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85호 Me, Dear] ACT! 와 나
[편집자 주] ‘Me,Dear’은 일상에서 느낀 미디어와 관련된 소소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미디어에 대한 나의 단상이나 인상을 담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Me,Dear를 통해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을 소박하게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Me, Dear’ 코너가 처음 기획되었을 때는 [ACT!]가 지니고 있는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편집위원들이 평상시 일상에서 느끼고 경험한 사소한 것들을 풀어보자는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첫 원고부터 “빗장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커뮤니케이션 권리로!” 라는 거창한 글로 포문을 열더니, 자신의 인생을 회고해보는 대서사시가 등장하질 않나, 정성일로 빙의하여 히치콕을 분석하질 않나, 결국엔 기어코 대안미디어의 미래를 걱정하는 거대 담론에까지 이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론, 각 원고는 모두 훌륭합니다. 다만, ‘Me, Dear’ 코너를 처음 제안했던 사람 중 하나로서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에... 흑.)
그래서,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사소해 질 수 있는가를 실험하는 원고를 반드시 쓰리라! 다짐해 보았다. 나는 왜 손톱을 항상 짧게 깎는가에 대한 고찰? (아~ 쓰라려...) 어제 아내가 해준 김치찌개에 둥둥 떠 있던 가츠오부시의 전말? (그렇다. 나의 아내는 싱겁다 싶으면 본능적으로 매운탕에 간장을 들이붓는 내추럴 본 퓨전 요리사인 것이다!) 요즘 부쩍 재발 빈도가 높아진 역류성식도염의 원인? (과식이겠지 뭐.. 과음이거나..) 괜히 씨네필인척 하면서 나만의 베스트 10? (베스트 정하기는 씨네필들의 본능적 습관이라고 하던데...) 그것도 아니면, 왜 나는 항상 원고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가에 대한 분석과 반성? (그렇다. 지금 이 쓰잘데기 없는 글을 쓰는 현재 시점도 마감을 훨씬 넘기고 있다! 반성한다.)
하지만, 편집회의 결과, 이번 호는 [ACT!]의 신성한 10주년 기념호인 만큼 ‘Me, Dear’도 [ACT!]와 관련된 글이어야 되지 않겠냐는 의견으로 모아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눈물을 머금고 “ACT! 와 나” 라는 식상한 제목을 단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거다. 그렇지만 (나도 고집이 있으므로) [ACT!] 10주년 기념호의 품격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극도로 사적이고 사소한 나만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모르겠다. 이미 세 단락을 거치면서 품격 따위는 회복불능 상태가 되어 버린지도..)
내 이름이 [ACT!]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10년 8월에 발행된 70호였다. ‘Re:Act!’에 쓴 글이었는데, 당시 미디액트에서 수업을 듣고 조용히 살아가던 내게, “지난 호를 읽고” 류의 독자투고를 써달라며 최모씨가 접근하여 아무런 부담 없이 썼던 글이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알다시피, ‘Re:Act!’는 단순히 독자투고가 아니라, 신임 편집위원을 충당하기 위해 기획된 고도의 전략적 도구인 것을... 그 때 나는 몰랐다. 내가 쓴 ‘Re:Act!’ 원고가 눈물샘을 자극하였다면서 (70호 ‘길라잡이’ 참조) 과도한 감격과 칭찬으로 나에게 다시 접근하더니, 그 다음엔 편집회의에 한번 놀라오라면서 꼬시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원고를 하나 써보지 않겠냐고 하더니만, 어느새 나를 편집위원으로 부르고 있었다. 지금도 누가 혹시 ‘Re:Act!’를 써주지 않겠냐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따스한 웃음과 함께 당신에게 접근하거든 일단 경계하라. 지난 [ACT!] 편집회의에서 당신의 이름이 남몰래 수차례 언급되고 당신을 편집위원으로 들어앉히기 위한 모종의 전략이 이미 세워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주일형, 미안해요.
지금 다시 보니, 당시 ‘Re:Act!'에 나는 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남자. 키170cm의 루저. 게다가 과체중. 나이는 어느덧 서른이 넘었으나 딱히 직업은 없음. 현재 13년째 대학생. 그런데 아직도 졸업까진 2년이 남았음. 도대체 그동안 뭘...? 나도 궁금^^;; 게다가 학점은 올 시즌 류현진 방어율에 거의 근접. 졸업식 한번 가보는 게 정말 소원....”
3년이 지난 현재, 조금 수정할 것들이 있어 보인다. 일단, 아직 남자다. 키는.. 올해 초 병원에 가서 재보니 171.8cm더라. 내가 원래 좀 뭐든지 늦다. 3년 동안 1.8cm가 자랐으니, 10년 뒤엔 180cm에 도전해 보리라. 체중은 뭐 여전히 과체중. 그리고 당시엔 “어느덧 서른이 넘었으나” 라고 표현했네. 지금은.. “곧 불혹이 되겠으나”로 바꿔야 할 듯. 이제 직업은 생겼고. 당시에도 사실 3년 뒤엔 직업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리라 예상은 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바닥(?)에서 이렇게(?) 살고 있을 줄은 진정코 몰랐다. 마지막으로 대학은... 졸업했다. 지난달에야. 흑. 당시에는 ‘2년 더’ 를 예상하며 끔찍해 했지만, 실제로는 3년이 더 걸렸다. 졸업학점은 올해 류현진 방어율에는 훨씬 못미치지만, 당시 류현진 방어율보다는 높다. (아는가? 2010년 8월, 류현진의 방어율은 0점대 후반이었다는 사실!) 어쨌든, 무려 16년 만에 대학을 기어코 졸업하고만 의지의 ‘나’에게 축하를 보내주시길... 하지만, 심히 창피하여 소원이었던 졸업식에는 결국 못 갔다.
[ACT!] 편집위원을 3년째 하면서 나는 지난 호를 제외하고 매 호 글을 썼던 것 같다. 그것은 워낙 낯을 가리는 탓에 원고청탁과 마감독촉을 하느라고 발을 동동 구르느니, 차라리 내가 쓰고 나를 독촉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었다. 처음 쓴 글은 내가 편집위원이 된 줄도 모르고 얼떨결에 썼던 “돌미 토론회 - 미디액트 새 꿈 찾기 프로젝트” (72호) 였는데, 이건 내가 토론회 발제자였던 탓에, 글을 쓴다기 보다는 발제 및 토론 요약 느낌으로 가볍게 작성했던 거였다. 내가 나의 첫 원고로 기억하는 건, 아무래도 73호에 실린 종편채널 관련 원고다. 거룩한 [ACT!]에 나의 의견이 담긴 글이 실린다는 긴장감에 (문자 그대로) 잠을 꽤 오랜 날 동안 설쳤던 생각이 난다. 게다가 내가 아주 잘 아는 분야도 아니다 보니, 닥치는 대로 자료를 찾아서 읽어보고 관련 토론회도 여기저기 많이 기웃거린 끝에 겨우겨우 작성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뭔가 그럴 듯하게 쓴 것 같아서 꽤 뿌듯하기도 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흥분되고 격양된 심정이 너무 고스란히 들어가 있어서 상당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래도 글 하나를 쓰고 남긴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가득했던 당시의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무리 ‘Me, Dear’ 라지만, 이렇게 마감이 임박해서야 한 두시간만에 후딱 쓰고 해치우려는 지금의 나로서는 반성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일 기억나는 것은 아무래도 작년 봄에 개최했던 “ACT! 포럼 - 미디어운동의 새로운 프레임과 전략 수립을 위하여” 가 아닐까 싶다. 이 역시, 그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활동 경력 이라봐야 1년이나 겨우 된 신출내기가 단어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저 엄청난 제목을 걸고, 미디어운동의 산증인들을 앞에 둔 채, 이 얘기 저 얘기 떠벌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포럼에서 발제를 하면서 도대체 얼마나 떨렸던지. 나로서는 내 인생에 가장 벌벌 떨었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포럼이 끝나고 최모씨와 근처 대포집에 들어가 가슴을 치며 눈물로 후회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가 왜 이런 미친 짓을.. 엉엉. 포럼 날 내가 무슨 얘길 했는지는 도무지 하얗게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발제문과 요약본은 [ACT!] 79호에 아직껏 고스란히 실려서 나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이래서 글이 무서운 거다. 흑.
“ACT!와 나” 라는 글을 쓰는 마당에 [ACT!]를 통해 만난 사람들을 빼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될 거다. 미디액트에는 독립극영화제작 과정을 수강하면서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물론 내 영화를 만드는 데에만 온 정신이 가 있었다. 하지만, 차츰 미디액트 스탭들을 포함하여 미디어운동이라는 걸 하는 멋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사실 그저 나를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뿐인데, 저 사람들은 뭔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일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게 참 좋았다. 같이 이야기를 걸고 나누고 싶었지만, 워낙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나로서는 좀처럼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ACT!]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나는 물론 그걸 덥석 물었다. 처음 편집회의에 참석하던 날, 아무 것도 모르던 나는 물론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이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설레었다. 시간이 지나고 취재차 지역의 미디어활동가들도 하나둘 만나면서, 멀리서만 보고 동경해왔던 사람들과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고 알아가게 되었다. 알고 보니 그들도 보통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상상했던 그 이상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2년 전 봄에 전주영화제 로컬세미나를 취재하러 갔을 때가 생각난다. 세미나 후, 가맥집에서 맥주 한 잔씩을 기울였는데, 나는 처음에 “액트 편집위원으로 새로 활동하게 된 박민욱입니다.” 라고 작게 소개하고는 이내 구석에 몰래 앉아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열심히 듣기만 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도대체 쟤는 누구인가? 하며 속으로 불편해 했을 테다.) 사실 대화 내용의 절반 이상이 서로를 향한 독설과 시시껄렁한 농담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지난 수년간 어려움 속에서 함께 활동해 왔던 동지애가 느껴졌고, 그들의 활동 내용들을 어렴풋이 들으면서 아, 멋있다. 하고 느꼈다. 꼭 그날의 기억 때문은 아니더라도 나는 결국 그들과 비슷한 활동을 하며 이를 직업으로 택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있던 분들 대부분과 자주 보고 통화하며 함께 일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당시에 느꼈던 그들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인연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자주 만나면서 그 감정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사라지고는 있지만.. 흐흐)
십 수 년 전, 나는 모든 걸 버리고 떠났다가, 5년 전, 다시 모든 걸 버리고 돌아왔다. 당시 나에겐 아무 것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고, 모든 걸 다시 시작하고 만들어 가야 했다. 그 때, [ACT!]를 만난 건 정말 다행이었다. [ACT!]를 통해 내 생각을 남에게 감히 표현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고, 내게는 과분한 정말 멋진 사람들과도 알게 되었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도 찾았다. 이 모든 것이 서른 넘은 나에게 [ACT!]를 통해 갑자기 기적처럼 찾아왔다. 나는 아직도 초보 활동가이지만, 그래도 어느 덧 [ACT!] 10년 중 3년을 함께 만들어 왔고, 현재 편집위원 중 나름 고참에 해당하게 되었다. 단언컨대, [ACT!]와 함께 한 3년은 내게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앞에서와 다른 뉘앙스이긴 하지만, 누군가 당신에게 ‘Re:Act!’를 써달라고 접근하거든 꼭 수락하라! 당신에게도 곧 특별한 경험이 찾아갈 것이다. 쓰다 보니 이 글도 내 생각처럼 마냥 사소한 글이 되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매우 사적이고 솔직한 글인 것만은 보증한다. 마감을 넘긴 주제에 글이 너무 긴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3년 전, ‘Re:Act!’에 썼던, 모두를 감동시켰던, [ACT!]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시 옮긴다. 그리고 이건 지금도 진심이다.
지난 7년 동안,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미디어 운동의 현장소식과 고민들을 묵묵히 그리고 꾸준하게 전달해 온 것에 감사드림. 그 묵묵함과 꾸준함이 [ACT!]의 큰 장점인 것 같음. 그 묵묵함과 꾸준함은 지금은 잘 보이지 않을지 모르나, 세월이 흐른 후, 기록으로 남고 역사가 되어, 결국엔 가장 거대한 외침과 선동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 믿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