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에 관한 몇가지 생각’을 읽고 든 생각

정종남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karan27@hanmail.net)

생태주의에 대한 해박한 강의로 나를 사로잡았던 엄익복 씨가 이번에는 동양철학의 평등사상을 소개했습니다.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점을 극복할 새로운 대안을 찾는 그의 진지한 태도가 신선한 자극을 줍니다. 그런데 불평등에 대한 동양철학적 관점은 흥미로운 한편 내 생각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엄익복 씨는”아니다 싶으면 고개 한번 저으며 읽어”주라고 당부했지만, 생각을 드러내 놓고 토론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는 마음으로 망설임 끝에 글을 씁니다. 내 글을 두고서도 거리낌없는 토론과 논쟁을 기대합니다.

먼저, 내가 보기에 경제적인 불평등은 억압이나 소외 그리고 차별같은 사회적 불평등의 기초가 됩니다.

여성억압의 대표적 사례인 직장내 성폭력은 롯데호텔에서 드러나듯이 대부분의 경우 가해자가 간부이고, 일자리에 대한 협박과 함께 이뤄지기 때문에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주노동자와 흑인에 대한

억압도 경제적 불평등에 따라 적용됩니다. 또 수많은 대우 노동자들을 거리에 나 앉게 한 책임이 있는 김우중은 지중해인지 어딘지 휴양지에서 놀고 있지만, 얼마전 전교조 노동자들은 성실한 교섭을 요구했다가 구속돼서 알몸 수색까지 받은 바 있습니다. 이처럼 돈이 있어 권력이 따르는 자와 가진 게 맨몸인 사람은 서로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정치에서도 소외되어 있습니다. 의료보험료와 국민연금, 그리고 기름 값을 포함한 공공요금을 줄줄이 인상하면, 쓰임새가 빤히 정해진 월급으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눈앞이 캄캄해지는데도 그같은 정책 결정에 끼어 들 여지가 없습니다. 또 노동자를 해고할 뿐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는 거의 없는 금융지주회사법을 만들어도 노동자들의 의견은 무시당합니다. 말하자면, 경제적 불평등은 우리의 삶을 가로질러 없는 사람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나아가 경제적인 불평등은 우리의 상상력과 창조성의 발전을 억누르며, 자아를 실현하는 데서도 우리능력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한계를 지웁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해서 모두가 평등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들어 사람들의 당연한 불만과 경제적 평등에 대한 정당한 열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물론 내가 경제적 평등을 이루면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잘못 된 허위의식이 자동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기초인 경제적 불평등을 덮어둔 해결책은 잠시 삶의 고통을 잊게 해 줄지는 몰라도 실제적인 평등을 실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소유에 대한 욕심 없이 소비를 줄이고, 욕구를 버리는 것이 바로 평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심오하지만 설득력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작은 공동체 마을에서 이상적인 사상이 될 수 있을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적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IMF 환란을 이용해 주식투기로 떼돈을 번 이재용 같은 자는 강제로라도 소비를 줄이고 욕구를 버리게 해야 하지만, 아이 학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

달 하는 주부에게 욕심을 버리면 평등해 진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하고 싶은 말은 “불평등의 반대 개념으로의 평등은 (대립과 투쟁을 불러 왔을 뿐)결코 평등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얘기에 대해서 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있었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부터 세계화 반대 시위가 이어지는 지금까지 인류역사는 불평등과 차별 그리고 억압에 대한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용기있는 투쟁과 대립을 통해서 사람들은 처지를 개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세기초 거의 모든 나라 여성은 선거권과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는데, 그때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다면, 여성 자신이 싸웠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로, 이제는 동성애자의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는 주제로 TV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과 5년 전에는 막 커밍아웃을 한 몇몇 대학의 동성애자들이 모임을 만들기 위해 호출기 번호를 공개하고도 협박이 하도 심해서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동성애자 활동가들은 1997년 1월 파업 때 무지개 깃발을 들고 노동자 시위대열에 참가했고, 끈기 있게 공개활동을 계속 했습니다. 부족하나마 홍석천 씨에 대한 지지 여론은 저절로 얻어진 게 아닙니다.

이 진리는 자본가에게도 들어맞습니다. 중세에 승려나 귀족보다 못한 제 3신분이었던 부르주아는 1640년 영국 혁명과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통해 비로소 세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 지배

계급이 강요하는 불평등에 가차없이 도전해서 지금의 지위를 획득한 것입니다.

나는 불평등이 생각하기에 따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987년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자신이 얻으려는 것을 버릴”려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듯이, 불평등에 맞선 싸움이야말로 평등을 확대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진정으로 평등한 삶은 불평등한 사회에 용기 있게 맞서야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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