 출범했는데, 영진위로부터 공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한국독립영회협회(이하 한독협) 정책위원회를 조직해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지. 거기에서 당시 문화학교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주훈(미디액트 사무국장)을 처음 만났어. 그 때, 같이 결합했던 사람들 중엔 이정훈도 있었고.

수정: 저희 팀장님이요? 당시에 팀장님이 어땠는지 더 말해주세요.

명준: 재미있는 얘기가 많지만, 그건 인터뷰 끝나고 개인적으로 하는 걸로 하고(웃음). 하여튼 당시에 한독협 정책위원회 차원에서 미디어센터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는데, 해결해야할 문제가 한 두 개가 아니었지. 한국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만들려다 보니까, 여러 사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고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었어. 우선적으로 미디어운동 진영 내에서 미디어센터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야 했는데, 미디어센터가 우리 운동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큰 차원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의 변혁 운동에 있어서 미디어센터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미디어센터의 재원, 서비스의 성격들, 아주 미시적으로는 얼마를 받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풀어야할 문제가 정말 복잡다단했어. 젊었으니까 했지,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 여기에다 우리는 영진위와 딜을 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지. 이 또한 격한 싸움과 화해와 논의의 연속이었고, 영진위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미디어 정책에서 미디어센터란 무엇인가라는 프레임도 만들어야만 했지. 여기에 임대 규정 등 세부적 운영 방침의 전략과 전술도 필요했고,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모일 것이며 어떻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해야했어.

수정: 큰 그림부터 작은 그림까지 정말 복잡했겠네요. 처음에 미디액트를 같이 시작한 분들은 누구누구였나요?

명준: 이주훈, 오정훈과는 미디어센터와 관련하여 쭉 같이 논의해왔기 때문에 미디액트도 같이 시작했고, 한겨레 출신의 이주영이 기획실장을 맡았어. 당시에는 여러 사정상 정책실이 없었는데 조동원이 정책 쪽 역할을 일정부분 하며 비공식적으로 결합했고, 이주훈과 친했던 고영재도 함께 하기로 했지. 우리를 보고 사람들이 미디어운동의 인재들은 다 모았다며 드림팀이라고 불렀어. 그러면서 꼭 한마디 붙였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모여서 일이 잘 될까? 다들 개성이 강하고 남의 밑에 가서 일할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수정: 서로 많이 싸우셨겠네요. (웃음)

명준: 미디액트에서 내 역할 중에 제일 중요한 게 그거였어. 이들의 지속적 상호투쟁(웃음)을 조정하고, 어떤 문제가 있으면 정리하고 가라앉히고. 이것이 사실상 나의 업무의 대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이런 건 좀 잘 했던 것 같 아. 술 취하면 맨 날 싸우고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 나가고, 그러면 내가 가서 데리고 들어오고. 다들 술꾼들이잖아.

수정: 그 때는 다들 젊으셨군요(일동 폭소).

명준: 뭐, 그렇게 내부적으로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사실 더 심각했던 건 외부 사람들로부터 이말 저말 많이 나오는 거였지. 대표적으로 나랏돈 받아서 맛이 갔네, 국가에 매수당한 전직 활동가가 됐네 하는 거. 당시 운동권에서는 정부의 지원 자체를 거부하는 흐름이 좀 있었거든. 그리고 미디어운동 내에서는 일정의 질투와 시기 같은 것들도 존재했지. 제일 가난하고 제일 빌빌대던 애들이 갑자기 광화문 한복판에 장비를 빵빵하게 갖추고 사업의 규모도 크게 벌이니까 그걸 고까운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던 거야. 어쩌다 실수라도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막 혼내려고 하고. 독립영화 쪽에서도 그런 시선들이 있었다고 보는데. 대표적인 이슈가 미디액트는 다큐멘터리 위주로만 지원해준다는 불만이었지. 그런데 당시에는 기술적으로 좀 특별한 상황이었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97년 총파업 이전만 해도,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 기술적인 지원이 절실했었어. 특히, 후반 작업의 편집시스템의 고화질 처리 같은 건 돈이 많이 들었지. 하지만, 미디액트가 설립되었을 때쯤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이미 그런 고화질 장비를 개인적으로 갖출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제작들을 도울 게 그렇게 많지 않았어. 하지만 극영화는 상대적으로 좀 더 고화질의 시스템을 많이 활용하다 보니까 극영화 제작자들은 미디액트의 고가의 장비들을 활용할 여지가 꽤 많았지.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소문은 미디액 트가 극영화를 홀대한다는 식으로 난거야. 그래서 다들 불러서 토론회를 해서 공개적으로 오해를 푸는 과정이 있기도 했지. 막상 얘기해보니까, 사실 근거를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하여튼 그런 내외부의 온갖 문제들을 정리하며 미디액트 초기를 보냈는데, 거기에다 마침 당시에 내 가정사적으로도 좀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기도 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꽤 힘들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보면 당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힘든 상황에 대해 무덤덤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수정: 제가 미디액트를 처음 만난 게 2005년쯤이었거든요. 그 때 저는 미디액트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이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명준: 미디액트가 만들어지고 한 3, 4년쯤 지나면서부터 외부의 그런 고까운 시선들은 많이 없어졌고, 나도 미디액트도 좀 여유가 생겼던 것 같아. 우리만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만큼 큰 문제없이 그 관계를 성장시켜 온 곳도 없지 않나 하는 자부심도 생기고.

미디어센터의 모델과 생존전략

수정: 미디어센터는 꼭 공적지원을 받아야만 할까요? 미디액트를 만들 때 시민기금을 받거나 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뭐에요?

명준: 물론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그런데 미디액트가 만들어질 당시만 해도 미디어센터를 건립하는 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어. 특히 부동산 문제가 있어서 그런데, 미국만 해도 공간 비용은 우리보다 훨씬 싸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거든. 게다가 당 시에는 장비도 지금보다 몇 배가 비쌌다고 보면 돼. 미디어에 대한 인식도 낮고 기술적 조건도 좋지 않고 거기다 한국에는 공적기금을 제외하고는 민간기금자체가 없는 상황이잖아? 사실은 독지가 하나만 있으면 해결될 문제긴 하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정말로 그런 경우도 많아. 미국의 어떤 활동가의 예가 있는데, 그 사람 이 어느 날 갑자기 거액의 유산을 받게 된 거야.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남겨준 거지. 그 돈을 가지고 이 활동가는 재단을 만들었는데, 자기는 거기에 손을 전혀 안대. 전문가에게 맡겨 버리고. 좋은 일에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 재산은 꼭 자기가 관리하려 하는 경우가 많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

수정: 다른 나라에는 미디어센터도 그런 케이스가 있나요?

명준: 그런 케이스가 있다기보다는, 해외의 미디어센터들은 민간재단기금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7,8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에 미디어센터들이 상당히 많이 늘어났는데, 거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포드재단’ 이야. 포드재단 하나가 미디어센터에 쓴 돈이 한국의 모든 미디어센터에 들어간 돈보다 훨씬 많다고. 포드재단은 쭉 미디어 인프라에 많은 기금을 투여해왔는데, 몇 년 전부터는 콘텐츠 지원으로 초점을 바꿔서 진보적인 독립영화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어. 그 돈만 해도 한국의 영진위가 하는 독립영화지원의 10배가 넘는 규모야. 뭐, 상대가 안 되는 거지.

수정: 왜 한국엔 기업들이 그런 재단기금을 안 만들까요?

명준: 다른 나라에서 기업들이 재단기금을 만드는 이유를 전략적으로 분석해보면 운동 내부를 분열시키기도 하고 전사회적 좌우담론을 일정하게 조정하기도 하고 혹은 급진적 세력들을 제도화시켜 버리기도 위한 목적으로 재단기금을 조성하는 거거든. 미국 같은 경우 20세기 초부터 악덕기업들이 이런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금들을 만들었다고. 그런데 한국의 기업들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전투에 이런 세련된 방식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정말 천박한 사고밖에는 하지를 못하지. 문화 사업한다고 미술품 사서 돈세탁이나 하고 있는 실정이니까. 오로지 세습을 위해서만 모든 이데올로기를 동원하고 있다고 할까. 어쨌든 해외 방식의 그런 민간재단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수정: 기업의 재단기금이 아닌 다른 기금은요?

명준: 국가의 공적 기금 같은 경우는 98년 이후에 한국에도 생겨나긴 했는데 지금 이 모습이 꼭 필연적인 모습일까에 대한 의문은 있지. 물론 좋은 의도로 생겨난 건 맞지만, 그 한계는 분명해. 특정 정당의 역사가 매우 길어서 정당 구조의 고착화가 오래 지속된 유럽의 경우에는, 특히 독일은 각 정당별로 그 비율에 따라서 재단들에 돈을 주고 그 설립자의 이름을 딴 재단들이 있다고. 하지만 한국은 그런 방식은 아니지. 또, 노동조합도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 통 움직이질 않고 있어. 나도 여러 차례 울산에 가서 지역의 노동조합들이 연대하여 미디어센터 같은 걸 만들어 판을 크게 키워야 한다고 설득을 했었어. 맨 날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싸우지 말고 이를 지역운동 차원으로 확대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다, 노동운동 내부에 활동가를 키우고 지역사회의 시민들을 위한 다른 모델의 사회운동을 벌이기 위해 쟁점들을 계속 방송 채널을 통해 알리고 지역 사회의 의견들을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몇 차례나 얘기했는데도 잘 먹히지는 않았지. 언론노조야 대안 미디어 관련해서 원래 너무 느린 곳이어서 이제야 <뉴스타파> 등으로 겨우 움직이는 상황이고.

수정: 그래도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 것 같아요. 공적 자원으로 한국의 미디어센터들이 급성장한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제약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명준: 공적 자원이 아니라 민간 자원으로 미디어센터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꼭 좋았을 거라고 보지는 않아. 민간 자원이란 건 사실 굉장히 불안정한 특성이 있거든. 미국의 경우, 민간기금이란 게 대부분 이자수입이야. 그러니까 금융자본이 공황에 빠지는 순간 기금이 확 줄어버린다고. 몇 년 전에 월가에서 금융위기가 왔을 때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이 NGO들의 스텝들이 한 순간에 일자리를 다 잃어버린 건데, 이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금융 자본의 독점에 저항해야 할 NGO들이 금융자본에 의해서 좌우되어 버리고 마는 상황이니까. 또, 거버넌스 시스템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제도 영역은 국가의 개입이란 문제가 있지만, 민간 영역의 경우는 재단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가 있지. 즉, 민간재단의 경우 급진적 운동에도 지원을 할 수 있지만 그 반대편인 우익조직의 싱크탱크에도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건데, 상황에 따라 그 쪽이 더 빨리 성장할 수도 있는 거야. 미디어센터를 예로 들면, 재단이 극단적으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상한 미디어센터들이 더 많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거지. 하지만, 국가는 평가의 시스템 등이 있어서 그렇게까지 특정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내세울 수는 없는 거거든. 그리고 이른바 일반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구성되는 조직 형식이 가지는 문제도 있어. 이를 테면, 협동조합의 경우 협동 조합의 회원들이 꼭 이성적 판단을 한다는 보장도 없을 뿐더러, 조합의 힘이 커지면 내부에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동을 하게 되어 있어. 파를 만들기 시작하고 이사진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계속 생길 수 있다고.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각각의 모델에는 고유의 딜레마가 모두 있다는 거지. 따라서 한국의 공공 영역이 여러 문제점을 안고는 있지만, 그건 당연한 거고, 아직은 이를 포기할 만큼의 치명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봐. 일단은 이 상황 속에서 최대한 승부를 보는 것 이 맞는 거지.

수정: 모델들이 다양해지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센터들이 있잖아요? 미디액트도 지금은 민간운영모델이니까요. 제가 부천센터에 있으면서 느낀 건, 아무래도 공공 모델이다 보니, 저와 우리 스텝들에게 미디어센터는 카메라를 무기로 활용하여 소수자의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싶은 곳인데, 시청에서는 단순히 우리를 기자재를 대여하는 도서관 정도로만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계속 마찰이 생기고 있고요. 그런 경험이 계속 쌓이다 보니, 다른 모델이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명준: 그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처음에는 다른 모델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고. 더 솔직히 얘기하면 우리의 바람에 비해서 지역 사회의 미디어 운동과 사회 운동의 성장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느렸다는 게 있어. 그리고 그러한 매우 열악한 상황 속에서 그 속도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는 판단을 했었던 거지. 센터가 지속적으로 굴러가려면 지역 미디어와 사회 운동의 힘들이 반드시 있어야 해. 영진위의 지원을 받던 미디액트도 다른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조건이 아주 이례적으로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어. 어차피 위탁이었고 언제라도 계약해지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 하지만 8년이나 미디액트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정치적 싸움의 결과였단 말이야. 제도 영역에서의 운동의 기본은 우선 첫 번째로 어떻게든 우리를 세력화해서 그들이 항상 우리를 긴장하고 바라보게 하는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 두 번째는 최고 전문가가 되는 거야. 운동하는 사람은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돼야 돼. 운동한다고 해서 도덕적인 우위만 믿고 전문성이 부족해도 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우리가 미디어센터를 하는 이상 기술적인 것, 영상 미학 등등 까지를 포함해서 다른 영역의 사람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 ‘압도적 우위’에 있어야만 버틸 수 있다고 봐. 이런 일을 하려면 그 정도 각오는 해야 된다는 거지.

수정: 하지만 그런 곳이 전국적으로 몇 곳이나 될까요? 미디액트 하나뿐일지도.

명준: 내 얘기는 그런 정도의 태도를 갖고 하는 게 맞다는 거야.

수정: 미디액트 같은 경우는 능력 있는 분들이 모여서 세팅된 것이지만, 모든 센터가 그럴 수는 없잖아요. 센터에서 일하게 된 새로운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재교육이랄지 그런 시스템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런 것 없이 무조건 성장이 더디다고만 하는 건 너무한 것 같아요.

명준: 물론 맞는 말이야. 하지만 나는 미디액트가 어느 정도 신화화된 측면이 있다고 봐. 마치 처음부터 우리에게 모든 게 주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굉장한 착각이야. 미디액트가 가지고 있었던 유리한 조건이 없었다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우리가 가졌던 좋은 조건의 수준에 비해서는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게 많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퇴보와 정체를 합리화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난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그렇게 자신 없이 일을 하면 이런 일을 어떻게 해? 최소한의 시야와 태도는 가지고 일을 해야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내용이 채워지는 거고.

수정: 미디액트는 최초의 미디어센터이다 보니, 전국적인 미디어 운동을 어떻게 해나갈까 이런 고민을 주로 했고, 저도 처음에는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지역에 와서 보니 어떻게 지역 미디어센터다운 미디어센터를 만들까를 더 고민하게 됐어요. 지역 안에서 사업은 열심히 하지만, 그 점에 대한 논의는 많이 부족한 것 같은데, 저희 스텝들이 사실 모두 부천 출신이 아니기도 하구요. 요즘은 지역다운 사업이 뭘까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명준: 그건 지역에서 만들어야겠지. 물론 미디액트도 나름대로 고민하겠지만 그건 지역에서 더 열심히 고민해야 돼. 거꾸로 우리에게 자기들이 개발한 내용들을 얘기해 줘야지. 한국의 지역 운동 자체가 워낙 열악하기 때문에 지역 미디어센터들로서는 물론 시작 단계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을 거라 생각해. 문제는 성장 속도인데, 현재의 조건만 가지고 불만만 제기하고 있어서는 안 되지.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우리가 버티는 동안에 지역에 활동가 100명만 키운다, 이 정도의 목표를 가지면 어떨까? 우리는 망해도 그들이 남으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거거든.

수정: 그래서 ‘돌아와 미디액트(이하 돌미)’의 활동이 요즘 생각이 많이 나요. 그 때는 그냥 그랬나 보다 싶었는데, 요즘엔 부천센터의 상황이 어렵다보니, 남 얘기 같지가 않더라고요. 우리를 지켜줄 사람은 우리가 남긴 사람밖에 없는 것 같아서 요즘에 부쩍 수강생들한테 잘해주고 있어요.(웃음)

명준: 그래, 사람을 키우고 모델을 만들고 문화를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해. 미디액트가 공모 탈락 이후 어려움을 겪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새로 센터를 세울 수 있었던 데에는 돌미에게서 받은 감동이 큰 부분을 차지해. 난 그 때 세상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꼈는데, 무언가의 노력들이 어딘가에서 결실을 맺고 그 영향을 서로 주고받는다는 거야. 돌미 활동을 한 사람들은 그냥 좋아서 한 거고, 그 활동들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계산하고 한 건 아니거든. 하지만 그런 활동들이 나에게 힘과 자부심을 주고 어디 가서도 매우 떳떳하게 우리를 지원해 달라고 얘기할 수 있게 만들었지. 그게 우리를 입증하는 거잖아. 우리가 잘 해 왔음을.

미디어센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

수정: 직원 워크숍으로 강릉시영상미디어센터에 다함께 가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갔더니 죽돌이, 죽순이가 많더라고요. 청소년들부터 아줌마들까지 하루 종일 센터에서 영화 보고, 스텝들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고, 학생들은 대학갈 때 추천서 써달라고 막 하는데 그게 정말 제일 부럽더라고요. 저도 제가 부천센터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많이 남기고 성장시키는 일을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실제로 센터에 와서 경험하면서 자기 주변사람들이 보이고 지역이 보이고 세상도 보인다는 사람들을 만날 때 정말 기쁘거든요.

명준: 그래, 그게 결국 미디어센터인 거지.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세상을 알아가고 새롭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제일 중요해. 그게 바로 임파워먼트인 거잖아.

수정: 그런데 그런 과정을 방해하는 외부요소들이 너무 많으니까 힘든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신기해요. 이 바닥에서 10년 이상 버티고 있는 분들을 보면. (웃음) 저도 이제는 미디액트가 저랑 청개구리를 많이 도와줬던 것처럼 후배들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후배를 성장시킨다는 게 정말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청개구리 후배들을 보면, 제가 볼 때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까 답답하기만 하거든요. 저도 분명 예전엔 그랬을 텐데, 그 때 허경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간사가 동아리에 자주 와서 저희 얘기를 잘 들어주고 조언해 주고 했던 것들이 얼마나 대단했던 건지 요즘에야 느끼고 있어요.

명준: 후배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밑에서 성장해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게 나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야. 나는 미디액트나나 한겨레에서 교육을 하면서 아마도 수천 명을 만났을 텐데, 내가 교육한 것도 있지만 그 사람들을 보면서 시대를 봐. 그렇게 상호작용하는 게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조직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교육 프로그 램이 필수적인 거지.

수정: 제가 처음에 공동체 미디어교육을 할 때는 사회 복지 차원에서만 접근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조건 다 해주면 좋은 줄 알았어요. 호두과자를 줘도 하나하나 다 포장을 하고 스티커 붙이고 해서 줬다니까요. 그런데 센터에서 활동한지 한 2년쯤 되다 보니까, 요새 드는 생각은 어떻게든 이 사람들을 일꾼으로 키워서 센터 죽돌이, 죽순이를 만들어야겠다고 하는 마음이 커요. 부천센터에서 다큐멘터리 수업을 들은 학교 후배가 학부에 독립 다큐멘터리 소모임을 만들기도 하고, 제작 과정을 들은 분들끼리 동아리를 만들어 이래저래 찍고 계신 걸 보고 있으면, 역시 제가 다 해드리는 게 전부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까지 애정도 많이 쏟아야 하고 손도 많이 가고 해서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명준: 요즘 고 김주영 활동가 생각을 많이 하는데, 주영이 생각을 하면 참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드는 것 같아. 주영이는 미디액트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정말 자주 와서 만나고 많은 얘기를 했었거든. 그걸 계기로 여러 활동을 하면서 혼자 살게 되고 자기 나름대로는 행복한 삶을 살기 시작했던 건데,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 과정에서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 거잖아. 주영이와 함께 사람들이 많이 싸웠지만 결국 24시간 활동보조를 확보하지 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진 거니까. 미디어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하고 발전하지만 그 변화의 발전의 내용이란 것이 사실 꼭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닌 거지. 어느 한 부분만 보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고 있고. 어떤 한 부분만 보면 너무 비극적일 수도 있으니까. 또 한편으론 우리가 하는 게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도 들어. 하여튼 그래.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어.

수정: 저는 고 김주영 활동가가 만든 <외출 혹은 탈출> 을 보면서 자기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자기 얘기를 하는 게 대단히 힘이 있다는 걸 느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꼭 미디어여야 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미디어가 아니라, 예를 들면 연극을 해도 사람들을 임파워먼트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센터에 와서 시민들, 청소년들, 장애인들이 직접 영상을 통해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역시 미디어의 파급력이란 게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참 큰 것 같더라고요.

명준: 그래, 그걸 (부천) 시의원들이 알아줘야 할 텐데. (웃음)

수정: 그걸 설득한다는 게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아요. 그 분들이 볼 때는 우리가 튀는 짓을 많이 한다고만 하거든요. 이런 상황 속에서 지금의 센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걸까 걱정도 되고. 미디액트가 공모 탈락했던 3년 전에 미디액트 스텝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너무 궁금해요.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할까? 한편으론 대단하단 생각도 들고요. 센터는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서 새로 센터를 세운 거잖아요.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으셨어요?

명준: 공모 탈락 이후에 물론 고민을 많이 했지. 하지만 상암동으로 이전하여 센터를 유지하기로 결심을 한건, 이렇게 쫓겨나긴 했지만 너무 열악하지 않게 버텨보고 싶었던 마음이 강해서였을 거야.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지나치게 강한 모습을 보여줬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해. (웃음) 이게 물론 정상적인 케이스는 아니지. 해외에서도 어떤 일을 하다가 깨지면 보통은 없어져. 내가 속해 있던 캐나다의 거창한 국제 조직도 지원이 끊기면서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거든. 스텝들하고 센터를 계속 할까 말까 고민을 엄청 했지. 그냥 흩어져서 각자 자기 갈 길을 가는 방법도 있고, 센터라기보다는 모일 수 있는 공간 정도만 만들어서 후일을 모색하는 방법도 있었겠지. 하지만 우리가 선택했던 것은 사실 아주 극단적인 것이었을 수 있어. 거의 모든 기능을 유지하는 인프라를 새로 만든 거니까. 스텝들이 고생 정말 많이 했지. 어려움과 트라우마가 지금도 있을 거야. 스텝들 보면 사실 측은하기도 하고 그래. 지금도 이사하느라 먼지 풀풀 마시면서 벽에 페인트칠하고 있으니까.

수정: 답답한 마음이 큰 것 같아요. 미디액트도 그랬고 최근에 강릉도 그랬고 저희 부천까지. 최근에 미디어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스텝들이 대거 바뀌는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잖아요. 이걸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요?

명준: 국가라는 곳이 일사분란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니야 기본적으로는 어떤 특정 세력의 정치적 스펙트럼에 왔다 갔다 하면서도, 미디어센터가 지자체의 핵심사업은 아니기 때문에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볼 수 있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누가 탐을 내고 누가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더 달려있지. 그 역학 관계를 파악하고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건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고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야. 지역에서도 물론 그렇겠지. 그렇다면 결국 그런 상황이 있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한 건데, 얼마나 자기재산을 확보했는가가 문제라는 거야. 스텝들이 얼마나 단련되어 있고 얼마나 비전을 공유하고 있고 얼마나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나 많은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가 유지될 수 있는 후원을 해줄 수 있는가를 판단해야 돼. 수정이의 입장에서는 답답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그렇게 끝날 게 아니라, 수정이 스스로 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해. 어떤 상황이 예상된다면, 이를 미리 계산하고 판단해야지. 그냥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는 아니야. 무책임해. 돌직구로 얘기하면, 스텝들이 잘해서 미디어센터를 만든 게 아니잖아.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속에서 만들어진 거고, 싸우고 깨지는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생겨난 거라고. 거기에 와있는 사람들은 공무원적 책임감이 있어야해. 우리가 공적 수혜자라는 생각으로 자신 있고 책임 있게 임해야 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국가영역을 스스로 만드는 게 바로 운동이라고. 물론 모순과 딜레마가 있겠지만, 운동과 제도적 영역을 통합적으로 사고해야지. 현재 상황에서 지금 해야 할 게 뭔지 판단하고 준비해야 되는데, 많은 센터들에서 과연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긴 시야로 보면 센터를 하다가 안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 힘이 없어서 그런 일이 일어 날 수는 있지. 그럼 왜 나는 힘이 없었나를 반성하고 힘을 어떻게 길러나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지. 맨 날 선거에만 기댈 수는 없잖아? 또, 프로세스를 냉정히 스스로 판단해서 적합한 실천의 모델을 찾아야 해. 이 것을 제대로 찾지 않으면서 어려운 상황이 오면 그대로 포기? 그게 맞는 태도일까? 이런 고민과 준비도 없으면서 센터가 제도적 영역이라서 힘드네, 한다면, 그런 비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없어.

수정: 뜨끔하네요. 저희 나름대로는 공동체도 조직하고 시의원 등과도 만나면서 준비를 한다고는 하는데,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니 힘이 빠지는 것 같아요. 음, 이제 대담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미디액트는 홍대로 이사하는 거죠? 위치는 더 좋아진 것 같은데.

명준: 상암동이라는 위치가 전문가 양성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아무래도 접근성이 일상적으로 출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 “지나가가 들르세요.” 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야. “혹시 상암동에 오면 들르세요.” 라고는 해도. 하지만 홍대라는 위치는 지나가다가 걸치는 공간이니까 그게 되거든. 시설은 좀 안 좋아지고 좁아지긴 했지만, 심리적으로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기반을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라는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봐. 또 상암동 3년의 경험을 통해 급격히 위축되지 않으면서 사업을 지속했던 경험과 프로젝트들도 분명히 있거든. 저비용으로 높은 접근성을 가지고 상암동의 프로그램들을 확장해 나가려 하고 있어.

수정: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주세요.

명준: 별 게 없는데(웃음). 큰 그림들을 그리면서 이러저러한 게 필요하다는 생각들은 있는데, 그건 계획이라기보다는 과제라고 보는 게 맞는 것 같고.

수정: 개인적으로는요? 연애랄지?

명준: 연애는 항상 하고 있고. 결혼은 잘 모르겠네. 늙어가면서 혼자 있으면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 정도는 있는데. 요즘엔 늙어가는 것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 긴 해. 나한테 딱히 노후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노년의 삶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기도 하고. 수정이의 계획은 뭐야?

수정: 미디어센터에서 사람들이 성장하고 카메라로 표현하는 걸 보면서 자기가 자기 얘기를 하는 게 정말 좋은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미디어센터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는 그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최근에는 사람들을 지원만 하기보다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들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