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집단학살을 자행하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도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고 주민들을 살해하는 가운데, 서구의 많은 페미니스트와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들이 이러한 잔혹 행위를 지지하는 충격적인 현실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비인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행위에 의문을 제기하면, 하마스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으며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이용하고 있다는 반박을 듣는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이제 상대방의 주장을 왜곡하는 허수아비 논증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인권 침해를 고발하는 보고서가 나오고, 이스라엘 인권단체 베첼렘(B’Tselem)과 일간지 〈하아레츠〉가 관련 사실을 보도한 데 이어 최근 영화 ‘나자’(Naza)에서도 이러한 실상을 보여주면서, 기존의 반박 논리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제 누구도 가자지구 주민들이 자신의 죽음을 직접 촬영해 인스타그램에 올린 영상이 조작됐다고 주장할 수 없다. 또한 2024년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가 이스라엘의 집단학살협약 위반 문제를 제기하며 내린 초기 명령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2024년 11월 국제형사재판소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주민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과 의약품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판단하고,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사실도 무시할 수 없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지지 활동가나 집단학살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유대주의자로 몰아가는 상투적인 비난도 이제 설득력을 잃었다. 이스라엘의 비인도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검열하면서, 반유대주의라는 용어를 그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 대부분은 미국이 무기와 기술, 이념적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이 집단학살 공격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것이 왜 페미니즘의 문제인지를 다룬 초기 글 가운데 하나는 마리암 알도사리(Maryam Aldossari)가 〈알자지라〉에 기고한 글이다. 알도사리는 이렇게 말한다. “페미니스트들이 특정 사안에만 선택적으로 침묵한다면 페미니즘 연대의 보편성이 흔들린다. 특히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본보기로 삼는 저명한 페미니스트들이 침묵할 때, 그 침묵은 공모의 한 형태가 된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겪는 비극에 침묵하는 당신의 태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유감스럽지만 당신의 침묵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들리며, 그 때문에 많은 사람이 당신이 해온 활동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됐다.” 이어서 페미니스트 인도주의 네트워크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집단학살과 전쟁, 분쟁은 여성과 아동에게 훨씬 더 큰 피해를 준다. 이들은 폭력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을 뿐 아니라 가부장적 억압까지 겹쳐 더욱 심각한 고통을 겪는다. 사람들은 이들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고통을 외면하며 권리를 조직적으로 박탈한다.” 나는 정치·사회 문제를 분석할 때 교차성의 원칙을 적용하는 페미니스트로서, 주변의 페미니스트들이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에 침묵하거나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모습을 보며 깊은 우려를 느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팔레스타인 문제만 제외하고 진보적인 사람들, 이른바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진보주의자(PEP)’들이다.
반면 내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나 원주민 동료들, 또는 글로벌 사우스 출신 페미니스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이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상황에 즉각 공감한다. 1960~70년대부터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주민들을 포함한 전 세계 흑인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인식했으며, 구조적 인종차별과 계급차별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우리가 벌이는 해방 투쟁의 세계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많은 사람을 외면하는 페미니즘만 남게 된다. 타네하시 코츠(Ta-Nehisi Coates)는 자신의 저서 《메시지》(The Message)에서 이스라엘이 철조망과 검문소를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곳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온몸으로 느꼈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노예로 살았고 인종분리 정책을 시행하던 남부에서 고통받았던 자신의 조상들이 겪은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는 검열과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의 불법적인 이민자 체포가 이스라엘에서 가자지구에 관한 발언을 억압하고, 대다수 이스라엘인의 지지 속에 집단학살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피터 베이나트(Peter Beinart)는 영화 나자를 바탕으로 작성한 최근 보고서에서, 이스라엘에서는 우파보다 오히려 자유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하는 데 사용하는 알고리즘을 제공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자신이 추방과 인종청소를 수행하는 거대한 체계 속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나치가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범죄에 대해 추궁받았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을 다룬 저서에서 ‘악의 평범성’을 논한다. 아이히만과 나치 당원들은 명령을 따랐을 뿐인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관료적 집행자들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악의 평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이 받은 명령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기를 거부했거나 그럴 능력이 없었다. 사실 페미니스트들은 아렌트의 이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는 “모든 인간은 비판적 사고의 힘을 통해 악을 근절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 책임도 있다”고 주장하며, 도덕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발언으로 비판받았지만, 오늘날 그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스스로 주체성을 발휘하고, 다른 남성과 여성들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며 억압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돕는 법을 배웠다. 또한 글로벌 사우스와 원주민, 아프리카계 미국인 페미니스트들에게서 교차성의 원칙을 적용해 서로 얽히고 중첩된 억압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웠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 방법도 배웠지만, 가부장제든 자본주의든 그 어떤 체제에서도 결코 하나의 톱니바퀴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배웠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어째서 국가가 저지르는 비인도적이고 부당한 행위에 대해 정부가 취하는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가? 피해자들이 어느 나라에 속해 있든, 심지어 무국적자라 하더라도, 고통받는 남성과 여성, 아동의 현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서구의 많은 자유주의·진보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저지르는 집단학살 범죄를 자신의 주장과 입장에서 지워버림으로써 페미니즘의 진정성을 가리는 시험에서 낙제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이들이 옹호하는 다른 모든 권리도 의미를 잃는다. 예를 들어 미국 여성의 재생산 건강에 관해 이야기하고 전 세계 여성들이 이러한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가자지구의 임신부들이 출산 도중 목숨을 잃거나 폭격으로 사망하고 마취도 없이 제왕절개 수술을 받아야 했던 현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체외수정 시술 병원을 폭격한 사건이 우리의 입장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재생산권을 옹호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도 동일한 인권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동등한 노동과 동등한 임금, 빈곤층과 여성·여아의 교육, 깨끗한 물, 탄소 배출 감축 등에 관한 우리의 모든 주장도 공허한 말에 불과해진다. 페미니즘은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 미국이 외국에 무기를 공급해 그 나라가 주민들을 살해하도록 돕고, 독성이 매우 강한 물질을 함유한 폭탄을 비롯한 첨단 기술을 이스라엘이 사용하도록 중개해 사람과 식물을 죽이고 수자원을 파괴하며 치명적인 오염물질로 대기를 오염시키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이러한 폭력에 연루되어 있다. 이처럼 파괴적인 행위 앞에서 침묵하는 페미니즘을 과연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큰 페미니스트 단체인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는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을 규탄하거나 휴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인들을 학살한 직후에는 하마스를 규탄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했는데도 말이다. NOW는 이처럼 선택적으로 피해자를 옹호함으로써 일부 여성의 생명은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여성의 생명은 그렇지 않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반면 세계여성기금과 전미여성학회는 집단학살을 분명하게 규탄하고 휴전을 촉구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NOW는 주류 민주당의 노선에 발맞추는 일을 우선시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도 마찬가지였다. 해리스 선거운동본부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공화당 인사에게는 발언 기회를 주면서도 팔레스타인인에게는 발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로비 단체의 지지를 잃지 않는 편을 택한 것이다.
2026년 9월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이 92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계 곳곳에서 페미니즘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그를 기리는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나 역시 스타이넘이 페미니즘을 위해 펼친 훌륭한 활동을 존경했다. 특히 나는 스타이넘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가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부터 글로벌 사우스, 특히 인도의 페미니스트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페미니스트들, 컴바히강 집단(Combahee River Collective), 앤절라 데이비스(Angela Davis), 벨 훅스(bell hooks)에게서 배운 교차성의 원칙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타이넘이 시온주의를 지지하면서도 가자지구 주민들에 대한 집단학살에는 단 한마디도 비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파티마 부토(Fatima Bhutto)는 스타이넘이 1970년대부터 시온주의를 지지해 온 과정을 설명한다. 부토에 따르면, 스타이넘은 1975년 유엔 세계회의에서 시온주의를 규탄한 여성들을 오히려 공격했다. 파우지아 아프잘칸(Fawzia Afzal-Khan)은 여기서 더 나아가 기업과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에 의존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어떻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제 2물결 페미니즘은 노동권과 재생산권을 옹호했지만, 여전히 “배타적인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타이넘은 시온주의가 인종차별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미국의 인종분리 체제,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억압이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스타이넘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하기 위해 적용했던 원칙을 팔레스타인 문제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들은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페미니즘과 해방을 추구하는 페미니즘 가운데 어느 쪽을 지지할 것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아프잘칸은 이렇게 말한다. “신체의 자기결정권과 노동권 같은 문제를 초기에 널리 알리는 데 스타이넘이 기여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세계적 연대의 구조에 그가 미친 영향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스타이넘이 이러한 문제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는 NOW와 카멀라 해리스, 그리고 다른 자유주의자들이 가자지구에서 지속되는 심각한 인권 유린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와 같다. 이들은 주류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들의 선거운동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는 외국과 그 나라를 지지하는 단체들의 후원을 잃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대가를 우리는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규탄하지 않았던 일들이 이제 미국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언론의 자유를 잃어가고 있고, 거리에서는 복면을 쓴 연방 요원들이 민간인을 체포하고 총격을 가하며 납치하고 있다. 투표권 행사도 심각하게 제약받고 있다. 이 밖에도 사례는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흐름은 바뀌고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자행하는 집단학살과 생태학살, 교육 말살, 그리고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벌이는 불법적인 토지 강탈에 맞서 우리가 외쳐 온 거센 항의의 목소리가 이제 주류 사회로 확산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가자지구의 집단학살을 공개적으로 규탄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라!
조란 맘다니(Zohran Mamdani), 누라 에라카트(Noura Erakat),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 인권을 위한 힌두교도들의 지도자인 수니타 비슈와나트(Sunita Vishwanath), 올해 뉴욕주 상원에 카스트 차별 금지 법안을 제출한 야시카 두트(Yashika Dutt), 팔레스타인 정의를 위한 학생회를 지지하지 않은 대학 당국에 맞서 싸운 파우지아 아프잘칸(Fawzia Afzal-Khan) 같은 진보적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람이 있으며,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을 보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실제로 모든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군사주의와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억압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이러한 페미니즘은 미국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70~80년대에도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준 조던(June Jordan), 앤절라 데이비스(Angela Davis)를 비롯한 흑인 지식인들은 이스라엘이 제국주의적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을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누군가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억압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 곧바로 “그렇다면 10월 7일 사건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반박이 돌아온다. 마치 한쪽의 비극에 공감하면 다른 쪽의 비극에는 공감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이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진실을 동시에 인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또한 유대인을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볼 수도 없다.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의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모두가 홀로코스트라는 동일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케랄라의 유대인들에 관해 쓴 책에서는 서기 3세기와 15세기에 유대인들이 인도 케랄라(Kerala)로 이주한 독특한 역사와 그곳에서 살아온 삶을 다룬다. 이들은 인도의 다문화적 환경 속에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왔다.
전 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득세하는 오늘날, 진보적이고 교차성을 중시하는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미국 정부의 지원 아래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한 검열과 탄압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나는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의 이상을 실천할 수 있다. 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들’과 대화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을 때, 서브스택 뉴스레터를 시작해 팔레스타인 작가들에 관한 글을 썼다. 이것은 1948년 이후 수십 년 동안 광범위하게 억압되고 지워져 온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이해하고 그 역사에 참여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또한 다문화 연대, 학계의 남아시아 활동가들, 인권을 위한 힌두교도들, 지역 이민자 단체 등 여러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억압적인 점령에 맞서 싸우는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와 가부장제, 군사주의가 결합한 권력을 외면하고,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는 현실을 못 본 척하며, 정부나 정당과 결탁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는 페미니즘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설령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민족에 대한 집단학살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단 한 명의 여성이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나 역시 자유롭지 않다. 그 여성을 옭아매는 족쇄가 나의 족쇄와 전혀 다르더라도 마찬가지다.”
[출처] Failing the Litmus Test of Feminism and Human Rights
[번역] 이꽃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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