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 두 분이 퍼블릭액세스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당시 어떤 목표가 있었는지도요.
이주영: 저부터 얘기해야겠죠? 저는 퍼블릭액세스에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진 않았어요. (웃음) 대학 졸업 후에도 한동안 영상에 관심이 없었고, 90년대 초라 영화 쪽에서 활동하는 친구들도 많지 않았어요. 그러다 아주 잠깐 방송 작가 일을 했는데, 카메라나 영상 제작 과정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간 곳이 하필이면 한겨레문화센터였고, 비디오 제작 과정을 들으면서 노동자뉴스제작단을 만났어요. 점차 영상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갖게 됐고 작가보다는 찍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기도 했죠. 그러다가 다른 기수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됐는데,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ATV라는 제작 단체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2~3년 정도 활동을 하다 보니, 저는 제작 쪽으로 적성도 안 맞는 것 같고 생계까지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래서 적지만 활동비가 나오는 한국독립영화협회에 상근으로 들어갔고 실무 일은 거기서 처음 시작했어요. 1년 정도 활동했을 때 영상미디어센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고, 2001년 말부터 미디액트 기획실에서 일하게 됐어요. 당시엔 정책실이 없었기 때문에 기획실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퍼블릭액세스였어요. 그게 이 분야에 몸담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죠.
석보경: 음,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나? (웃음) 저희 대학엔 중간고사가 끝난 후 각종 문화 행사나 체육대회를 하는 문화주간이 있었어요. 그 때 미군기지 예정지였던 평택 대추리로 갈 농활대를 모집했고 전 아무 생각 없이 농활을 하러 갔어요. 그 시기에 마침 대추리 주민들을 내몰기 위한 군인과 경찰의 침탈이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대추리를 오가게 됐어요. 그 때가 2006년 5월 초였는데, 계속 왔다갔다는 했지만 딱히 할 일은 없었어요. 그러다가 방학을 했고 같이 농활 갔던 친구 몇 명과 RTV <피플파워>라는 프로그램 작가와 주민 몇 분이 모여서 <들소리>라는 마을 방송국을 시작했어요. 주 6회 10분씩 방송을 했는데 고작 3~4명이 그 일을 하겠다고 덜컥 덤빈 거예요. 그 어마어마한 일을. (웃음) 매일 하니까 영상 작업이 늘기도 하고 점차 도움 주시는 분들이 생기면서 방송은 이어졌지만, 2007년 이후 마을이 협상 국면으로 넘어가면서 동네에 방송거리가 많지 않아졌어요. 그렇다면 방송 시간을 줄이고 마을에서 미디어교육을 하고, 우리도 관련 프로세스를 너무 모르니 미디액트라도 가서 뭘 좀 배우자는 얘기를 했어요. 이후 협상이 진전되어 주민들의 이주단지가 만들어 지는 것이 확정되며 주민들은 임시 주거 지역으로 이주했고 <들소리>도 문을 닫았어요.
그런데 그 뒤로 제가 살고 있던 안산에서 이상하게 계속 영상 관련 일을 하게 됐어요. 미디어교육 등을 하게 되었는데 전부 <들소리>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거라 제가 너무 모르는 상태에서 하니까 영 안 되겠다 싶어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을 듣기 시작했죠. 그리고 그 과정을 들으며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었는데 우연히 용산 참사 현장에 갔다 <들소리>를 같이 한 친구에게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일 구하는 사람과 사람 구하는 사람이 만나서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이하 전미네)에 들어가게 됐죠. 이후 그 안에서 퍼블릭액세스를 담당하게 됐고요.
이주영: 전미네에는 몇 년도에 들어간 거죠?
석보경: 2009년 8월이었어요. 그 뒤로 1년은 어리바리하게 있다가 2010년에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에서 진행한 『시청자참여프로그램 활성화 방안』이라는 연구 사업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퍼블릭액세스 관련 일을 해 보게 됐어요. 2011년부터는 퍼블릭액세스네트워크에서 간사도 맡게 됐고요.
ACT!: 두 분 모두 시작하실 때 목표는 없으셨나요? 포부랄까, 기대랄까?
이주영: 없었어요. (웃음) 포부라고 하면 오히려 영상 제작 할 때 좀 있었죠. 하지만 2~3년 만에 좌절했고, ‘아! 난 그런 그릇이 아니구나, 오히려 서포트 해주는 쪽이 적성에 맞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는데, 그걸 포부라고까지 할 만 한 건 아니잖아요? (웃음)
석보경: 저도 포부랄 게 없었어요. 일 구하는 사람과 사람 구하는 사람이 만난 거라. (웃음) 대학 졸업 후 성격상 일반 회사에 적응하긴 어려울 것 같다 생각했고 하다보면 뭔가 있겠지 싶었어요.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과 로망을 갖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웃음)
ACT!: 두 분은 언제 처음 만났나요?
이주영: 처음 만난 건 기억이 안 나는데...
석보경: 저는 기억나요. 제가 전미네에 들어온 해 9월에 ‘지역 미디어운동의 온라인 재발견’이라는 워크숍을 했는데, 저는 그 때 처음 이주영 실장님을 만났어요.
이주영: 아, 전미네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고 인사를 나눈 건 기억나요. 워크숍에는 워낙 여러 지역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4~5번은 봐야 기억을 해요. (웃음) 저는 2011년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연구 때문에 익산을 자주 같이 오가며 얘기를 나눈 게 기억나요. 비용 절감을 위해 KTX 단체석을 함께 탔었죠. 보경이 주로 예매를 했었고.
석보경: 제가 왜 실장님을 기억하냐면, 인사를 나누면서 ‘아, RTV가 아직까지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2008년 이후 문을 닫았거나 실무자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이주영: 2008년에 전원 사표를 내긴 했었죠. 그 뒤로 현재까지 5년째 매우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죠. 저는 2007년 초부터 일했으니 RTV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때 일한 건 1년 반 정도 되네요.
ACT!: RTV 얘기는 할 말이 많으니 잠시 후 더 길게 해보죠. (웃음) 먼저 국내에서 퍼블릭액세스 활동이 시작됐을 때의 얘기부터 해볼까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시작 - 법제화와 KBS <열린채널>
이주영: 한겨레문화센터 비디오 제작 과정에서 퍼블릭액세스에 대해 처음 들었어요. 하지만 잘 와 닿진 않았어요.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2000년에 방송법이 개정되면서 KBS는 의무적으로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월 100분 이상 해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갔어요. 굉장한 발전이죠. 하지만 막상 방송을 하려고 하니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곳이 없었고 KBS도 곤란해 했어요. 어떤 내용이 될 지 방송에 적합할 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자체적으로 제작한 프로그램도 방송할 시간이 부족한데 왜 그 시간을 아마추어들에게 줘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법이 정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그 뒤 KBS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인 <열린채널> 운영 규칙을 만들었어요. 기술 수준을 어느 정도로 맞춰 오라는 거였는데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좀처럼 알기 어려웠고, 그 때문에 좀 싸웠었죠. 운영 규칙을 고친 후에는 선정 방식을 민주적인 구조로 만드는 게 핵심이었어요. KBS는 기술적 수준이 되면서도 사회적으로 물의가 안 되는 것을 틀고 싶어 했죠. 한편으로는 우리 쪽은 좋은 기회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 없었어요. 당시 방송이 되면 채택료를 지급했는데 최대 천만 원 정도였고, 지금과 달리 제작비 형태로 지급했어요. 하나하나 영수증 증빙을 해야 했고 이에 따라 채택료가 결정됐죠. 우리 진영에서는 그 규모가 감당이 안 됐고요. 그러다가 이마리오 감독의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나 박종필 감독의 <에바다 투쟁 6년> 같은 다큐멘터리가 편성 불가 판정이 내려지면서 크게 싸웠었죠.
당시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이 KBS <열린채널> 밖에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 좋은 방식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래서 계속 싸웠고 결국 운영위원회를 해야 한다거나 서면으로 통보해야 한다는 등의 운영 규칙이 만들어졌죠.
석보경: 방송법의 시청자참여프로그램 관련 규정들은 다른 규정에 비해 굉장히 상세하게 들어가 있는데, 그게 열심히 싸워서 그렇게 됐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주영: 그 시절에 몇 가지 규정을 더 넣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지금 우리가 했으면 하는 것들을요. 물론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확대되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지원
ACT!: 2003년부터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면서 흐름이 크게 바뀌었는데요, 당시 얘기를 부탁드려요.
이주영: KBS <열린채널>은 점차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SO(종합유선방송(케이블방송))나 지역 MBC 같은 지역 지상파에서도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죠. 하지만 여전히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가 시청자 제작자에게 지급하는 방송채택료는 KBS <열린채널>로만 가고 있었어요. 여기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2003년 SO에 대한 방송채택료 지원이 시작됐어요. 지역 지상파는 2005년부터 시작됐고요. 그런데 수요 조사를 전혀 안 하고 확대하는 바람에 2005년 8월 예산이 조기 소진 돼버렸죠. 대책 없는 일이었죠. 게다가 채택료 요청도 방송위원회에 직접 하는 거였어요. 강릉에 있는 영동방송 <우리들TV>에 방송을 했더라도 서울에 있는 방송위원회에 채택료를 요청하는 식이었죠. 결국 2006년 정책이 바뀌어요. 예산이 늘어나기도 했고 KBS, SO 등을 구분해 예산을 책정했고, 지원 방식 역시 방송위원회가 방송사에 지급하고 방송사가 직접 시청자 제작자에게 지급하는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요.
석보경: 위성방송인 RTV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죠?
이주영: RTV는 2002년 9월에 개국했어요. 위성방송의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 대한 별도 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위성방송사업자인 스카이라이프가 RTV에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운영을 위탁하는 것으로 대체되고 있었죠. 아무도 법적으로 명시한 바는 없으나 그렇게 운영되고 있었어요. 그리고 개국 때부터 2005년까지 공익방송 항목으로 3년 간 지원을 받았는데 매번 감사에서 지적을 받았어요. 왜 여기만 특별히 지원하느냐, 현실에 맞지 않다는 식으로요. 사실 이 부분은 일정하게는 파워게임이기도 한데, 어쨌든 RTV는 감사에서 3년 간 지적을 받아온 거죠. 그러다 2006년 지원 정책이 대폭 개편되면서 공익방송이 아닌 시청자참여프로그램 항목으로 바뀌게 돼요. 바뀌면서 연간 18억 선이던 지원액이 15억 선으로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15억이면 큰 지원이긴 하죠. 지금은 아마 전체 예산이 15억이 안 되죠? (일동 한숨) 어쨌든 그러면서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지원 예산이 20억 규모로 크게 늘어났죠.
석보경: 옛날 자료 보니까 방송 내용 때문에 많이 싸웠던 것 같던데, 어땠나요?
이주영: 내용과 관련해서는 많이 싸웠어요. 너무 어둡다거나 암울하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방송국 PD들이 원하는 건 아이들이 뛰놀거나 우리 동네 장터 같은 행복한 거니까. 그런데 맨 날 칙칙한 내용만 들어오는 것 같고 수정을 요구하면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정신은 그게 아니라며 싸우기도 하고 각 지역별로 내용 때문에 많이 싸웠어요. 강릉이나 전주는 특히 더 싸웠던 것 같고.
시민방송 RTV의 새로운 실험
ACT!: <들소리>도 RTV에 방송됐었는데, 어땠나요?
석보경: <들소리>는 처음엔 <무한자유지대>라는 프로그램에 일부 방영되는 수준이었는데, 얼마 안 돼서 고정 편성이 됐던 걸로 기억해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 대해 잘 몰랐던 당시 제 입장에서는 정말 신기했어요. 저희가 만든 방송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방송할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기술적으로 매우 허술했어요. 그런데 방송에서 틀고 돈까지 주니, 신기할 수밖에요. (웃음)
이주영: <들소리>의 경우 RTV의 성격이 달라졌을 시기와 맞물려 있어요. 개국한 2002년부터 2006년 초까지의 구성원들은 RTV를 시민사회의 방송으로 생각했었어요. 일종의 시민 종편처럼. 다양한 걸 하고 싶어 했죠. 그래서 초기에는 참여 프로그램보다 자체 프로그램이 많았어요. 뭐, 많았다고 해도 대단히 많은 건 아니었지만, 한 주에 고정 프로그램은 몇 개 있었죠. 외부에서는 왜 시민방송다운 걸 안 하냐는 불만도 있었어요. 게다가 2004년까지는 내부적으로도 좋지 않았고요. 당시 제가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 있는 분들도 계셨던 것 같아요.
그러다 미디어운동 진영에서 RTV를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어요. 많은 회의와 고민을 거치면서 퍼블릭액세스를 중심으로 하는 방송으로 체제를 바꿔내기 시작했죠. 하지만 방송국 하나를 참여 프로그램으로만 운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어요. 그래서 시도한 게 퍼블릭액세스를 구분하자는 거였어요. 크게 4개였는데, 공모 액세스, 기획 액세스, 수급 액세스, 자체 제작이었어요. 공모 액세스는 기술 수준이 낮아도 방송사고 수준이 아니거나 돌잔치, 결혼식 같은 사적인 내용이 아니면 틀어주고 대신 채택료를 적게 주는 방식이었고, 기획 액세스는 어떤 분야의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까 취지에 맞게 제작할 수 있는 기관을 찾아 제작을 지원하는 방식이었어요. 주 1~2회 정기적으로 방송됐던 <나는 장애인이다>, <미디어로 여는 세상>, <영화, 날개를 달다>, <이주노동자방송>, <액션V>, <피플파워>등이 기획 액세스였어요. 그리고 수급 액세스는 시기별 상황에 맞는 걸 가져와 틀거나 지원하는 방식이었고요. <들소리>의 경우가 수급 액세스에 해당 되죠.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적게나마 예산이 있어서 원동력이 될 수 있기도 했고요.
석보경: 자료로만 봤지만 지역 소식을 모아낸 <액션V>는 정말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힘들었을 것 같고요.
이주영: <액션V>는 새로운 실험이었어요. 다른 프로그램과 다르게 코디네이터 개념이 있었어요. 1~2인이 전체 코디를 맡고 각 지역의 미디어 활동가가 돌아가면서 영상을 제작하는 형태였죠. 힘들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호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고민이 무르익었을 시기이기도 했거든요. 어떻게 방송을 더 보게 할 것인지, 실제로 저변은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 것인지 등 또 다른 고민을 시작하는 시기였죠. 하지만 이후 예산이 끊어졌고 <미디어로 여는 세상>이나 <이주노동자방송>은 2년 정도 유지됐지만 확실히 경제적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는 한계가 있었어요.
정책적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지원 제도
ACT!: 아까 미뤄둔 RTV 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2009년 석보경 활동가가 RTV가 아직 살아 있음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겠네요. (웃음)
이주영: 이명박 정부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통합되면서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로 바뀐 것이죠. 그런데 2008년 방통위가 출범하면서 대대적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해요. 지원금이 결정됐음에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실태 파악을 하고 주겠다고 했지만, 지원을 축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았던 건 아닐까 해요. 실제로 그 해 8월까지는 예산 집행을 하다가 RTV에 통보를 했어요. 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의 채널 중에서 RTV만 지원 받는 게 아니라 공모를 해서 균등하게 지원금을 나누라는 거였어요. 이게 바로 문제가 됐던 PP공모제인데요. 매우 기형적인 형태에요. 스카이라이프에 런칭되어 있는 모든 PP(방송채널사업자)들이 스카이라이프가 시행하는 공모에 참여 대상이 되는 거였죠.
OCN이나 tvN 같은 PP(방송채널사업자)들도 해당되구요, 물론 시행과정에서 그 채널이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 때문에 RTV에 지원됐던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예산은 터무니없이 축소됐어요. 또 이 시기에 스카이라이프 사장이 바뀌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스카이라이프가 RTV에 지원하던 예산까지 없어져 RTV는 경제적 위기에 서게 됐죠.
석보경: 저는 그 이후 RTV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많은 정기 프로그램들이 종영하기도 했으니까요.
이주영: 2008년 말에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아니라 아예 채널 자체를 운영할 수 없게 돼버렸어요. RTV는 광고도 없이 지원금만으로 운영해왔기 때문이죠. 2008년 모든 프로그램을 접고 12월에 22~24명의 근무자가 전부 정리해고 됐어요. 아, 그 때 문을 닫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죠. 당시 남은 사람들이라도 당분간 자원 활동을 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리고 다음해 1월 3일, 12명의 사람들이 모였죠. 2주가 지나자 3~4명이 빠졌고 한 달 정도 지나니 절반 정도가 빠졌어요. 모두들 사정이 있었죠. 그리고 6개월 후에는 4명이 남았어요. 그 때 문을 닫을 건지 계속 갈 것인지 판단을 했죠. 결국 계속 가는 것으로 결정했고 6개월은 자원 활동을 했지만 앞으로는 급여를 책정하자라고 협의해서 2009년 7월에 재입사한 걸로 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어요.
석보경: 구로로 이사한 건 언제인가요?
이주영: RTV는 원래 남대문에 있다가 2007년 12월에 구로로 이사를 왔어요. 남대문은 임대료가 너무 비싸서 이사를 했는데 스튜디오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죠. 스튜디오는 어느 정도 층고가 있어야 해서 공간 찾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약식이지만 스튜디오를 만들고 이전했는데, 2008년 예산이 축소되면서 이사 온 지 1년 만에 문을 닫게 돼버렸죠. 안타깝게도 계약 기간이 5년이라 4년 정도는 월세가 많이 아까웠죠. 내놔도 나가지 않았고요. (웃음) 기형적으로 운영된 지 4~5년 정도 됐는데 작년에 마침 계약 기간이 끝났고 연말에 다시 문을 닫으려 하다 어찌어찌 해서 살림을 줄여 같은 건물 내 더 작은 곳으로 이사를 왔어요.
석보경: 여기도 5년 계약한 건 아닌가요? (웃음)
이주영: 여긴 1년 계약했습니다. (웃음)
신진 활동가의 퍼블릭액세스 활동 입문기
ACT!: 석보경 활동가는 <들소리>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RTV와 맞물려 있었네요. 이후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에서 퍼블릭액세스를 담당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셈이고요.
석보경: 2009년 8월,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많은 주위 사람들이 힘들 텐데 왜 거길 갔냐고 말하곤 했죠. 하필 왜 거기냐고. (웃음)
이주영: 왜 그랬을까요? 돈이 안 돼서? 하지만 거기가 그렇게까지 힘든 곳은 아니잖아요?
석보경: 남들이 보기에 특히 일이 많아 보였던 곳인 것 같아요. 선임인 허경씨(현 전국미디어센터협의회 사무국장)가 혼자 있었는데 혼자 뭘 막 하니까. (웃음) 처음에는 상황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저와 함께 활동을 시작한 분이 지금은 청주에 있는 생활교육공동체에 있는 오재환 씨인데 우리 같은 신진 활동가들을 위한 모임인 오겡끼데쓰까를 기획하기도 하고 미디액트의 영진위 공모 탈락 사태가 터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돌아와 미디액트 활동도 했었어요. 퍼블릭액세스 관련 활동을 처음 한 건 2010년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에서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연구를 진행했는데 거기에 참여한 거였어요. 사실 아는 건 많지 않았는데 연구하면서 대전, 대구, 부산, 광주, 목포, 전주, 익산 등 전국에서 퍼블릭액세스 활동을 하고 있는 많은 활동가들을 만나는 계기가 됐어요. 2011년에 진행한 연구에서는 퍼블릭액세스의 흐름을 보는 계기가 됐고요.
ACT!: 2011년부터 퍼블릭액세스네트워크 활동이 새롭게 시작되기도 했는데?
석보경: 2011년 초 터무니없이 줄어든 예산을 계기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중지가 모아지면서 퍼블릭액세스네트워크 회의가 간만에 열리게 됐어요. 서울에서 회의를 했었는데 콘텐츠 중심으로 액세스네트워크를 다시 고민해보자는 얘기를 나눴어요. 이 외에도 어떻게 할 것인지 부터 시작해서 다시 모여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했었고, 네트워크 모임을 다시 하기 위해서는 코디나 기타 등등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고, 전미네 사무국에서 맡아줬으면 한다는 의견이 있었고, 그래서 제가 맡게 됐죠. 그리고 각 지역별 소식을 팟캐스트를 통해 알리는 <복지갈구화적단> 프로젝트가 작년 4월부터 시작됐고요. 사실 내가 퍼블릭액세스와 관련해서 뭔가를 해야겠다, 해야 되는구나라는 판단을 본격적으로 한 건 퍼블릭액세스네트워크 간사가 된 다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 전에는 그냥 일이였어요. 또 자료를 봐도 뭔 말인지 알 수 없었죠. 그나마 연구 사업에 참여하면서 공부를 좀 할 수 있었어요. 처음 참여한 연구에서 제가 맡은 건 지역 인터뷰였고 지역 현황을 정리하는 수준이었어요. 그 일은 자료를 바탕으로 그럭저럭 쓸 수 있었는데, 퍼블릭액세스네트워크 간사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료를 봐야 하는 때가 오게 된 거죠.
이주영: 조금은 다른 얘긴데, 액세스네트워크가 잠시 소원했던 적이 있긴 했지만 유독 분위기는 좋았어요. 지역에서 회의를 하면 집에 그냥 가는 경우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 분위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규모가 많이 커졌고 새로운 사람들도 들락날락하지만 여전한 것 같아요. 예전에 있던 사람들이 많이 바뀐 것 같지도 않고요.
석보경: 그래서 <액션V> 같은 프로젝트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재밌지 않으면 그런 프로젝트를 하긴 어려우니까. (웃음) 사실 <복지갈구화적단>을 준비하면서 예전의 기획서를 많이 봤는데 <액션V> 포맷과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코디네이터의 역할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 틀은 닮아 있어요. 그리고 그걸 보면서 잘 굴러갔던 모임이었겠다는 생각을 했죠.
ACT!: RTV가 어려워지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역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팟캐스트인 <복지갈구화적단>을 운영하고 있고, 새로운 활동가를 발굴하는 활동도 진행되고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주영: RTV가 철퇴를 맞은 걸 빼놓고 생각하자면, 예산은 계속 줄어들고 있지만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어요. SO도 꽤 넓은 지역에서 하고 있고 PP도 복지TV나 리빙TV 같은 곳에서 하고 있고요. 예전에는 뭘 만들면 꼭 다른 곳에 냈어야 했는데 요즘에는 많은 영상들이 자기 지역이나 범위 안에서 소화하고 있어요. 예전에 비하면 다툼도 많지 않은데, 내는 쪽이나 틀어주는 쪽이나 서로 봐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한편으로는 이제 제도가 정착된 것 같다고나 할까,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서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계속 문제가 되고 있는 방송사의 방송채택료 자부담 문제의 경우 (*2011년부터 줄어든 예산에도 실적은 남기기 위해 방통위가 전액 지급하던 채택료를 방송사가 30%를 부담하도록 정책을 바꿨다.) RTV는 죽을 맛이긴 하지만 대기업화 되어가는 MSO(*SO-지역 케이블방송사-가 통폐합 되면서 생겨남)를 생각하면 자부담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하긴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여러 난관이 있지만 어쨌든 일정한 방식으로 제도는 자리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그것과 상과 없이 <복지갈구화적단>이 참 재밌는 시도인 것 같아요. 작년에 RTV에서 지속적으로 방영했어요. 사실 팟캐스트는 분량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만 방송은 그렇지 않아요. 10분짜리 고정물이 있을 수 없어요. 방송 시간 기준인 50분에 맞추려면 한 달은 모아야 해요. RTV에 기술담당자가 없어서 부천센터에 50분짜리 완본 테이프를 부탁했었죠. 그쪽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힘든데 일을 하나 더 해줘야 되는 상황이라 38편중에 반 정도만 테이프가 오고 나머지는 RTV에서 방영을 못했어요. 그래서 올해는 RTV에서 소화하기로 하고 최초 다섯 편을 묶어 1회가 나가고 있어요. 2회는 아직 편수가 안차서 못나가고 있지만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이 채택료 등 여전히 아리송한 문제들이 많지만, 각 지역에서 자기들 얘기를 자유롭게 하고, 그것이 방송만이 아니라 팟캐스트로도 나가고 묶여서 방송으로도 나오고. 그래서 지금도 힘든 건 알지만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또 다른 모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걸 보는 느낌이 좀 있어요. 지역에서 꾸준히 하시는 거 보면 대단하시다는 생각도 들고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공정성과 객관성
ACT!: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심의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주영: 올해 3월부터 <뉴스타파>와 <고(GO)발뉴스>를 방송하고 있어요. 2008년 이후 2년 정도 <이주노동자방송>과 <미디어로 여는 세상> 제작팀에서 자발적으로 한 달에 한 번 프로그램을 보내줬어요. 그 외에 <무한자유지대>를 제외하고는 신규 프로그램을 하지 못했어요. 제작을 하거나 지원해야 되는데 제작인력도 비용도 없었어요. 한 해는 줄기차게 재방을 해왔고요.
그런데 올해 어떤 움직임들이 있었어요. 대선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이 언론 장악 때문이고, 새로운 언론을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죠. <뉴스타파>나 <고(GO)발뉴스> 같은 프로그램의 새 시즌이 시작됐고 <국민TV>처럼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겠다는 곳도 생겨났지요. 그 과정에서 RTV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움직임도 있었어요. 위성이라도 방송국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은 여기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여길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결과 올해 3월부터 <뉴스타파>와 <고(GO)발뉴스>의 방송을 시작한 거죠. 뭐 반대도 많았고 논란도 많았지만 심사숙고 끝에 방송하기로 결정했죠.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만으로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석보경: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어요.
이주영: 당연히 문제제기가 들어왔죠. 크게 2가지인데요. 보도 프로그램이냐 아니냐는 문제와 심의 문제예요. 먼저 보도 프로그램에 대해 얘기하면, 현재 PP는 전문 채널이기 때문에 종합 편성은 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OCN처럼 영화 전문 채널이면 영화 관련 내용만 해야 하는 거죠. RTV의 경우는 시민참여채널로 되어 있고요. 그런데 이 전문 편성 채널은 보도 프로그램을 방송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방통위나 미래창조과학부에서 하는 문제제기는 왜 보도물을 틀고 있냐는 거예요. PP는 전문 채널이기 때문에 종합편성을 하면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정확하게 보면 <뉴스타파> 제작진은 비영리 민간단체에요. 방송을 잘 아는 제작진이긴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시민 참여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또 주식회사인 <고(GO)발뉴스> 제작진의 경우 저희와 콘텐츠 제휴 계약을 맺었어요. 이를 근거로 방송을 하고 있는 거고요. 둘 다 보도 프로그램이 아닌 시청자참여프로그램으로 보고 있는 거죠. 이에 대해 방통위와 미래창조과학부는 지금 보도 프로그램에 대한 규정이 애매하니 한 달 동안 RTV를 비롯한 PP를 탈탈 털어 조사한 후 고시를 통해 아예 못하게 만들겠다고 하고 있어요.
석보경: 심의 문제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이주영: 다른 큰 쟁점이 바로 심의죠. 아직 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었는데 <뉴스타파>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백년전쟁>이 심의에 걸렸어요. 둘 다 공정성과 객관성에 위배된다는 이유였죠. 그런데 질의서의 수준이 매우 낮았어요. <백년전쟁>의 경우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인데 국부를 비판하는 건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것이라는 내용도 왔었거든요. 저희 입장에서는 그 부분이 공정성과 객관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만에 하나 공정성과 객관성에 위배되더라도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특성이 있는 것이고 여기에 불만이 있다면 반대 입장의 영상 방영을 요청하면 되고 얼마든지 틀 수 있거든요. 미디어운동 진영에서는 오랫동안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공정성 기준이 달라야 하고 별도 심의 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해왔어요.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아직 결정이 난 건 아니지만 6월 중순에 제재가 결정이 될 것 같아요. 법적 제재로는 주의, 경고, 책임자에 대한 징계, 과태료 순인데 저희는 책임자에 대한 징계까지만 원하죠. 과태료 낼 돈은 없으니. (웃음) 지금은 심의위원회에서 요청하는 서류를 주면서 대응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후에 방송 중지 명령도 내려질 수 있는데, 중지하라면 중지할 수밖에 없죠. <뉴스타파>나 <백년전쟁>을 중지하더라도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중지하는 건 아니니까. 현재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어요. 싸울 수 있는 만큼은 싸워야죠.
석보경: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심의 문제로 공정성이나 표현의 자유 등 고민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별도 심의 규정은 꼭 필요한 것 같고요. 사실 심의위원회에서 얘기하는 공정성이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웃음)
이주영: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 대한 별도 심의 규정이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있는 것도 잘 안 지키는 것 같아요. 법의 공정성에 대한 규정이 잘못되어 있다기보다는 그냥 수준 이하랄까. 심의위원회에서는 <백년전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해요. 그런데 왜 종북단체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요. 그냥 종북단체가 만든 영상을 방영한 게 문제라는 거예요. 이건 법에 있는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고쳐서 될 일이 아니에요. 이상한 광기 같기도 해요. 말은 공정성, 객관성이라고 하지만 그냥 끼워 맞추는 것일 뿐이죠.
저는 심의에서의 공정성, 객관성은 그걸 적용하는 사람들이 잘 하면 된다고 봐요. 시청자참여프로그램에 대한 별도 심의 규정을 마련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수준으로 적용하면 그건 기준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은 프로그램 대 프로그램으로 따져야 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시민들이 직접 정부 기관의 입장을 듣기는 어려우니까 자신이 접근 가능한 수준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그게 어느 정도 객관적인 자료로 프로그램 내에서 설득 된다면 무조건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반대 입장이 있다면 반대 입장을 담은 영상을 제작해 요청하고 틀면 되고요.
석보경: 기본적으로 심의위원 구성 자체가 6 대 3 구조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대통령이 위촉한 3명, 여당에서 3명, 야당에서 3명이면 당연히 한쪽 입장에 치우칠 수밖에 없죠. 지금 지금 같은 기준이라면 국내에서 만든 모든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이 불공정하고 객관적이지 않은 게 돼버려요. 동네를 찍고 다니다 쓰레기가 버려지는 곳을 발견하고 왜 거기가 쓰레기가 버려지게 됐는지를 따지다 보면 동사무소까지 찾아가게 되는데 동사무소에서 일반 시민에게 친절하게 답변해주진 않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 그 영상은 공정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은 영상이 될 수밖에요. 심의위원회에서는 마음에 안 들면 걸어버리고 그걸 6 대 3 구조에서 통과시켜버리면 끝나버리고요.
새로운 퍼블릭액세스 모델을 꿈꾸다
ACT!: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예산이 큰 폭으로 줄었고 정책적으로도 개선될 가능성은 잘 안 보이는데요. 이 때문에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예산이나 정부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와는 별도로 다른 활동을 모색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점차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또 다른 모델이나 지향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석보경: 현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의 한계는 명확한 것 같아요. 방송채택료 이외의 지원 방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도 계속 해왔지만 방통위는 시청자미디어센터를 짓고 있고 이를 통해 간접 지원하겠다는 말만 하고 있어요. 지금 방통위가 운영하는 시청자미디어센터가 광주와 부산 2곳에 있는데 3곳을 더 추가로 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진 않은데 계속 시청자미디어센터만 얘기하고 있죠. 또 예산이 줄어드는 문제는 난감하기도 해요. 제가 활동을 시작한 후 단 한 번도 예산이 늘어난 적이 없어요. 반 이상 삭감되기만 했으니까요. 예산을 늘릴 수 있는 묘안이 없고 늘린다고 해도 방송채택료만 많이 주면 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고요.
이주영: RTV 입장에서 보면 예산이 늘어도 저희는 하기 어려워요. 현재 방송채택료에 대한 자부담이 있는데 그 비율이 더 높아지면 너무 부담스러워져요. 예를 들어 자부담 정책이 없던 재작년까지만 해도 1주에 두 번은 신규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자부담 정책이 시행되면서 1주에 한 번 방송하는데 1년에 1,300만 원을 냈어요. 두 번을 하면 2,600만 원을 내야 하고요. 웬만한 방송국에게는 적은 돈이지만 RTV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예산이 늘어난다고 해도 자부담 정책 때문에 RTV는 그림의 떡인 거죠.
또 채택료 지급 방식이 맞는가 하는 생각은 실무를 하면 할수록 커져요. 예를 들어 영화과 학생들의 졸업 작품이 들어오기도 하는데 안 틀 이유는 없지만 이게 과연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한 달 방송되는 영상 중 절반 정도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퍼블릭액세스와 아무 상관없어지게 되는데, 틀어야 하니까 들어오는 영상을 틀고 서류 맞춰서 일하고 그러다 보면 그냥 사업하는 기분이에요. 이걸 안 할 수는 없지만 퍼블릭액세스가 활성화 된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게다가 최근에는 어느 정도 수준이 된다고 판단되는 영상만 방영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예산을 늘리고 운영 방송사를 늘리고 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예산이 줄어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고 이러다 언젠가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방어하고 싸워야 하는 건 맞는데, 실제로 이렇게 되다 보니 동력도 안 붙고 의무 방어하는 기분도 들곤 해요.
석보경: 방통위에서 말하는 시청자미디어센터를 통한 간접 지원 역시 한계가 명확한 것 같아요. 거기에 시민들이 가서 영상 제작을 하기에는 너무 크다고나 할까?
이주영: 그래서 부산에서 운영되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제작지원팀 같은 지역 코디 역할이 필요한 것 같아요. 큰 시청자미디어센터가 작은 지역 단위의 단체나 활동가들을 엮어내는 게 가능했으니까요. 단순히 미디어센터를 짓는 것만이 아니라 미디어센터를 기반으로 한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추진하는 미디어센터 사업과 어떻게 연결할지도 고민해야 하고요.
RTV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지금 운영하고 있는 시청자참여프로그램 방식은 굉장히 많은 퍼블릭액세스 모델 중 하나로 남겨놔야 한다고 생각해요. 10년 동안 애써 만든 걸 굳이 없앨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퍼블릭액세스가 곧 시청자참여프로그램이라는 프레임은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RTV를 운영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요. 새로운 액세스 모델을 개발하고 나누면서 그것이 RTV로 오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필요해서 영상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RTV로 소통되는 게 필요해요. 시청자참여프로그램 지원 제도는 퍼블릭액세스 확대를 위한 활동의 성과이기도 해요. 그 제도는 그대로 남겨두고 또 다른 방식으로 뭔가가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래야 RTV도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거고요.
ACT!: 석보경 활동가는 지역 퍼블릭액세스 활동가들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인 <복지갈구화적단>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석보경: 어떻게 보면 RTV가 잘 굴러갔다면 굳이 <복지갈구화적단>이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 같아요. 지역의 퍼블릭액세스 활동가들이 시민들에게 제안할 계기가 필요했고, 전체적으로 소통할 공간도 필요했기 때문에 <복지갈구화적단>을 만든 거니까요. 만약 각 지역에서 마을, 동네 단위의 방송이나 RTV가 잘 굴러 갔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뭐 RTV와 마찬가지로 매년 말에 계속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될 것 같은데 소통의 공간과 채널이 필요하다는 큰 원칙은 바뀐 게 없는 것 같아요.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모델에 대한 고민을 하고 또 해야겠죠? (웃음) 한편으로는 현재의 채널도 잘 활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어요. 미디어교육 수료작 DVD는 나오지만 그걸 활용할 방안은 찾지 않는 것 같아요. RTV나 SO에 내는 경우도 거의 없는 것 같고요. 미디어센터 등에서 이런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요. (웃음)
이주영: 아, 언젠가부터는 돈이 껴서 애매해진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방송채택료 없이는 아무 것도 굴러가지 않는 시스템이 돼버린 거죠.
ACT!: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마무리해요.
이주영: 나이 오십에 무슨 미래...(웃음)
석보경: 내 미래인가요, 남의 미래인가요? (웃음)
ACT!: 퍼블릭액세스와 관련된, 각자가 지향하는 미래의 모습!
이주영: 2008년 문을 닫은 이후부터 해마다 올해를 넘길 수 있을까, 올해까지만 하자 하면서 연단위로 움직이고 있어요. 그러다가 작년에는 정말 정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또 한 해를 넘겼고 벌써 5월이에요. 늘 올해 말까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요. 왜 이런 얘기를 하냐면, 일 년 일 년 산 세월이 너무 오래 되서 미래 따위는 (웃음) 한치 앞도 못 보는데 무슨 미래겠어요. 올해는 일단 잘 넘겨놓고, 만약에 내가 RTV에서 계속 일을 하게 된다면, 뭔가 새로운 모델, 형태에 대한 과제를 가지고 가지 않을까 싶어요. 이 판을 떠나면 액세스는 완전히 머리에서 비울 거고요. (웃음)
석보경: 모르겠어요. 서른이 되기 전에 그만두고 싶긴 한데, 저의 로망은 5번과 15번 사이에 시민들이 만든 영상이 나오는 채널을 꽂아보는 거예요. 몇 년 후가 됐든, 몇 십 년 후가 됐든.
ACT!: 금방 그만두긴 어렵겠네요.
모두: (일동 웃음)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