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귀농학교일기1)

엄익복 (평화인권연대 회원, iknow@netian.com)

첫째날

용산 전자 상가 한가운데 있는 농협 회관에서 귀농학교가 열렸다.

엄청나게 쌓여 있는 컴퓨터와 각종 게임기,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귀농학교로 가는 건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용산은 올 때마다 왜 이렇게 복잡한지 7층이나 되는 농협 건물을 찾는데도 쉽지가 않았다. 어렵게 찾아 들어온 귀농학교에는 30∼40대 남자들 중심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날이라 간단한 안내와 귀농운동본부장으로 계신 이병철 선생님의 인사말을 듣고 각자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저는 사업이 여의치 않아서 귀농을 하려고 하는데요, 다들 좋은 성과 있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40대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 들어갔다.

귀농학교에 왔을 때는 많은 생각과 계획을 갖고 왔을 텐데, 그저 몇 마디하고 다들 그냥 들어간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자리가 어색한가 보다. 더구나 좋은 성과 있길 바란다니? 무슨 도시생활의 낙오자들이나 모이는 데가 귀농학교라는 투다.

다른 사람들도 약간씩 다른 말을 하긴 했지만 그저 인사치레 말을 하는 정도였다.

“저는 영등포산업선교회라는 곳에서 협동조합 운동을 했는데요, 귀농을 해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게 되었습니다.”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 역시 비슷하게 간단히 얘기하고 앉았다.

그런데 어떤 젊은 학생이 나와서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저는 ‘전원일기’와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빠짐 없이 보고요, 제일 좋아하는 프로는 ‘6시 내고향’ 입니다. 부모님은 넌 젊은애가 무슨 그런 거만 보냐 하시는데, 저는 그래도 자꾸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농촌 체질인가 보다 하고 귀농을 하려고 왔습니다.”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웃고 나니 사람들 얼굴도 펴지고, 조금 전까지 감돌았던 긴장감도 사라졌다.

“저는 다산(多産)이 제 삶의 최대 목표입니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에는 시골이 나을 것 같아서 귀농을 하려고 합니다.” (남자)

“제가 그 다산을 함께 할 사람입니다.” (여자)

어느 젊은 연인이 나와서 한번 더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세상에 참 희한한 사람도 많네. 그 다음부터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귀농을 결심하게된 사연을 구구절절 얘기하며, 큰 공감대를 만들어 갔다.

참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학교 선생님도 계시고, 장사를 하시는 분, 출판사를 하시는 분, 기 수련을 하는 분까지. 이 사람들이 귀농을 하려고 하는데는 다 각자 이유가 있겠지만 모두들 많은 고민 끝에 어렵게 이 자리까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귀농학교의 제 목표는 제가 제일 먼저 귀농을 하는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농촌 생활도 잘 만하면 벌만큼 벌면서 잘 살 수 있습니다.”

이젠 귀농은 낙오자의 선택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요, 될 법한 장사라고 강변하는 사람도 나왔다.

귀농학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니 이렇게 ‘귀농’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사람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관계를 회복하면서…

처음의 어색함과 긴장은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의 모습이다. 경쟁과 대립의 사회에서 우리는 관계를 계속 단절하고 있다. 귀농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웃과 이웃의 관계, 자연과 인간의 관계,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 등등.

소개가 모두 끝난 후 이병철 선생님은 한가지 따끔한 지적을 했다. 돈벌 생각으로 귀농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땅이 모든 삶의 근원자리이기 때문에 귀농하는 것이요, 물질문명에 병든 몸과 마음을 치유

하고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되살리기 위해서 귀농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귀농학교는 귀농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둘째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행복함을 느끼며 살아갈까?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뭔가에 짓눌리며 살지는 않는가? 열심히 일하고, 맥주 한잔 들이키다가도 문득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귀농학교 둘째날 던져진 질문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일상은 나의 삶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규정받은 삶이다.

밥 먹고 잠자는 것은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것이고, 술 마시고 여가를 즐기는 것은 노동력을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2세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것이고,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은 노동에 적합한 인간으로 노동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사랑의 결실로 아이를 낳고, 아이를 위해서 교육을 시키고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주관적인 생각일 뿐, 사실은 노동력의 재생산과정일 뿐이다.

자본이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서는 생산성을 높여야 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강도를 높이고, 노동시간을 늘려야 하고, 인원을 줄이고, 임금을 내려야 한다. 정규직을 줄이고, 원료비용을 줄이고, 환경비용을 줄이고, 안전설비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경쟁력 있는 상품이 나오고 이윤을 늘릴 수 있다.

노동력도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영어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컴퓨터도 할 줄 알아야하고, 대학도 나와야 한다. 신체도 건강해야 하고, 얼굴도 예뻐야 한다. 내가 경쟁력 있는 노동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인정받아 생산과정에 투입되더라도 노동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다른 더 경쟁력 있는 노동력으로 대체된다.

노동력을 갈아치우는 기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이런 과정이 우리의 일상이다. 이런 과정에서 과연 행복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경쟁력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은 성취감도 느끼고 행복하게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성취감도 많은 사람의 탈락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했을 때, 그런 행복이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귀농학교 둘째날 주제는 이것이었다. 이 주제에 대하여 강수돌 교수는 조금 색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꼭 귀농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들을 다시 이어야 한다고 한다.그것은 분리되어 있는 공동체와 개인을 잇는 것이다.

공동체와 개인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에서 개인은 양쪽이 절벽인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꼭 같은 모양의 산길과 절벽 길은 전혀 다르다. 산길은 편안하게 갈 수 있지만 절별 길은 한발 떼기도 불안하다. 주변이 함께 있어야 편안하게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와 개인을 잇는 것은 생산자와 소비자, 일터와 삶터, 인간과 자연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개인의 내면과 외면의 분리를 잇는 것과도 같다.

인간의 내면은 누구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고 이웃과의 공존과 존재의 기쁨 등을 느끼고 싶어하는데,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그렇지 않다. 재산과 권력을 추구하고 이것을 위해 경쟁과 대립을 서슴치 않고,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꿈꾸고 있기도 하다. 언젠가는 시골에서 텃밭이나 가꾸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지, 나이 좀 들면 시골에 가서 살아야지, 퇴직하고 나면 꼭 가야지.

행복해지기를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행히 공동체와 개인을 잇는 시도는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역공동체를 꾸리기도 하고, 생활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하고, 대안 학교를 세우기도 하고, 지역화폐운동이나 품앗이 운동을 하기도 한다. 귀농도 그 중에 하나 공동체를 회복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작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과 그 기억이 없는 사람의 감성은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귀농학교를 들으면서, 감나무 가지 뻗어 나온 흙담벼락 밑에서 뛰어 놀던 어릴 적 기억이 다시 떠오르곤 한다. 어쩌면 잃어버렸던 나를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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