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통史(2)

- 활동 침체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롭게 조직강화의 단초를 마련했던 95년~98년 -

북의 핵문제와 6자회담, 그리고 평화체제 논의가 마구 쏟아지는 요즘의 정세는, 얼핏 제네바 합의 이후 미국의 중유공급 지연과 공약 불이행, 4자회담, 한반도 평화협정 거론 등으로 의 이어졌던 95년~98년의 정세와 닮아 있다.

1995년 7월에 있었던 1차 정기총회에서 평통사는 2기 사업계획을 결의하며 “북미 간에 새로운 관계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북한과 미국의 적대적 군사. 정치 대결은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이 가시화되면서 평화협정체결 논의의 진전으로 완화되어 갈 것이며 남북 당사자간의 평화군축. 합의서 이행. 통일방안 대화가 활성화될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 남북해외동포의 거족적인 통일운동의 활성화는 위의 모든 변화를 추동할 근본 동력으로서 작용할 것이다”라고 정세를 전망하고 “조국의 들판에 평화와 통일의 씨를 뿌리는 선구자”가 되자고 결의하였다.

이러한 정세인식 속에서 평통사는 95년 NPT 시한 만료에 즈음한 각계인사 300인 공동선언문 “우리는 핵무기 전면 철폐,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전면 개편을 요구한다.(1995.4.7)”에 참여하였다. 또한 NPT를 연장 여부를 검토하기 위한 NPT 회의가 열리는 시기에 뉴욕에서 개최된 뉴욕 ‘무기확산 저지 국제대회’에 10여명의 대표단을 구성하여 참여하였다.
당시 해외 평화운동 단체들은 핵 강대국들의 핵군축을 주장하고 있었다. 평통사 대표단은 뉴욕 국제대회에서 ‘동북아 정세와 평화군축’. ‘미군기지와 미군범죄 문제’를 주제로 한 워크숍을 개최하고, 미국‘핵확산 정책의 이중성과 뻔뻔함을 신랄하게 풍자한 최병수 작가의 걸개그림 2장 전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때 전시된 최병수 작가의 걸개그림은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 숫자를 의미하는 “9680”이라는 작품이었다.
20개국 71개 단체가 참여한 NPT검토 확대회의 엔지오 철폐회(The NGO Abolition Cancus)는 “핵무기없는 세계는 인류의 공통된 열망이다. 이러한 목표는 소수의 국가들에게 핵무기 보유를 합법화해 주고 있는 NPT 체제로 실현될 수 없다. 우리의 공통된 안전은 핵무기의 완전한 철폐를 요한다. 우리는 NPT의 무조건적인 연장을 반대한다. 우리의 목적은 핵무기의 확실하고 무조건적인 철폐이다.”라는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평통사도 물론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 NPT 연장이 결정되었으며, 평통사는 2005년에 개최된 NPT 회의에 다시 한 번 참가하여 북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이고 이중적인 정책을 소리높여 규탄했다.


▲ 95.4 평화대회에 참가한 임종철 공동대표 뒤쪽으로 최병수 작가의 '9680'이 보인다.

평통사는 평화체제 논의와 더불어 군축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95년 6월에 발간된 회지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제 6호에는 “한반도가 가야할 길, 군축 (김엘리)”가 실려 있다. 이 글에서 김엘리씨는 “군축은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체제를 마련하는데 필수이다. 군축은 당사자들에게 신뢰를 주고 군사적 수단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는 의지이자 실질적인 조치”라며 “과도한 군비증강은 전쟁을 억지시킬 수 없고 긴장과 적대감만을 더하여 전쟁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세계대전 통해 경험”하였고, “군수업자들의 이익만 높”이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군사안보전략도 “우세한 전력과 무기를 갖추어 힘의 우세를 통해서만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는 억지론에서 상대방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자신의 안보에도 유익하다는 민족공동안보 개념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하였다.

96년부터는 “용산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시민의 모임 준비모임” 참여하면서 용산미군기지 반환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97년에는 8월에 “한반도 통일정세와 평화체제 구축의 방향”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현 평화통일연구소 소장 강정구 교수는 “한반도 통일정세와 4자회담의 과제와 전망”이라는 주제발표를 하고 신냉전이 도래하기 이전에 남과 북이 민족공조를 통해 민족통일을 이뤄내는 과업이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96년, 97년에 평통사는 조직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재적회원은 200명이 넘었으나 실제 애정을 갖고 회비를 내며 활동하는 이는 수십 명에 불과했고, 평화운동의 전문성 부족, 회지발간 역량 등 상근 인력 부족, 회원 활동 침체로 존폐위기에 놓였다. 당시 김영상 정권의 노골적 반북정책과 북의 유례없는 식량부족 사태, 그 후에 이어진 남의 IMF 사태로 인한 어려운 경제상황 등은 통일운동 진영의 분열이라는 주체적 조건과 맞물려 운동니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상황이기도 했다.


▲ 1997년도 2차 정기총회

2년여 간의 침체기를 거쳐 98년에 들어서면서 평통사는 차츰 자리를 다잡기 시작한다.
1월 3차 정기총회에서 “평화와 통일을 빼놓고는 그 어떤 이상론도 허망한 가치일 뿐이며, 그 어떤 현실론도 평화와 통일을 빗겨가서는 철저히 비현실적인 농담일 뿐이다. 또한 ‘평화’를 내세운 그 어떤 선평화론 또는 현상고착론도 모두 반평화적인 전쟁론의 위장일 뿐이며 ‘통일’을 앞세운 그 어떤 연착륙론 또는 자기 우월론도 모두 비통일적인 분단론의 연장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평화로 열어가는 통일, 통일로 이루어내는 평화’만이 우리 민족을 살리고 세계가 어울려 사람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길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통일운동을 심화시키는 평화운동, 평화운동을 일으켜 세우는 통일운동에 우리 자신의 역량을 힘껏 기울이고 더욱 더 많은 동지들의 뜻과 힘을 모아나가야 한다.”고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2월에는 대표 수련회를 열어 “새 정권의 출범과 평통사의 과제”를 주제로 평통사의 조직을 확대하고 활동을 강화할 방안을 토론하였다.
이 자리에서 홍근수 상임대표는 “올해에는 기필코 평통사를 활성화시키자고 다짐했다. 90년대 평화 통일운동의 중심축을 이뤄온 우리 평통사가 적극적으로 활동을 별어 한편으로는 새정부의 평화 통일 정책을 독려하고 한편으로는 견제 비판하면서 민간통일운동을 앞장서자”고 하였고, 문규현 상임대표는 “새 정권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해 나가게 하기 위해서도 재야에 있는 우리가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목소리를 더욱 높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공동대표들도 군축운동, 북동포돕기운동을 활발히 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또한 조광수 현 전북평통사 사무국장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전북 지역의 ‘평화와 통일을 일궈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과 통합하는 쾌거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서울에 이어 전북지역에 평통사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이즈음 김성윤 목사 등 젊은 이사들(운영위원)이 결합하는 등 조직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계속)


▲ 1998년 2월 대표 수련회

 

 

→ 관련자료 : [평통史] 94년 창립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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