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성노동자운동'이라는 현실주의

이 글은 일부 회원의 요구에 응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연구소(노사과연)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이메일을 통해서, 어떤 사람은 구두로, 요즘 일고 있는 이른바 '성노동자 운동'에 대한 연구소의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청해 왔다. 성매매를 이른바 '성노동'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성노동자운동'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도무지 그 판단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른바 '성노동자들' 자신뿐 아니라 '다함께'나 '사회진보연대', '노힘 편집팀', 그리고 고정갑희 ꡔ여/성이론ꡕ 편집주간 등등과 같은 저명한 좌파 운동단체나 좌파 지식인들이 나서서 '성노동' 규정과 '성노동자운동'을 강력하게 주창하고 있으니, 기왕에 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윤리의식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직관이나 사고방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 많은 활동가들이 혼란과 회의에 빠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렇게 여러 쟁쟁한 좌파 활동가․이론가들이 주창하고 있고, 그토록 많은 활동가들이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항, 그리하여 연구소의 입장을 묻고 있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연구소는 이 문제를 '운영위원회의'에서 간단히 논의하였다. 그 결과는 운영위원 모두가 이른바 '성노동자운동'과 관련한 최근의 동향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이었고, 일부 회원들의 질문성의 요구에 대한 답변은 내가 쓰기로 결정되었다.

다만, 이 글 내용은 물론 대체로 연구소 운영위원 개개인들의 관점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개개인들의 견해에 구속되어 기술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의 내용, 그 관점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인 나 개인에게 있음을 밝혀둔다.

그러면 지난 6월 30일에 '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이 주최한 '토론회' "성노동자운동, 가능한가?!"에서 발표되었고, '성노동자운동'을 주창하고 있는 사람들의 성매매에 대한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글들을1) 중심으로, 과연 지금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는 '성노동자운동'이 바람직한지를 보기로 하자.



1. 성매매, '성노동자운동'에 관한 관점 및 전망, 목적


방금 말한 것처럼, 우리 연구소의 운영위원들은 모두가 이른바 '성노동자운동'과 관련한 최근의 동향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인터넷 "참세상"의 댓글 논쟁에서 일부 논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수적'이기 때문도 아니고, 지난 6월 30일에 '세계여성행진과 함께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행진'이 주최한 '토론회' "성노동자운동, 가능한가?!"에서 고정갑희 ꡔ여/성이론ꡕ 편집주간이나 김정은 사회진보연대 여성부장이 주장하는 관점에서도 아니다.

고정갑희 편집주간은 이렇게 쓰고 있다.


현재 한국의 대부분(여성주의자들 포함)은 성매매는 있어서는 안 될 어떤 것으로 본다. 성노동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성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아니고 그들의 일은 노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잠실경기장의 장소계약이 파기된 것도 바로 이런 집단적 의식을 반영한다. 노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성매매"를 방지하면 매춘을 근절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갖고 있다.


김정은 여성부장도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적으로 [성매매: 인용자] 금지주의는 성이 돈으로 매매되는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보고, 사랑과 분리된 성매매를 반대하면서 국가의 규제가 성매매 근절의 해결책이라 생각해온 입장이다.


우선, 우리는 "성매매는 있어서는 안 될 어떤 것으로" 보고 있으며, "(사랑과 분리된) 성매매를 반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정갑희 편집주간이나 김정은 여성부장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매매'를 방지하면 매춘을 근절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거나, 같은 말이지만 "국가의 규제가 성매매 근절의 해결책이라 생각해" 오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성이 돈으로 매매되는 것은 [그 자체: 인용자] 도덕적 타락"이라고 보지만, 사회․경제적 원인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타락 때문"에 "성이 돈으로 매매"된다고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성매매 금지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야 그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재 한국의 대부분(여성주의자들 포함)은"이나 "역사적으로 금지주의는" 운운하는 식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너무나도 부당한 모략이다.

우리는 예컨대,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성노동자'라는 단어가 갖는 문제점을 일단 제쳐둔다면, 그리고 "성매매 폐절의 과정은 성매매 근절을 당위적으로 되뇌는 것이 아니라" 운운하는 발언이 자신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성매매 근절을 당위적으로 되뇌고 있을 뿐'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김정은 여성부장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매매는 여성의 빈곤, 저임금-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의 현실, 여성의 육체와 이미지가 상품화되어버린 [그리고 되어버리고 있는: 인용자] 상황, [가부장제적: 인용자] 가족 제도 하에서 억압당하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등 여성 일반이 겪는 문제들이 중첩되어 드러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사회구조 하에서 대부분의 성노동자들이 경제적인 동기 때문에 성매매에 유입되는데 여성의 빈곤과 성적 착취라는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진정한 탈성매매는 불가능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아직' 성매매에 유입되지 않은 여성들의 유입마저 방조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회 구조 하에서 탈성매매를 일개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성매매를 둘러싼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매매를 통해 생존을 유지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성노동이 자아실현을 위한 '노동'이 될 수 없으며 종국에는 폐절되어야 한다는 지향은 명백하다. 성매매는 여성의 육체와 성적 이미지가 상품 가치로 거래되는 성의 상품화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여성 일반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매매 폐절의 과정은 성매매 근절을 당위적으로 되뇌는 것이 아니라, 성매매의 원인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성의 상품화 등 사회구조적인 원인들을 제거하는 투쟁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만 보면, 김정은 여성부장은 이렇게 성매매의 '사회구조적인 원인'을 지적하고 있고, 성매매를 "여성 일반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폐절되어야 할 것"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그 "폐절의 과정" 혹은 방법은 그 "사회구조적인 원인들을 제거하는 투쟁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고정갑희 편집주간 같은 경우 이 점에서 전혀 관점을 달리한다는 것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렇게 말한다.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간주하는 입장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상당수 여성주의자들과 여성단체는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본다. 성매매를 인신매매 수준으로 보고 금지하고 규제하고자 한다. ... 이런 맥락에서 성매매피해여성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

성노동자 여성을 성매매피해여성이라고 놓으면 이들은 구제와 자활정책의 대상이 된다. ... 이 여성들을 단순히 피해여성의 위치에 놓고 이들을 사라져야 할 직업으로 보면, 그 행위를 계속하는 여성은 범법자가 된다.


우선, "이 여성들을 단순히 피해여성의 위치에 놓고 이들을 사라져야 할 직업으로 보면, 그 행위를 계속하는 여성은 범법자가 된다"!? 하지만, '사라져야 할 직업'적 행위를 계속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서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자본가라는 직업, 혹은, '자본가'가 '직업'이냐고 되묻고 싶다면, 고리대금업이라는 직업을 보자. 그것은 분명 '사라져야 할 직업'일 뿐 아니라, 장기적인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직업이다. 그렇다고 이 사회에서 고리 착취의 행위를 계속하는 자본가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은 될지언정, 그 자체로서 범법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완전히 비논리적인 논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정갑희 편집주간이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간주하는 입장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며, "이 여성들을 단순히 피해여성의 위치에 놓고 이들을 사라져야 할 직업으로 보면, ..." 하고 말할 때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반의(反義)일 것이다. "단순히"라는 한정어가 있고, 또 "탈성매매" 운운하면서, 예상되는 비판에 대한 방어장치를 글의 여기저기에 마련해두고 있지만, 여기에서 명백한 것은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성매매 여성은 성매매의 (단순한) 피해여성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성매매 여성은 "사라져야 할 직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참고로, 고정갑희 편집주간에 의하면, 성매매 자체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인 것이 아니라 "성노동자들이 하는 일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폭력이며, 따라서 "성노동자 여성들은 사회적 낙인이라는 폭력을 경험"하고, "성노동자들이 받는 억압은 성노동 그 자체에서보다 성노동자들이 하는 일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서 온다." 결국 성매매 그것은, 그에 대한 사회적 낙인만 제거하면, 여느 노동과 마찬가지의 노동, 구체적으로는 '성노동'일 뿐인 셈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우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아무튼, 동일하게 '성노동자운동'을 주장하고 있지만, 서로 성매매의 성격에 관한 관점이나 이른바 '성노동자운동'의 전망과 목적이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2. '성노동'․'성노동자'로 규정하고 성매매를 '비범죄화'하자는 주장의 의미

 

오늘날 '성노동자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하나 같이 '성노동의 비범죄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 "참세상"에서의 댓글 논쟁 등을 보면, 그 '비범죄화'는 결코 '합법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컨대 다음과 같은 논의까지 등장한다.

1) "실제 성매매 자체를 규제하지도, 성매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의 비범죄주의 국가에서 매춘을 목적으로 ..." 운운,

2) "남성들이 합법적으로 성을 살 수 있는 권리 운운하며 성노동자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합법적 규제주의를 우리는 반대한다" 운운,

3) "비범죄주의를 통해 우리는 성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면서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사회구조적인 원인들을 인식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운운, (이상, 김정은의 "성노동자의 투쟁에 연대하자!"에서).

우선, "성매매 자체를 규제하지도, 성매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 비범죄주의"? ― 이는, 명색이 '노동해방'․'여성해방'을 노래하는 '좌파' 지식인, '좌파' 활동가들이 얼마나 파쇼적 법률제도에 길들여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발언이다. 그들은 법률이 금지(규제)하지 않는 것을 합법(소위, 네거티브 씨스템)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예컨대 한국의 노동조합처럼 법률에 의해서 일정한 요건 하에 명시적으로 인정되고 조성되는 것만을 합법(소위, 포지티브 씨스템)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의 경우 그것이 '비범죄화'되면, 그것은 바로 성의 매매, 즉 그 '구매'와 '판매'가 합법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저들이 성매매의 '비범죄화'를 주장하면서 "남성들이 합법적으로 성을 살 수 있는 권리 운운하며 성노동자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합법적 규제주의를 우리는 반대한다" 운운할 때, 그들은 "남성들이 합법적으로 성을 살 수 있는 권리"나 그것을 운운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노동자를 국가 차원에서 규제하는 것"만을 반대하는 것으로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비범죄주의를 통해" 합법적으로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성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비범죄주의를 통해 ...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사회구조적인 원인들을 ... 제거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문구가 된다.

실제로 저들이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규정하고, 그리하여 '성노동자운동'을 통해서 달성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보자.


1) 김정은 여성부장의 경우

"성매매를 둘러싼 사회구조적인 요건들"을 논할 때 우리는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본다. 그리고 '좌파' 활동가로서의 그의 면모는 그가 "성매매 여성은 우리의 자매이고, 노동자다!"며, "성매매를 비범죄화하자"․"성노동자와 연대를 실천하자"고 주장할 때 만나게 된다. 이때 그는 말한다.


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노동에 의한 대개['대가'의 오타인 듯: 인용자]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으로서 노동자'라고 말하며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성산업의 일환인 성매매에 종사하는 이들이 정말 노동자가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자신의 임노동을 팔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 그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 자신의 임노동을 팔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하고,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 또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인데, "이들이 정말 노동자가 아닌가" 하고, 김정은 여성부장은 묻고 있다.

여기서 그가 '노동', 혹은 '노동자'라고 얘기할 때, 그가 그로써 '임금노동', 혹은 '임금노동자'를 의미한다는 것이 우선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대답 대신 내가 묻고 싶다. 김 여성부장은 그 바로 두 문단 앞에서 "성매매는 여성의 육체와 성적 이미지가 상품 가치로 거래되는 성의 상품화의 한 형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력(노동능력)을 파는 것인가, "여성의 육체와 성적 이미지가 상품화된 성"을 파는 것인가? 혹은, "상품화된 성 = 노동력"인가? 그리하여 포주는 그 노동력을 사는 자본가 혹은 고용주인가?

김정은 여성부장은 다시 말한다.


성매매 여성들을 성노동자로 인정하자고 했을 때, "성매매를 노동으로 긍정함으로써 성매매를 지속시키자는 것 아닌가?"하는 물음들이 제기된다. 과연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칭하면 성매매가 확대될 것인가. 그렇다면 그동안 성매매가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행위라고 명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성매매가 노동이냐 아니냐의 성격 규정은 성매매 감소․확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다. 성매매가 노동이냐 아니냐의 성격 규정은 순수하게 이론적인 문제이지, 그 성격 규정 자체가 "성매매 감소․확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성매매가 노동이냐 아니냐의 성격 규정은 성매매 감소․확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등의 질문은 김 부장 등에게 '제기되는' "성매매를 노동으로 긍정함으로써 성매매를 지속시키자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들에 대한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 지속시키자는 것 아닌가" 하고 의도를 물었던 것인데,2) 동문서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였어야 솔직할 것이다. 김 여성부장 등이 '성매매'를, 그리고 '성매매 여성'을 그렇게 "성노동", "성노동자"로 규정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비범죄화', 즉 합법화시키기 위해서고, 그를 통해서 그들 성매매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성매매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다.

아니라고? 그러면 보자.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성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장 '폐쇄'가 아니라 자신들이 착취당하지 않고 노동할 수 있는 집단적인 권력을 형성하는 권리 쟁취의 과정이다.


자, 여기에서 "노동할 수 있는" 운운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저들의 표현으로 하면, 바로 "성노동을 할 수 있는" 운운의 의미이고, 정확하게 말하면, "성매매를 할 수 있는" 운운의 의미가 아닌가? 바로 그를 위해서 그는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성매매 여성을 성노동자로 규정하자는 것이고, "성매매를 비범죄화하자"라든가 "성노동자와 연대를 실천하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성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라는 훌륭한 의도에서!


2) 고정갑희 ꡔ여/성이론ꡕ 편집주간의 경우

앞에서도 잠깐 본 것처럼 고정갑희 편집주간의 경우 "성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권...보장"이라는 훌륭한 대의를 관찰시키는 데에 더욱 적극적, 혹은 노골적이다. 그리고 횡설수설과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성노동자 여성을 성매매피해여성이라고 놓으면 이들은" (생존권은 몰라도) 노동권이, 즉 성노동을 할 권리가 박탈된 "구제와 자활정책의 대상"이 되므로 그렇게 '놓아서는' 안 된다. "성노동이라는 단어는 성매매의 비범죄화와 연결될 것이다." 그런데 "성매매는 남성집단이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라는 사회적 힘을 활용하여 영성을 찾는 행위다." 그러니, "성노동이라는 단어가 연결"되는 "성매매의 비범죄화"는 다름 아니라 남성의 성 구매의 비범죄화, 그것도 남성의 집단적 성 구매의 비범죄화다.

보다 명확하게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남성 집단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대상화하고, 상품화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한는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성매매 현장은 바로 피해자 여성들의 일터이고 숙소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남성들이 아니고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어려움이 있다.3) 그래서 발표자는 남성들이 대상화하며, 남성들의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은 직업인 성매매를 성노동으로 보고 이를 비범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법[성매매방지법: 인용자]에 피해를 보는 쪽은 여전히 여성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이 남성구매자를 처벌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 여성들도 함께 범법자로 남게 되거나, 생존이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적인 논리로 남성 구매자가 없을 경우 여성들의 직업이 유지되지 않는 측면 때문에 열어 놓는 것" 운운하기도 하고, 이렇게도 말한다.


인권의 논의를 노동권[즉, 성노동을 할 권리: 인용자]의 논의로 바꾸어 말하면 성노동자 여성들에게 초점이 맞추어 지면서 현재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인권은 보호차원에서나 시혜차원에서 이야기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나 노동권으로 가면 행위자의 주체성을 좀더 확대할 수 있다.


연전에 일본에서는 '남녀평등'의 이름으로 "노동기준법" 상의 여성보호조항들이 대폭 삭제되는 노동법 개악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여기에서는 '보호차원'이나 '시혜차원'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이 삭제되고, "행위자의 주체성"이라는 이름으로 노동권, 즉 성매매를 할 권리가 권장된다. 그리고 이 주체성은 논의는 다음과 같이도 발전한다.


김강자씨가 공창제를 이야기할 때, 공창제는 여성들에 대한 경찰의 보호를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보호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스스로의 조직력을 가지고 시민으로서 경찰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역사를 반전시키는 공창제조차 바람직스러운 것이다. 단, 자신의 '성매매의 비범죄화' 구상보다는 덜 바람직스럽지만!

마지막으로, 자본주의를 논하고 '노동'을 설파하는 고정갑희 교수의 자본주의에서의 노동, 임금노동에 대한 이해의 일면을 보자. 이렇게 쓰고 있다.


일단 자본주이 자체에서 자본가들은 여성들의 일이 노동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재생산 영역에 남아 남성들의 생산을 도와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본축적이 가능하기를 바랄 것이다.


어떤 자본주의, 어떤 자본가인가? 그리고 '노동'이 아니라 "재생산 영역에 남아 남성들의 생산을 도와주는 역할"이라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자본주이와 자본가가 여성을 가정에서 사회로, 가정에서 공장으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가정으로 몰아넣고 있단 말인가?

이 정도의 지적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이 생산하고 있는 '성노동자운동론', 즉, "성노동자 여성을 성매매 피해여성이라고 규정하면 이들은 구제와 자활정책의 대상이 될 뿐"이므로 "노동이라는 단어를 통해 성매매 여성들은 저항하고 방어하는 주체가 되며 자치조직이나 노동조합의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는 주장이 도처에서 들리는 현실 ― 이것이 바로 '성노동자운동'을 주장하는 '좌파' 지식인, '좌파' 활동가의 현실이다.



3. 좌파 활동가들이여, 매매춘의 자유권을 획득하고, 포주를 찬양하자!


'성노동'․'성노동자운동'이라는 규정 하에 성매매를 비범죄화, 즉 합법화하자는 것은 경찰관리(였던) 김강자씨가 '공창제' 도입을 주장했던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각국의 법률이 성매매를 금지했다면, 그것은 인권의식이 성장한 노동자․민중의 획득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서유럽 일부 국가에서 다시 그것이 '비범죄화', '성적자결권' 등의 이름으로 합법화되고, 또 한국이나 동남아 여러 국가들에서처럼 일부 국가에서 그것이 법적 규제․금지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만연해 있다면, 그것은 대중의 광범한 빈곤과 말기 자본주의의 퇴폐, 부르주아지의 위선을 표현하는 것이지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노동'․'성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성매매를 합법화하자고 하는 반동적 요구가 상당수 '좌파' 활동가들의 지지․주목을 받는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관련 '좌파' 활동가들의 상상력의 부족,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무지를 별도로 한다면, 이는 아마 "성매매 여성의 극악한 현실"(엄혜진) 혹은 소위 "성노동자들의 냉엄한 현실"(이선희)에 대한 깊은 동정, 그리고 '성매매의 비범죄화'와 '성노동자운동'을 통해서 그러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선동에 의한 것일 것이다.4) 그러나, 이른바 '성노동자운동'은 다분히 수상하게 진행되고 있고, '성매매의 비범죄화'는 (인터넷 "참세상"에서 퍼온 것이지만) 이 책의 "자료"로 싣는 "성매매를 법화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성매매 여성의 처지를 개선하기보다는 포주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될 것이다.

'성노동'․'성노동자'를 얘기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자본제적 관계도 없다. "성매매종사여성에게 가해지는 구타, 감금, 선불금 착취고리" 운운하면서도 거기에서 '채무노예' 대신에 '성노동자'를 보는 '좌파' 지식인, '좌파' 활동가들이 못내 의아스럽기만 하다. 실제로는, "구타, 감금, 선불금 착취고리"뿐 아니라 '선불금 착취고리'를 매개로 인신매매가 광범하게 벌어지고, 감금된 채 불타죽고, '성노동자운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발적 성매매"를 얘기할 때 다른 한편에선 "선불금을 내세운 업주의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음독자살"5)하는 것이 '성노동자들'이 '노동'하는 현장의 풍경이다.

"‘성 노동’이라는 용어는 성매매 여성들이 범죄자가 아닌 노동계급의 일부이고 그들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뜻에서 사용한 것이지, 맑스주의적 의미의 노동 개념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는 ꡔ다함께ꡕ(제60호, 2005. 7. 23. - 8. 19.)의 변명은 구차하고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개인의 선택(그것이 진정한 자유와 거리가 멀다 해도)에 따른 성매매까지 금지하는 것은 자신의 성을 팔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성노동자')를 억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ꡔ다함께ꡕ, 제59호)던 주장을 상기하면, 부정직하기까지 하다.

"노동은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성노동(성적인 서비스노동)을 다른 범주의 노동과 차별화시키는 것 자체가 형용모순"(이황현아)이라는 주장이나, "(비아냥거림과 웃음이 섞인 말투로) 업주들이 우리를 막 폭행한대요. 다리에 멍도 들었는데 화장해서 다 가렸데요. 언론에서 그러더라구요, 푸히히~"(박명선) 하는, '한 성노동자'의 '비아냥거림'에 빗댄 ꡔ노동자의 힘ꡕ(제82호, 2005. 7. 15.)의 비아냥거림은 사람을 정말 아연케 한다.

고정갑희 교수 같은 분들이야 되는 말 안 되는 말 멋대로 횡설수설 떠들면서 자신의 무지와 매매춘을 옹호하고 포주를 위해 '노동'하는 이데올로그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놔두면 그만이지만, 책임 있는 활동가라면, 무책임한 호사가가 아니라 노동운동․여성운동의 책임 있는 활동가라면, 이른바 '자발적인 성노동자들'이 벌인다는 '성노동자운동', '성매매 비범죄화운동'이 어떤 숨은 목적으로 어떻게 수상하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혹시 자신들이 '성산업', '성매매의 합법화․자유권'을 요구하는 음성적 포주단체들의 선전․투쟁도구로 전락해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볼 일이다.

'전국성노동자연대 한여연'(전성노련)의 정희주 부대표는, "7․3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세계여성행진'에 참가하면서"라는 발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행 성매매 금지주의 하에서는 대한민국의 성인들은 누구나 예비성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신체의 자유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성노동과 관련하여 성인 남녀 모두에게 비범죄주의를 적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성노동자들의 노동권 또한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고정갑희 교수가 "성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 "경제적 논리"를 들어서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본 바 있지만, 이제는 아예 '대한민국 성인들 누구나 예비성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는 폐단을 없애고 신체의 자유권6)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성노동과 관련하여 성인 남녀 모두에게 비범죄주의를 적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무슨 말발인가?

'성노동자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빙자하여 성인 남녀 모두의 매매춘의 자유권을 요구하는 이러한 주장은, 6월 30일의 토론회에서의 '전국성노동자준비위원회 한여연'의 이선희 씨의 발언에서는 다음과 같은 궤변으로 나타난다.


성 구매자에 대한 처벌은 우리를 더욱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하게 합니다. 성 구매자들은 자신들이 처벌을 각오하고 우리를 만나는 것에 대해 매우 불공평해하며 심리적으로 노동자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이게 되어 결과적으로 강도 높은 성노동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서 이 매매춘의 자유권은 "성인 남녀들의 성적자율권"으로, 그에 대한 금지․규제는 "전근대적인 발상으로 있어서는 안될 일"로 규정된다.

이제 이 '자발적 성노동자운동'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가늠해보기 위해서 정희주 부대표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경청․음미해보자.


성노동자들 절대다수는 가족들의 가난을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힘든 상황에 놓인 여성들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벼랑에 몰린 가족들은 생계와 병마에서 헤어날 길이 없고 결국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로 추락하고 맙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최소 몇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이미 손쓸 정도가 없을 정도가 되어 채권자들의 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 그런 극단적인 경제상황에서 성노동자들은 업소에 가서 선불금을 요구하는 것이죠. 이것이 선불금의 가장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면 업주들은 사채나 은행대출을 받아 성노동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매매 특별법에서는 성매매와 관련한 선불금을 무효화시키면서 선불금을 주는 업주가 무슨 악마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는데, 그건 잘못 이해된 측면이 있습니다. 만약 돈을 미끼로 강제로 강제로 성매매시킨다면 그런 사람은 당장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돈은 물론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일하는 집창촌에는 업주에게 어느 정도의 선불금을 받은 성노동자 다수는 선불금 무효화 조항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떼먹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빌린 돈은 갚아야 한다는 도의적인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히 성매매 특별법 이후 남아 있는 업주들은 영세한 분들이 많아 어쩌면 빈민들끼리 기대어 사는 게 요즘 집창촌 모습이라고 보셔도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정도가 되면 성매매 시장의 선불금은 숫제 상부상조기구가 되고, "사채나 은행대출을 받아" 그것을 주는 포주는 구세주, 최소한 사회복지가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자발적 성노동자들"의 '자발적 운동'의 핵심 간부가 내뱉는 말이다.

'포주와 함께 하는 성노동자운동'의 이러한 어이없는 포주 옹호, 노예 근성은 한여연 이선희 씨의 발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알선업자에게 내리는 처벌은 기실 성노동자들을 길거리로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알선업자란 성노동자들과 협업이 가능한 '정직한 업주'를 가리킵니다. 우리 성노동자들은 일정한 영업장소와 주거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결국 음성 성매매 시장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은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골간은 사유재산제입니다. 따라서 정직한 업주가 자신의 사유재산을 투자해 우리들과 협업할 때 성노동자들은 분배의 원칙이 합리적이라면 흔쾌히 응할 것입니다. 성특법 하나를 두고 '정직한 업주'조차 뿔달린 악마로 묘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가? 자칭 '자발적 성노동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사람들의 발언이 이런데도, "성매매방지법에 대한 성노동자들의 반대를 그저 포주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ꡔ다함께ꡕ, 제59호)인가?! "회사의 이익 없이 우리의 이익 없다"고 주장하는 노동자계급 내의 자본 측의 앞잡이들의 논리를 닮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구나 최근의 '성노동자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명씩의 성매매 여성을 동원하는 배후에는, 아니 바로 그 현장에도 포주와 그들이 동원한 폭력배들이 얼씬거린다는 여러 지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짐짓 이를 외면하고, 그에 대해 침묵하면서 '성노동자운동'을 주장하는 데 열심이다. 그리고 ꡔ다함께ꡕ(제60호)의 경우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망발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한여연이 포주들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그 조직이 성매매 여성들의 조직이라는 것을 규정하는 데는 별로 중요치 않다. 성매매 여성들의 운동이 포주와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한편, 이러한 망발을 유도한 (필시 '다함께'의 다른 회원의 것일) 다음과 같은 발언도 아주 흥미롭다.


<다함께> 59호 성노동자 관련 기사에서 정진희 씨는 한여연이 단순히 성매매 여성들의 자치기구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여연은 포주, 조폭 등도 연계된 ‘한터성산업인연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체로 알고 있다. 실제로 이 날 집회의 사회자 역시 포주라고 알려져 있다.

오히려 이번 집회가 성매매 여성들(개인적으로 성노동자라는 표현에 혼란스럽다)이 “자기해방”하는 중요한 과정의 일부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이 동원되었느니, 사실은 친포주적인 여성들만 나왔다느니 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다음 신문에서는 예전 성매매방지법 제정 시기에 성매매 여성들의 집회에 등장했던 몇몇 친포주적인 분위기(포주들을 삼촌, 이모 등으로 호칭하며 한편으로 생각함)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현재 성매매 여성들의 투쟁이 “이상적인 투쟁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빼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다뤄 줬으면 좋겠다.7)


"한여연은 포주, 조폭 등도 연계된 ‘한터성산업인연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체로 알고" 있고, "실제로 이 날 집회의 사회자 역시 포주라고 알려져 있다"면서도, "오히려 이번 집회가 성매매 여성들(개인적으로 성노동자라는 표현에 혼란스럽다)이 “자기해방”하는 중요한 과정의 일부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이 동원되었느니, 사실은 친포주적인 여성들만 나왔다느니 하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니! '다함께'가 얼마나 어이없고 종파주의적인 성향의 단체인지를 짐작케 하는 한 예일 것이다. 하기야, 극악한 반쏘주의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악선전을 '노동자계급 해방'의 깃발로 삼고 있는 집단이니 ...



4. 전망을 잃은 타락한 현실주의와 방향착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오늘날 상당수 '좌파' 활동가들이 '성노동'․'성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성매매를 합법화하자고 하는, (그리하여 포주의 이익에 봉사하자고 하는) 어이 없는 반동적 요구를 하고 나서고 있는 바탕에는 "성매매 여성의 극악한 현실"에 대한 깊은 동정이 있다. 그리고 '성매매의 비범죄화'와 '성노동자운동'을 통해서 그러한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선동에 부추김 받아 이성을 잃고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나는 "성매매 여성의 극악한 현실"에 대한 그들의 깊은 동정을 존중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레닌이 필시 그랬을 것처럼.


얼마 전 매춘부들이 그 ‘불행한 상행위’를 하다 경찰의 단속에 걸려 투옥 되었을 때, 로자는 글을 써서 그들을 변호하였지요. 그때 로자는 한 명의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여 동정을 표했던 것입니다. 그녀들은 가엽게도 부르주아 사회에 의한 2중의 희생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저주받을 사유재산제도와 그 추잡스러운 도덕적 위선에 의한 희생자지요.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어지간히 마음씨가 거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근시안을 지닌 자만이 이 점을 잊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8)


그러나 나는, 성매매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전락한 여성들의 처지를,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개선시키려는 의도를 레닌식으로 "엉뚱한 사업" 의도라고 규정하면서9) '그리도 할일이 없느냐'고 물을 생각은 없지만, 그것이 분명 방향착오에 의한 반동적 요구, 반동적 운동이며, 그를 통해서 '좌파' 이론가, '좌파' 활동가들이 포주의 선전․투쟁 도구로 전락해 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좌파' 이론가, '좌파' 활동가도, '자발적(?) 성노동자들'도, 그들이 '구제와 자활 정책'의 대상이 되는 것, 혹은 그러한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고, "생존권"․"노동권" 운운하면서 "성매매의 비범죄화", "성노동자운동"을 주장하는 경제적 논거를 그 구제와 자활을 위한 정부의 경제적 지원이 그들의 생존을 위한 비용에 태부족하다는 데에서 찾고 있다. 그야말로 전망을 잃은, 타락한 현실주의가 아닐 수 없다.

포주의 '생존권'이 아니라 그들 불우한 처지로 영락한 여성들의 생존권이 문제라면,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까?

지금 저들 '좌파' 이론가, '좌파' 활동가도, '자발적(?) 성노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매매의 비범죄화"라는 이름으로 매매춘의 합법화, '매매춘의 자유권'을 쟁취하는 방향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정부, 국가에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구제와 자활 정책을 요구하며, 그것을 쟁취하는 방향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답은 저절로 명백할 것이다. 진실로 '좌파' 이론가다운 '좌파' 이론가, '좌파' 활동가다운 '좌파' 활동가라면, '성노동'이니 "성인인 성노동자 자신들의 자율의지"니, "성적자율권"이니, "신체의 자유권"이니 하는 양두구육을 내걸면서 포주들의 추잡한 이익에 봉사하는 대신에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구제와 자활 정책을 요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의 주체적 투쟁이 문제가 된다면, 바로 그러한 자활정책을 요구․쟁취하는 투쟁으로 그들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들의 행태, 저들의 몰골은 어떤가?

포주들의 어리석은 앞잡이, 바로 그것 아닌가?

허깨비는 가라!




'성노동자운동'이라는 현실주의



                                              채만수 | 소장 |





1) 이 토론회에서는 고정갑희 ꡔ여/성이론ꡕ 편집주간(한신대 영어영문학과 교수)가 "한국 성노동자 운동과 세계여성행진: 젠더-섹슈얼리티 정의에 입각한 '어너더 월드 이즈 뽀시블'"이라는 멋드러진 제목으로, 세계화반대 여성연대의 엄혜진 씨가 "세계화 시대, 성매매를 저항의 공간으로"라는 제목으로, 김정은 사회진보연대 여성부장이 "성노동자 투쟁에 연대하자!"는 제목으로, 그리고 전국성노동자준비위원회 한여연의 이선희 씨가 "한국의 성매매 특별법이 선노동자들에게 끼친 영향"으로 발표하고 있는데, 이들 네 사람의 주장은 이른바 '성노동'의 합법화(그들은 '비범죄화'라고 표현하고 있고, 또 인터넷 "참세상"의 댓글 논쟁에서는 '합법화'와 '비범죄화'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지만)와 '성노동자운동'을 주장(다만, 엄혜진 씨는 이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주장한다)하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여러 논점에서는 서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기도 하다. 이하의 논의에서는 몇 가지 견해의 차이가 지적되기도 하겠지만, 이들 논자 간의 차이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2) 이 질문은 물론 '성노동'이나 '성노동자' 규정의 이론적 타당성 여부를 묻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이나 항변으로서는 충분치 못한 것이다.


3) 그러나, 뒤에서 보겠지만,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은 어려움이 아니라 바로 그의 무지와 상상력 부족일 뿐이다.


4) "성노동자들의 처지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성노동자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 사회진보연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등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성노동자 운동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ꡔ다함께ꡕ 제59호, 2005. 7. 9. - 7. 22.)


5) www.ildaro.com, 2005. 7. 12.


6) "신체의 자유권"? '성노동자의 노동권'이 그렇듯이, 결국 '매매춘의 자유권'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7) "성노동자 기사에 관하여", ꡔ다함께ꡕ, 제60호.


8) 클라라 체트킨, 「여성문제에 대한 레닌과의 대화」(이 책 "자료" 부분의 "매춘부를 위한 신문을 만드는 문제" 참조,


9)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매춘부를 ―글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단결시키고 그녀들을 위하여 신문을 펴내 특별한 혁명적인 전투부대로 양성하는  일이 의미 있는 사업일 수 있을까요? 실제로 독일에는 미조직 상태의 노동여성이 없다는 얘깁니까? 바로 이 사람들을 위하여 신문이 발행되어야만 하며, 그녀들을 당신들의 투쟁에 동지로 끌어 들여야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중대한 사업을 방기하고 다른 엉뚱한 일에 정력을 기울여서야 되겠습니까? 이러한 엉뚱한 사업을 듣고 보니, 모든 매춘부를 가련한 마돈나로 만들어내는 문학계의 풍조가 떠오르는군요. 애초부터 이 풍조가 그렇게 불건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요컨대 거기에는 인간적 동정이라든가, 고상한 척하는 자본가의 도덕상의 위선에 대한 작가의 반항이 담겨 있었지요. 그러나 그 취급방식이 차차 부패,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곳)


덧붙이는 말

"생각하며 투쟁하는 노동자의" [정세와 노동] 4호 (200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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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퍼나르미

    그냥 상대방의 말들을 인용해 놓고,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 말이 안된다느니 아연케 한다느니 하는 식의 비난문구를 덧붙이는 것으로 논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채만수 소장의 논점은 90%가 말꼬리 잡기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고, 게다가 자신의 결론에서 주장한 '실질적인 구제와 자활 대책 요구'라는 것도 사실은 성노동 운동과 그렇게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봐야 한다. 고정갑희 교수가 말한 것도 실질적인 구제와 자활 대책이라는 것이 아예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성매매 여성들을 그것의 대상으로만 대상화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일 것이다. 게다가 실질적인 구제와 자활대책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성매매를 폐절할 수 있을 정도로 '실질적'이기 위해서는 한국의 자본주의 구조 자체가 뒤집어져야 가능할 것인데, 그것이 조만간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한다면, 채만수 소장의 '실질적 구제와 자활대책' 운운도 사실은 공문구이며 과장된 수사에 불과할 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현재 실존하는 (그리고 앞으로 실존할) 성매매 여성들의 문제인데, 이는 단지 자활대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 아닌가? 삐까 번쩍한 정부의 자활대책이 나올 때가지 성매매 여성들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인가? 성노동운동은 명백히 탈성매매에 대한 반대 운동이 아니며, 성매매의 폐지를 지향하기 때문에(논쟁은 어떤 성매매 폐지를 어떻게 지향할 것인가에 있다), 성매매를 영속화시키려는 성매매 합법화론과 선을 긋고 '비범죄화' 노선을 택하고 있음은 논쟁을 쫓아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아마 '다함께' 정도가 이 점에서 아직 분명칠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채만수 소장이 열을 뿜으면서 주장을 했지만 사실 에너지만 헛되이 쓴 것에 다름 없다. 우리는 심지어 성노동자 운동이 탈성매매를 위한 자활대책 등의 요구를 자신의 중심적인 투쟁사업 가운데 하나로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신매매' '인신구속' 등에 명확히 반대하는 성노동자 운동은 자유로운 탈성매매가 원할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만수 소장이 제기한 쟁점은 사실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별로 날카롭지도 못한 허깨비 쟁점에 불과하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서 질문으로 답하는 것이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채만수 소장에게 되묻는다. "성상품화 = 노동력"이 아니라면, 이효리의 "성상품화" 또한 "노동력"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효리야 지금 길바닥으로 쫓겨나도 오래 동안 잘 살만큼 돈이 있을 것 아닌가? 반면 성노동자들은 지금 길바닥으로 내쫓기면 더욱 더 무권리의 극단적 폭력이 지배하는 곳으로 음성화되거나 해외로 원정을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자칭 좌파인 채만수 소장은 연예계 부터 정리하고 나서 성노동자들을 길바닥으로 내쫓는 일에 뛰어 들든지 말든지 해야 순서가 맞는 것 아닌가?

    마지막으로, 채만수 소장은 자본주의가 여성들을 가족으로부터 불러냈다고 주장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는 오히려 여성들을 가족으로 유폐시킨 대표적인 생산양식이다. '가족임금'(남성노동자의 임금이 여성과 아이들의 임금까지 대표하게 되는)이라는 것이 확립된 과정이 그것을 웅변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노동은 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비공식적인, 주변화된 노동, 혹은 남성노동의 산업예비군적 성격으로나 존재할 뿐이다. 바꿔 말하자면, 그러한 주변적 노동으로서의 여성노동이란 가족 내로의 여성의 유폐를 전제로 한 것이지, 결코 가족으로부터 어느정도 독립해 나와 형성된 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여성은 가족 내에서의 희생과 주변화된 노동의 초과착취를 강요당하고 있다(성특법의 여성부는 또한 여성가족부임을 잊지말자). 반면, 집요한 편견과는 반대로, 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력의 저발전으로 말미암아, 지배계급에 속하는 여성들을 제외한 피지배계급의 여성들은 생산 활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서도 물론 남녀 위계가 있었지만, 여성 노동력의 가정으로의 유폐는 (자본주의에서와는 달리) '구조적으로' 불가능했었다. 이렇게 봤을 때,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적으로 가장 성차별주의적인 생산양식이다.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고증했듯, 오히려 19세기에 나타났던 부르주아 가족 모델의 노동자 계급 내로의 수입이야말로 결정적으로 여성의 가족내로의 유폐가 일어났던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이를 통해서만 민족-국가는 자신을 지배적인 양식으로 조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가족 혹은 가족이데올로기가 위기에 처하기 시작했을 때(낙태 문제 등을 둘러싸고), 민족-국가도 함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봤을 때, 남자는 밥벌이하는 사람(breadwinner)이 되고, 여성은 집안에서 가정을 돌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전자본주의에 특징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실 이러한 여성의 가족으로의 유폐는 나중에 미국 자본주의의 헤게모니가 확립되던 때(1940년대, 50년대)에도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즉 핵가족의 노동계급 내로의 일반화(포드주의와 함께 진행된). 편견에 빠져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채만수 소장인 셈이다.

    물론 쟁점은 있다. 성노동자 운동 내에서도 (부지불식간에 혹은 의식적으로--후자는 이성숙씨 등이 대표적일텐데) 성매매의 폭력성을 부인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나도 감지하고 있는 바다. 따라서 성매매의 '궁극적' 폐절이라는 관념에 대해서 다시 이론적으로 생각해 봐야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성매매의 영속화와 실천적으로 구별되지 못할 수 있을 위험성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매매의 형법적 폐절이 아닌 정책적 폐절 혹은 차라리 감소의 노력을 성노동자들의 자기 조직화와 함께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양자는 보기보다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현재의 논쟁의 대립구도는 이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성노동 운동을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매매의 폐절을 어쨌든 여하한 방식으로든 지향하고 있다. 이를 무시하고 합법화론과 비범죄화론을 폭력적으로 동치시키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기본이 안된 자세일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국가는 이제껏 포주의 역할을 도맡아 왔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다면, 그러한 포주의 '영업방침 변경'(사실은 개악에 가까운)을 근거로 해서 작은 포주와 큰 포주를 대립시키고 큰 포주의 편에 서는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일 일은 아니지 않나?

  • 또 시작이군!

    누가 포주들을 찬양하라고 하나? 의견 차이를 따지지 않더라도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 생각을 왜곡하는 것은 채만수의 독특한 취미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채만수가 자기 스스로는 '실질적인 구제와 자활대책 노력'이라는 몰계급적이고 반동적인 부르주아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