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사진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현직 미술교사가 자칫하면 법률적 처벌을 받을뻔 했다. 세간의 비등한 여론 탓이었는지 영장은 일단 기각되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를 옹호하던 그 중학교 선생님은 자칫하면 옥살이를 할지도 몰랐을 해프닝으로부터 방면되었다. 물론 교육청을 비롯한 학부모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태세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성숙한 사회적 합의가 이미 만들어져 있는 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사태가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표현의 자유란 아주 훌륭한 근대의 법률적 덕목 덕분에 우리는 그 교사의 나체 사진을 인터넷에 더 두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껏 그랬듯 이 사건으로 표현의 자유와 표현의 단속 사이에 무슨 대단한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시비에서 정작 쟁점이 되는 것은, 표현이 자유라는 그림자를 내세워 싸우는 이데올로기들간의 쟁투이다. 그러나 이 쟁투는 법률의 무대에서 상연될 수 없다. 그런 탓에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힘을 이기려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 ‘이상’의 싸움을 치러야 한다. 물론 그 ‘이상’은 법의 언어로 결코 번역되지 않으나 표현되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번 사태만 해도 그렇다. 어쩌면 사태의 핵심은 성기가 버젓이 노출된 교사의 사진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누리는 성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그 성기가 확연히 어떤 음란한 의미를 발광하게 된 것은 성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진에 그런 의미를 투여하는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닐까. 알다시피 청소년들이 보여주는 자기네 성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침묵 속에서 들려지는 이야기이다. 청소년들은 자기네 성에 대한 표현의 권한을 갖지 못한다. 그들이 표현한 성이란 것은 자신의 내면적인 기원을 갖지 못한 채, 외부적 원인(나쁜 어른의 영향, 나쁜 미디어의 영향)을 찾음으로써 마침내 알려지고 설명된다. 따라서 청소년들은 성에 대한 표현의 주권을 갖지 못한다.
표현되어지는 것은 결국 표현을 허락하고 표현에 이해가능성을 분배하는 규칙을 따른다. 청소년들이 자기네 성을 표현할 주권을 갖지 못하는 이유란 뻔하다. 그들이 자신의 성에 대한 권한을 주장할 경우 우리가 지탱하는 성의 질서란 것이 여지없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소년혐오와 성혐오에 바탕한 질서가 지탱되기 위해서는 그 질서를 위협하는 범인으로서,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무엇 하나가 상징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빨간 마후라”일 수도 있고, 지금 문제가 되는 “누드 사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것은 표현의 자유를 통해 보호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라는 덕목은 법률적인 주인인 어른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란 덕목은 정작 표현하려는 충동을 가진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수 있다. 표현을 감시하는 강박관념에 가득 찬 시선이 쫓는 것은 바로 그런 권리의 경제이다. 그리고 권리의 경제를 교란시키는 방법은 교환될 수 없는 대상인 말없는 표현들을 옹호하고, 표현하는 자들에게 언어를 선물하는 것이다. “빨간마후라”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표현이던가? 그걸 묻지 않고 그리고 답할 사람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논하는 것은 너무나 현상유지적이고 동어반복적인 몸짓일 뿐이다. 법정에서 표현을 탈출시킬 방법은 결국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표현의 책임 있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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