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주의와 여성

군사주의와 여성이라는 주제는 일면 안 어울리는 주제인 것도 같지만 사실은 기가 막히게 찰떡궁합이랄 수 있다. 이야기를 풀어놓자면 직접적인 전쟁이나 분쟁 상황에서 닥치게 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에서부터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사회에서 사회가 돌아가는 군사적인 메커니즘까지 날밤을 세도 모자랄 판이다. 특히나 직접적인 미군에 의한 한국 여성의 인권유린이나 정신대 문제 등은 이제 너무나 고전적인 화두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보상이 되었다거나 제대로 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여성이 당한 폭력이기 때문일까? 처참한 몰골로 미군에 의해 살해되고 전쟁의 상처를 아직까지 달고 살아가는 이 땅의 여성들은 그 인권이 제대로 보호받을 가치조차 없는 이종들일까? 게다가 최근 영화 ‘쉬리’나 ‘유령’ 등의 남성영화의 열풍, 박정희를 민족의 위대한 영웅쯤으로 묘사하는 대목에 이르면 끝간데 없는 이 사회의 강한 남성(군사주의에 기댄) 이데올로기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이번『평화연대』특집의 주제를 ‘군사주의와 여성’으로 잡은 것은 일면 의미심장하다. 지난 14호에서 우리가 ‘군필자 가산점 제도’를 주제로 잡았듯이 평화운동이라는 영역에서 군사주의와 여성의 문제는 어쩌면 현재 가장 심각한 폭력적 상황에 처해져 있다는 의식의 반증일 테니까 말이다.

이번 특집은 크게 3가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글은 ‘군사주의와 여성’의 문제를 2가지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사회의 군사화라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여성들에게 폭력이 되는가 이고 두 번째는 군사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와 더불어 동두천 지역에서 기지촌 문제를 중심으로 한 평화운동 단체에서 기지촌 여성의 현실과 대안에 관한 글을 보내 주셨다. 마지막 인터뷰는 직접적으로 ‘군사주의와 여성’의 문제를 모토로 걸고 활동하고 있는 ‘Feminists’ CAMP’의 소개와 활동에 관한 글이다.

많은 부분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폭력적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단 군사주의라는 폭력적 상황에서만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여성운동이 활성화되고 있고, 여성 주체 개개인의 자각도 일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힘이 미비하고 언제든지 밟혀버릴 수 있다는 사실(군가산점 제도는 그 명확한 증거다)이 슬프다.

군사주의, 여성 그리고 평화

최정민 / 평화인권연대 상임활동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군사력과 자주국방의 문제는 우리에겐 생존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현재도 그러하다.

나는 어린 시절 밤마다 꾸던 꿈이 있다. 북한 공산당이 처 들어와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상할 때, 수퍼맨처럼 등장하는 정의의 사도(바로 나!)가 나타나 내 가족과 마을을 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중학교 1학년 도덕 시간, 선생님께서 지금 가장 고민되는 것 2가지를 적어내라고 했을 때 난 망설이지 않고 1. 전쟁 2. 교우관계를 적어냈었다.

쪽지들을 모아 통계를 냈을 때도 1. 성적 2. 전쟁 순으로 많은 같은 반 친구들이 전쟁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똘이장군’과 같은 만화를 보고 독후감을 써내는 것을 방학숙제라고 내주던 시절이었으니 말로만 듣던 북한 공산당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뿔이 난 도깨비, 돼지족발에 흉칙하고 사나운 돼지 등등으로 공상만화 그 자체였다. 지금 학생들은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지경까지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북한 바로 알기 운동’ 같은 것도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암튼 그 시절 국군장병 아저씨게 나라를 바로 지켜 내가 다시는 이런 꿈에 시달리지 않도록 해 달라고 위문편지도 쓰고 크면 아저씨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겠노라고 다짐하곤 했던 생각이 난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머리 속에 각인 되어 온 군사문화, 군대, 전쟁 등등은 나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생활 그 자체였고 그것은 철이 들어 대학교에 들어가고 학생운동을 했을 때도 그 효과는 당연하게도 나타났다. 마치 군대와 같은 위계질서 속에서 여성운동가들이 배제되고 차별화 되는 구조임에도 그것이 당연하다 생각했고 우리가 목숨 바쳐 싸우는 대의를 위해서는 다소 불평등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닐 거라는 자각을 스스로 한 건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해서 과연 내가 이 원고를 제대로 잘 마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다.

다른 여성평화운동가에게 청탁도 해볼까 했지만 스스로 다짐하길 이렇게 공부하고 정리해가며 내 스스로 단련되자 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이렇게 희생되고 아파하고 있다고 외치고 싶으나 아직 그럴만한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핑계(겉으로는 지면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추상적 수준에서 정리하는 것으로 하겠다.

1. 세계적인 군사화는 직접적으로 여성들에게 어떤 폭력으로 다가오는가.

99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나토의 코소보 침공은 냉전 이후 주춤하던 세계의 평화운동에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은 스스로가 세운 세계적 질서에 대한 암묵적(그리고 실제적) 약속을 파기하면서까지 코소보를 무력으로 침공했고 그 결과 다치고 죽어나간 것은 발칸의 민중들이요, 배부르고 포근했던 것은 전세계의 무기거래상을 위시로 한 초국적 기업들이었다. 한 지역을 파괴하고 복구하는 데는 엄청난 규모의 돈과 노동과 시간이 투여되어야 하는데 그것에 소요되는 비용을 통한 이윤까지도 군산복합체(초국적 기업)들의 몫이다. 파괴와 복구라는 어리석은 방법까지 동원되는 이런 경제논리로 전세계가 작동되는 동안 전쟁지역의 내부를 살펴보면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2중, 3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애써 먼 곳에서 찾아보지 않아도 우리 주위엔 아직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출신의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시고 미군의 성적 노리개로 착취당하다 죽어 가는 많은 한국 여성들이 있다.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기억은 너무나도 처참한 것이어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하루 30명 이상의 일본군을 상대하는 강제 매춘을 당해야 했고 임신하자 자궁 째 태아를 들어내 한 평생 여자로서의 일생을 망치고

말았다. 이 할머니들은 아직도 일본사람, 군인을 보거나 일본말을 들으면 그 치욕스런 기억에 등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고 한다. 전쟁의 와중에는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강간으로 여성을 억압하고(같은 인간이라도 여성은 그냥 숙청의 대상이 아니라 가족이 보는 앞이나 남편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꼭! 강간을 당한 이후에 살해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주둔하는 군대 주변엔 속칭 기지촌이라 하여 대규모 매춘 단지가 들어선다. (TV드라마에서 종종 집안 사정이나 피치 못할 이유로 미군을 상대로 매춘하는 여성이 등장하곤 하지만 실제로 기지촌 주변의 여성들은 미군에 의한 폭력적 상황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제대로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남성은 전방에서 여성과 아동은 후방에서 전쟁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데 최근 통계는 오히려 전방에서의 남성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수의 여성과 아동이 후방에서 죽거나 다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전쟁이나 무력 갈등에서 여성은 직접적인 무력에 의한 희생, 매춘(지난 코소보 전쟁에서도 매춘 여성의 급증으로 엄청한 사회적 갈등을 양산하기도 했다) 등의 폭력과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나가야 하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게 된다.

(픽션이긴 하지만 ‘육남매’라는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인 장미희는 6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부양으로 냉차장수, 떡장수 등의 생계적 고통과 남편을 잃은 슬픔을 한 몸에 지고 살아가는 꿋꿋한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게 직접적인 무력 충돌의 상황에서만 군사주의가 여성에게 억압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하면 꼭 그것만이 아니다.

노동자에게도 이익이고 자본가에게도 이익인 어떤 무엇(!)이라는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군비도 쏠 만큼 쏘고 사회적인 복지도 확장할 만큼 확장한다는 꿈은 진정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과도한 군비지출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복지수준의 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운동진영에서 IMF시기 외쳤던 구호 중 하나도 군비축소를 통한 사회복지 확충이었는데 그것은 항상 분단과 군사적 대치 상황이라는 군사논리로 억압되어졌다. 한마디로 북한 공산집단은 호시탐탐 남침을 획책하고 있는데 다른 무엇도 아니라 군비를 축소해서 사회복지비를 확충한다는 것은 수학적 논리론 설명될 수 있는 문제지만 이 나라의 국방은 누가, 무엇으로 책임지냐는 것이다. (실제로 IMF상황에서 주춤한 듯이 보이던 한국의 국방비는 어떤 근거에선지 모르지만 경제회복 기미가 보인다는 이유로 올해부터 5%이상 매년 인상된다고 한다) 이렇게 군사주의는 아무리 이성적인 논리로 제도의 개선과 확충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부술 수 없는 철의 장벽이며 우리들의 심장에 각인 된 그 무엇이다.

이렇게 과도한 군비지출과 사회복지 부분의 삭감으로 가장 고통받는 것은 당연히 노동자들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다. (더 이상 떠들기도 입만 아픈 군가산점제도의 과거 그대로의 적용과 더 나아가 확장은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의 심각성이 얼마나 널리 확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 가지 더 시비를 걸어볼까? 인류의 생존을 손가락 운동(?) 하나로 단박에 날려버릴 수 있는 핵무리의 개발과 생산, 실험에서 어디 대다수 세계 민중들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

모든 것이 비밀리에 결정되고 실행되면서 특히나 제 3세계 국가에서는(특히 산호초가 아름다운 태평양의 섬들) 계속적인 핵실험으로 생태계가 완전히 망가져 가고 있다. 지난 코소보 전쟁에서도 겉으로는 최첨단의 무기로 목표물만 정확히 조준하여 옛날 같은 피 튀기는 전쟁은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CNN의 시청률 지상주의와 군산복합체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한바탕 쇼에 불과했다. 이런 코미디 뒤에는 마구잡이의 오폭으로 정유공장 등이 파괴되어 심각한 생태적 위기를 겪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디 이 과정에 민중들이 개입할 여지가 있었는가. 특히 여성에 대한 배제는 더욱 심각해서 650개의 핵 관련 의사결정지위 가운데 단 5개만이 여성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99.9%의 성인시민이 그 결정과정에서 조직적으로 배제되고 있다고 한다.(Jeanne Vickers)

2.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군사주의 이데올로기

첫 번째 이야기.

‘군필자 가산점 제도’ 존치 여부를 두고 한창 시끌시끌하던 때, 그것은 ‘일부’ 여성들과 극히 일부 남성들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군이라는 기치아래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똘똘 뭉쳐 외치는 얘기는 군가산점 제도를 없애면 군의 위신이 떨어지며 더 이상 군대에 남성들이 오지 않으려 할 것이고 그러면 아직도 대치중인 한반도에서 자주국방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여성들도 자신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혹시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받을까봐 쌍수를 들고 군가산점 제도의 폐지를 반대하였다. ‘가기 싫은 군대에서 뺑이 치고 사회에 나와서는 찬밥 신세! 우리는 억울해!’라고 외치는 남성들의 대다수 그리고 여성들은(심지어 여성운동계 일각에서도) 한결같이 ‘군대는 반드시 다녀와야 하는 곳이니까 보상을 해달라’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징병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거나 군사주의 전반에 걸친 문제제기로 나가진 못했다.

대한민국의 수립과 더불어 역대 정권은 민족주의를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채택하였다. 반공과 반일이라는 기치를 들고 자신들의 빈약한 정당성을 온갖 민족주의적 수사로 포장하여 정당화했으며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군부정권 역시도 강한 한국의 건설과 경제재건이란 미명하에 마찬가지의 땜빵을 하였다. ‘자립 경제’와 ‘민족주의’라는 기치로 허리띠를 졸라매던 시기 그것은 노동자의 피땀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정권의 유용한 카드가 되었다. 국가가 교과서를 만들어내는 등의 유치한 발상으로 교육을 통한 ‘강하고 민족심이 투철한 한국인’의 창조는 국민교육헌장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국민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것이 강조되었고 학교 교육에서는 같은 점수를 받더라도 윤리 성적순으로 등급이 매겨지기도 했다.

두 번째 이야기.

어렸을 적 우리는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말을 항상 들으면서 자랐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남자아이들처럼 놀라치면 ‘여자가 어디서 방정맞게!’라는 호된 꾸지을 듣기가 일쑤였다. 여자아이들만 이랬던 건 아니다. 남자아이들이 인형놀이를 한다든가 밖에 나가 누구에게 한 대 쥐어 박히고 들어오는 날이면 부모들은 의례히 ‘왜 맞고 들어왔어. 사내자식이. 차라리 한 대 패주고 오지’라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남자는 이른바 ‘강한 남성’ 이데올로기에 여자는 ‘여자답게 혹은 다소곳하게, 순종적으로’라는 언명 속에 스스로를 단련시키며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애초부터 우리 민족은 신의 아버지와 곰엄마 사이에서 만들어진 인간들이다. 특히나 단군을 서출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대대로 뿌리 박혀 온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단면들을 엿볼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신화에서, 애초부터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런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제는 우리 민족 자체의 ‘그것’인 것이다.

거기다 우리 조상은 예로부터 용맹과 기개가 어쩌고 저쩌고, 만주벌판의 어디까지 진출하고 어쩌고 저쩌고에 이르면 우리 역사의 기술이 얼마나 군사주의와 남성중심사상에 찌들어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군대라는 대표적인 남성공동체를 통한 한국의 투영인 바에야 어찌 군대도 가지 못한 하찮은 미물인 여성들은 감히 인간이 되길 바랄 수 있겠는가.

최근 여성운동계에서는 이런 한국 사회 내 뿌리 깊은 군사주의, 군사문화, 군사화와 관련된 논의와 투쟁들이 계속되고 있다. 평화인권연대에서도 이런 군사주의에 기원을 둔 모든 이데올로기와 관념들을 해체하고 보다 보편적인 평화권 개념을 확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외형적인 복지 수준이 확장되는 것처럼 보여도 실질적인 성모순들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군사주의의 논리 아래서 여성은 끊임없이 결국엔 여성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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