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차일드>를 발견하다
20살의 브뤼노와 18살의 소니아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낳고 행복해하는 소니아. 그런데 이런 소니아의 행복을 외면한 채, 브뤼노는 돈을 위해 아이를 팔아버리고 맙니다. 큰 액수의 돈을 받아 들고 와선 “돈이야, 우리 거야” 라며 기뻐하는 브뤼노. 하지만 아이의 어머니인 소니아는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도저히 아이를 팔아버린 브뤼노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니아가 자신을 매몰차게 외면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브뤼노는 아이를 되찾으러 달려갑니다. 그러나 팔아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선 받은 돈 이상의 더 많은 돈이 필요해져버린 상황. 그 순간 브뤼노는 선택합니다. 아이를 위해, 돈을 마련하기 위한 절도를. 하지만 설령 뜻이 좋았을지라도 절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기에 경찰에 붙잡히게 되고, 이에 브뤼노는 자신이 시킨 일이자 자신으로 인함이라며 범행을 순순히 고백합니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으로 감옥생활을 하는 브뤼노와 그런 브뤼노를 찾아오는 소니아. 감옥의 창살을 넘어 면회실에서 재회한 두 사람의 뜨거운 눈물로, 이 영화는 90분의 여정에 막을 내립니다.
만나다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혼외출생아 비율이 해마다 늘어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전체 출생아 중 2.14%가 혼외 출생아이며, 처음으로 연간 만 명을 넘어섰고, 이는 10년 새 2배 가량이 늘어난 수치랍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신생아 100명 중 2명 이상이 혼외 출생으로 태어나고 있다 하니 미혼모 및 아이들을 향한 정부차원의 구체적 돌봄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홀로 출산의 시간을 지난 연모 씨는 말합니다.
"애 아빠가 너무 힘들다며 장문의 카톡을 남기고 나선 잠수를 탔어요."
영화 속 브뤼노는 돈을 위해 아버지로서의 역할 및 아이를 포기하지만, 대한민국 현실 속에선 자기 자신의 ‘힘듦’으로 인해 아이를 포기하는 아버지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 모두를 세차게 비난하기만 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버지’ 자리에 설 준비가 미처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책임을 행할 준비, 아버지란 이름으로 불릴 준비.
브뤼노처럼 아이의 아버지가 책임을 회피할 때, 어머니와 아이는 이 세상 속에 홀로 내버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사회는 그들을 ‘미혼모자가정’이라 부르며, 사회복지 현장은 그들을 위한 보호시설 및 자립/아동양육 등을 돕는 센터를 열어 그들을 맞이합니다. 여성 혼자의 힘으로 버텨나가기엔 벅찬 생활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미혼모가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양육비는 50만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현실에 맞서 살아나가기엔 부족함이 많은 액수입니다.
정책개선을 통해 정부의 양육지원비 액수를 보다 높이는 것은, 현 문제를 풀 수 있는 매우 중대한 해결책입니다. 미혼모가 삶을 포기하거나 아이가 방치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복지 시스템을 철저하게 구축하는 일은 시대와 국적을 초월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국가의 과제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부 정책이 변화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정부를 향해 소망하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우리들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저는 시스템이란 거대한 변화를 만나기 전에, 한 인간의 작지만 큰 변화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브뤼노의 변화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인간에서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인정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변모해가는 브루노. 그의 ‘되어감’의 과정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싶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통적 결혼관의 붕괴로 인한 다양한 변화를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해마다 증가하는 혼외출생아 비율은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수치입니다. 어쩌면 복지시스템 구축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생명과 성에 대한 젊은이들이 올바른 사고와 책임의식을 갖는 일이 아닐 지요?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주체성을 가지고 그 ‘책임’을 다해갈 때, 자신의 책임을 오롯이 인정할 수 있을 때, 또한 인식된 책임을 향해서 구체적 행동을 시작할 때에 개인의 삶과 사회는 기존과 다른 변화를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사회복지를 넘은 전 영역이 감당해야할 부분일지 모릅니다.
2011년 상반기 경찰에 신고된 버려진 영아는 모두 65명으로 이 가운데 10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 태어남이 축복이 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 내몰리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길 간절히 기원하며, 이 글을 줄입니다. 부디, 모두가 건강하길, 평안하길.
[필자소개] 최은정(성공회대학교)
- 언제든 안녕을 고할 수 있길 기도하며, 낯섦이 익숙해져감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회복지, 영화에 눈뜨다!
어떤 사회복지사가 진정한 사회복지사 일지를 몹시 고뇌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사회복지 전공생으로서 사회복지 실습을 하던 중 생긴 여러 가지 고민이, 저 자신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절 향해, 어느날 또다른 질문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은정이 넌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될 거냐, 스페셜리스트(Specialist)가 될 거냐?” 예상치 못한 교수님의 질문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내 고민의 범주를 벗어난 질문에 무척 당황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아..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노인, 장애인, 아동, 청소년 등의 사회복지 각 분야 중 어떤 분야가 나와 가장 잘 어울릴까를 고민하던 내게는 참으로 낯선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질문 뒤 이어진 교수님의 한마디는, 깊이 뿌리 내려있던 내 단단한 선입견을 날카로이 관통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은 꼭 사회복지현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정말 꼭 그래야만 할까? 굳이 사회복지현장이 아니어도, 사회복지사의 마음가짐으로 어떤 일이든 한다면 그것이 곧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든 사회복지를 실천할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그것이 사회복지를 위해 더 널리 기여하는 길일 수도 있어.”
그 밤, 나는 감히 선택하였습니다.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겠다”고.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란 선택을 향한 나의 이유는 이러합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사회복지를 하고 싶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아우르는 공감대 없이 사회복지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더 많은 이들이 복지사회를 향한 뜻과 의미에 동의할 때에야만 참다운 복지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사회복지를 향한 길이 전공자들만의 걸음이 아닌, 어떠한 경계도 존재하지 않는 모든 이들의 걸음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과 바람으로 영화를 보고자 합니다. 사회복지란 안경으로.
시력이 좋지 않아 뿌옇고 흐릿하게 보이던 시야가 살짝 걸친 안경 하나로 인해 또렷이 맑게 보이듯, 내가 쓴 안경으로 미처 보지 못하고 못했던 영화 속 또다른 세상이 눈 띄워지길 희망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