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이야기. 이 이야기도 재현(이야기 맹글기, 역사쓰기)에서 누가 ‘두목’인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앞서서 신데렐라는 남성이었다고 말한 바 있듯이, 구미호 이야기도 꼬리 아홉달고 남자들의 간과 심장을 파먹음으로써 사람되고 싶어 안달난 여우가 실은 남자들이 만들어낸 여성이라는 점을, 즉 가부장적인 제도가 맹글어낸 착각속의 여성이란 점을 잘 보여준다. 구미호 이야기는 ‘여자들이여 남자가 (잘나고 우월허신 존재잉께) 되려고 애쓰라, 그렇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몬허는 것이 너의 운명’이라고 ‘가르친다.’
혜화동에 있는 여성문화이론연구소 다락방의 ‘여우'(女友)들은 여우라는 말을 여러 가지 뜻으로 재미나게 비틀어 쓴다.
그렇지만, 이 여우들은 분명히 알고있다. 남자들이 맹글어낸 구미호 이야기는 결국, 밤중에 왼갖 난리를 떤다고 인간이(man 즉 남자가) 될 수도 없거니와 남자가 되어서도 안된다는 ‘교훈’을 ‘하사’하는 이야기란 점을. 이런 교훈질을 하는 남자들이 사실은 여우들이 아니라 자기 침대 밑에 사는 악어들한테 잡혀먹는 불안에 벌벌 떨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을. 이 여우들의 열 세개의시선은 그라고 어떠코롬 왜 시달리는지를 다른 시각으로 꿰뚫어본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페미니스트 무림의 새로운 내공과 신기를 가르쳐주는 페미니즘 무협이자, 대중문화 텍스트(주로 영화) 분석의 탈을 쓴 페미니스트 정신분석 지침서요 쉽고 재미나게 배우는 페미니즘 이론서이다.
제도와 권력에 의해서, 자기들의 힘을 믿고, 혹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발동되는 무지, 이에 수반되는 사회적 집단적 무시를 의도적 무지/무지(willing ignorance)라고 한다. 심리적으로 의도적 무지는 성찰하는 의식을 가동시켜 바라본다면 자신의 어떤 부분들이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혹은 의식적으로 가동되는 심리기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의지적 무시는 자기방어기제의 일부다. 하지만, 이런 심리기제가 집단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동될때는 부정의 폭력이 되곤 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맥락에서, 특히 제국주의가 서구의 선진 문물을 통해 가동한 인식틀적 폭력을 두고, 스피박은 이런 종류의 의지적 무지/무시를 “인가받은 무시/무지”(sanctioned ignorance)라 쓴 바 있다.
보려 하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척을 떠는 그런 무지. 이런 무지는 특정한 진리체제의 일부이다. 즉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 혹은 사회의 어떤 부분들과 측면들에 대해서 망각에의 의지를 발동하여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것. 혹은 그것들에 대한 무지와 무시를 당연시하고 자랑하는 집단적 공모. 그리하야 무지가 역설적이게도 어떤 지점들에서 앎의 특권으로 가동되도록 하는 체제.
이런 체제에<다락방>은 여유와 유머로 대응한다. 이 책은 “어이 거기, 우리도 인간이여. 우리도 좀 봐주셔!’하고 찌질대고 징징대지 않는다. 대신 이런 집단적인 남성중심적 “의도적 문맹”을 촌철살인하는 기예는 다름아닌 여유와 유머라고 말한다. 연애질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페미니즘과 정신분석>이 이론 및 분석적 발효, 숙성상 약간 뜹뜨름한 맛을 지닌 다소 거칠지만 재미난 책이라면, <다락방>은 5년간 숙성된 페미니스트들이 사회집단무의식을 징후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분석한 탁월한 예를 보여준다.
보다 미세하게는 이런 종류의 의도적 무지와 무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들 스스로에게, 노동자와 여성, 장애인을 포함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매일 직접적으로 가동된다는 점을 대중문화에 숨어있는 집단 무의식들을 섬세하게 분석함시롱 까발리는 장들이나(예컨대, <올드보이>, <봄날>, <아일랜드>, <바람난 가족>, <영매>, <여고괴담>, <친절한 금자씨> 분석 장들),
“저렇게 될까바 두렵다”는 심리기제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지배이데올로기들에 ‘저주’와 ‘비체들의 유머’로 고단수 대응하는 방식들(예컨대 <영매>, <김약국의 딸들>, <일요일의 스키야키 식당>, <얼굴없는 미녀> 등)에 대한 분석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합리적 논쟁이니 합리적 핵심 대신에 이 책은 의도적으로 사회적 무의식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유령으로만 떠도는 그런 주체들이 남기는 그림자를 ‘바리하기’로 불러 낸다. 그림자가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그림자가 아니다. ‘타자’지만 주체다. 이런 ‘타자’들이 보여주는 것은, 1)알고보면 ‘타자들’ ‘비체들’에 대한 공포에 벌벌 떨고 있는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들(‘나 그렇게 될까바 무섭다야’하면서 부정하는 것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밤의 연회를 열어 무언가 (가부장제가 알면서 알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비밀’을 모의하는 마녀집회마냥 삐딱하고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가동시키는 또다른 리비도적 무의식들, 3) 창조적이며 능동적이기 때문에 억압되어 온 거대한 무의식들이다. ‘바리하기’라는 새로운 신공에 대해서는 <영매> 장을 잘 읽어보실 것.
이런 무의식들을 찾아나서고 분석해서 대체 무엇에 쓰자는 것인지 왜 하자는 것인지가 궁금하다면 두 편의 서문(머리말과 서문)을 직접 읽어보시라. 머리말은 따로 또 함께 폐끼침시롱 공부하고 모의하는 일의 즐거움을, 날나리 여우되기 신공의 과정을 스냅사진처럼 보여주는 글이고, 서문은 페미니즘의 자기성찰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한편의 진지한 유머다.
찌질대지 말고 웃겨서 죽여라. 이 책이 권하는 페미니스트 유머 신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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