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기억이 있다. 군부 독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광주를 본 사람들이, 죽음과 투쟁의 행렬을 지켜 본 사람들이, 그리고 서태지의 등장을 함께 봤던 사람들이 새겼을 법한 기억이다. 그런 기억은 상처로 남았을 수도 있고, 의식 깊숙한 곳에 강박으로 자리잡았을 수도 있으며, 자신의 행동을 강제하는 무엇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 이미 잊혀진 무엇일 수도 있다.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는 우리의 그런 집단 기억 하나를 들춘다.

“격렬한 ‘노동자의 투쟁’이라는 전통적인 테마를 미련하게 부여잡”았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노동자들의 싸움을 의식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고유한 미덕이 있다.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10년의 삶과 노동을 담고 있는 영화는 우리의 지난 시간과 그 시간이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지금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분명히 처지가 달랐던 그들의 지난 삶과 나의 지난 삶이 겹쳐지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한다.

“살아있다는 건 축복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형벌입니다”영화는 1990년대 초반과 중반에 삶을 마감해야 했던 서영호, 양봉수 두 젊은이의 얼굴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리고 죽음이 떠올리는 상념들을 막기라도하듯 “우리가 지금…… 형벌 같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싸늘하게(?) 지난 그들의 죽음을 넘어버린다. 1998년의 어느 술자리와 켄베이어 앞에 선 노동자에게로

시선이 이동한다.

“어느 날, 나가라고 하면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아이들도 커가고…… 이미 늦었지요.”정리해고라는 공포가 노동자들을, 우리 사회를 옭아매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러나 아직은 현실이 아닌 듯, 그들은 조심스럽게 절망하고 있었다.

1998년의 절망, 그리고 지금 울산의 그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을 역추적 하면서 영화는 진행된다. 감독의 말처럼 “우리가 지금…… 살아남기” 위해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필이면 첫 출근이 야간이었어요, 첫 출근이. 동굴 속에 있다 나오는 기분, 이게 사는 거구나, 사는 게 장난이 아니구나.”영화는 정리해고라는 공포 앞에 놓인 사람들을 첫 출근 때로 돌려 놓는다. 무척이나 낯선 풍경이었다. 그들은 ‘장시간 저임금이었지요’라는 말 대신 “사는 게 장난이 아니구나”라고 했고, ‘노동력 착취를 위한 주야 맞교대죠‘라는 말대신 “결혼이 이해가 안되더라고. 주야간 근무하면 결혼생활이 될 수 있는 건가…… 근데, 나도 결혼하대요”라는 지극히 사람다운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평범한 말들이 낯설었다. 내가 가진 그들에 대한 정보는 정말 앙상했던 것이다.

“하여튼, 멋있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1991년과 1992년에서 한동안 멈춘다. 88.9퍼센트라는 높은 찬성율로 파업에 돌입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성과분배 싸움이야기다. 한국의 노동자 운동을 이야기하는 어느 곳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는 싸움, 그러나 그 싸움을 이야기하는 당사자들의 얼굴은 밝게 상기되어 있었다. 배경 음악 <바리케이트>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 싸움의 끄트머리, 스물아홉의 노동자 서영호씨가 바리케이트 공사 도중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꽃이 피고 또 지고 그 다음 또 꽃이 폈는데 깨어나지” 못했다.

“노동조합이 민주적이지 못할 적에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죽여버릴 수도 있겠구나”영화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장을 비추며 ‘94에서 95, 그 우울한 시간들’로 간다. 노조와 회사가 한마음이었던 그 시절, 컨베이어는 턱없이 빨리 돌았고 양봉수라는 노동자가 라인을 세웠다. 결국 그는 해고되었고 회사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했다. 회사에 들어간 그를 경비들이 끌어냈고 그는 자신의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동료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한다.“노동조합이 민주적이지 못할 적에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죽여버릴 수도 있겠구나.”

“협상한 사람들, 솔직히 노동자를 팔아먹었다고 생각합니다”석양과 멈춘 기계, 널부러진 공구들로 1998년이 이어진다. 노사정이 정리해고 수용에 합의한 그해 2월, 공장은 휑했다. 그러나 영화는 답답함과 배신감을 쏟아내는 켄베이어 앞의 사람들을 보여주는게 전부다. 그해 여름, 30일 넘게 진행되었던 정리해고 반대 파업에 관한 또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하면서 <우리들의 사사랑, 우리들의 분노>는 끝을 맺는다.

질문과 대답으로 빠르게 이어지던 인터뷰가 백미였던 영화의 마지막은 정리해고가 철회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답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나가면 이걸로 끝나요.” “퇴각이 없는 가운데서…… 지도부에서 파행적으로 퇴각을 지시하지만 않는다면은……”

다른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든, 여가를 위한 영화 관람이든, 우리의 지난날을 보기 위해서든……,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다. 이 글은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생생했던 영화로 기억될 내가 본 <우리들의사랑 우리들의 분노> 이야기다. 자신이 경과했던 시간에 따라, 지금의 처지에 따라 여러 이야기가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조성은<대학생신문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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