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대학원신문에 실린 글. 박소영(여성문화이론연구소, melonhat@naver.com)

1. 생명공학-식인 눈을 가진 괴물의 뱃속에서
2. 페미니즘 주체의 체현-괴물의 눈을 재전유하기

생명공학-식인 눈을 가진 괴물의 뱃속에서

“시각화 기술……과학 기술적 업적 속에서 시력은 규제되지 않는 폭식이 된다….조 소풀리스는 이것을 그 배설물의 제2의 탄생을 위한 남성적 외계 프로젝트의 식인눈(carnnibal-eye)라고 부른다.” 다나 해러웨이, “상황적 지식들”,[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p339

2005년 3월 한국에서는 법학교수, 윤리학자등과 ‘배아 2명’이 생명윤리기본법에 대해 배아를 ‘세포덩어리’로 규정하고 배아의 생명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이 헌법소원은 당시 주목받던 황우석등의 인간배아복제줄기세포 실험에 대해 윤리적 제동을 걸기위한 시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배아’에 가해지는 인공적 조작을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듯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은 인공적 조작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배아의 기원을 슬쩍 지워버리고 배아를 ‘자연스러운’ 인간으로 인정하는 꼴이된다.

생명윤리 논쟁에서는 배아가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대표하고 시험하는 행위자로 곧잘 등장한다. 어느 시기까지의 배아를 생명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다른 동물의 배아실험에 대해서는 잘 제기되지 않고 주로 ‘인간’의 배아에 대해서만 제기되므로, 실은 생명의 경계에 대해 묻기보다는 인간의 경계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정치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문제시된 장은 배아실험과 생명윤리 논란이 아니라 낙태죄/낙태권에 대한 논쟁이었다. 몇 주 이상의 태아를 낙태할 때 ‘살인’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이때 ‘태아’는 젠더가 없는 인간으로서 모든 인간의 생명권을 대표하고, 임신한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권리가 서로 대립하는 개인 대 개인의 권리인양 맞서는 모양새가 되었다. ‘태아’라는 표현은 태 안에 있는 아이, 여성의 자궁을 전제하지만 이런 담론속에서 이미 태아는 자궁으로부터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불임클리닉의 페트리 접시를 자신의 생태계로 삼는 ‘배아’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으니, 기이하게도 우리는 자궁으로 자신을 출산한 어머니도 없고 성별도 없는 존재가, 인공적 조작에 의해 신체와 자아를 침해받아서는 안되는 ‘자연적 인간’을 대표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배아’라는 개념, 물질은 다음과 같은 조건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성의 몸에서 난자를 분리해내는 기술, 그 난자를 자궁이 아닌 페트리 접시위에서 수정시키는 기술, 난자와 배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현미경 기술, 배아를 태아와 출생한 아기와 연결시켜 한 인간의 수명을 ‘앞쪽으로’ 좀 연장한 것으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초음파 시각화 기술, 그리고 이런 기술들을 통해 형상화된 배아를 특정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문화적 배경(이를테면, 우리는 불임시술-재생산기술을 ‘가능’케한 진보의 수혜자라기보다는 특정 재생산기술을 ‘굳이 필요로 하는’ 문화에 살고 있는 것이다)등이 없이는 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아는 ‘자연스러운 인간’(만약 이런 것이 어딘가 존재한다면 말이지만)이라기 보다는 저런 갖가지 지식과 기술들의 문화적 체현(embodiment)이다.

이때 우리가 먼저 간과하기 쉬운, 그냥 ‘보아’ 넘기기 쉬운 지점은 태아나 배아를 모체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시키는 폭력(이것은 태아의 인격을 고려하기 이전에 먼저 여성의 몸에 고통을 가하는 일이다)이전에, 우리가 그것들을 분리가능한 것으로 인지할 수 있게하며 배아나 태아 등이 원래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기라도 하는 양 그것을 자연으로 믿게하는 ‘시각화’기술이다.

우리는 대체로 한눈에,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운 것과 인공적인 것, 생명과 생명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믿고 지내지만 우리의 눈자체가 이미 인공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우리는 저 멀리 우주의 다른 은하를 ‘보고’ 몸 속에 외계생명체처럼 우리와 다른 논리를 가지고 움직이는 면역세포들을 ‘본다’. 심지어 우린 토마토를 잘 시들게 하는 유전자나 비만을 억제하는 유전자도 ‘볼’ 수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본 것은 사실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우리중 대부분은 본적조차 없는 시각화 기계들-전자현미경, 전파망원경, 초음파 입체 동영상 기기-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한 풍경이다. 물리적으로 신체를 분리, 해체하고 장기와 세포, 생식세포, 조직들, 유전자들이라는 부분들로 몸을 사고 팔게 하는 현실을 문제삼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각적 도착(가장 조작적이고 인공적인 것을 가장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다는 의미에서)들, 시각적 물신화들을 문제삼아야 한다. 해러웨이가 소풀리스의 말을 빌어 표현하듯이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겨온 체현들-생명, 인간, 여성,…- 어떤 경계를 가진 몸들을 집어삼켜 그 경계를 녹여 해체하고 딸의 아이를 임신한 엄마, 쥐의 정소를 빌려 태어난 인간, 넙치의 유전자를 가진 토마토라는 식으로 전례없이 낯선 괴물적인 신체들의 조합을 가능케 하는 ‘식인 눈’을 가진 괴물의 뱃속에서 우린 살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 주체의 체현-괴물의 눈을 재전유하기

Biotechnology is the use of living parts such as cells or bacteria in industry and technology. -네이버 영영사전

위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공학은 간단히 산업이나 기술에 생체의 ‘부분들’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세포나 박테리아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없다면 이런 정의는 인간이 하는 모든 노동(손, 발, 눈 등의 신체의 부분들을 활용하고 다른 생물의 몸-가축,책상을 만드는 나무 등-을 활용하니)에 적용될 수 있다. ‘생명공학’이 이전의 노동, 기술들과 구별되는 핵심은 그저 생체를 이용한다는 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포나 박테리아와 같은 부분들”에 있다. 이 시대를 ‘생명공학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세포, 박테리아,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에는 모르다가 비로서 알게 되었다기 보다는 이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부분’으로 인지하는 시각적 재현방식을 택한 시대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에서 우리는 안/밖이 명료한 정치체(예를들면 국가)와 정체성의 체현들(여성, 인간….)과 개인의 몸의 재현을 아직도 받아들이고 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생명공학의 괴물눈을 통해 해체된 몸들과 재조합된 낯선 존재들을 목격하고 스스로 그것들이 되어가고 중이다. 생명공학은 가히 소설과 영화의 뒤를 이어 등장한 새로운 거대 재현기계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에 정치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을 구분해내고 나쁜 기술들로부터 배아나 인간, 여성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방식이 변화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성의 몸이 생명공학 발전의 ‘자원’내지 ‘대상’이 되어버린다고 지적하는 비판을, 여성인권 ‘보호’의 요구로 결론짓는 것을 넘어서 이제 생명공학이라는 새로운 재현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어떤 인간을 만들어가고 어떤 여성주체를 체현, 형상화할 것인가로 연결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여성의 신체에서 떼어낼 수 없는 어떤 부분은 최근와서는 ‘난자’라는 이름으로 이몸에서 저몸으로 돌아다닌다. 이미 ‘여성’은 다른 방식으로 체현되고 있다. 한번 변해버린 관계는 또 한번 다르게 변할 수는 있겠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소위 ‘황우석 사태’라고 불리는 최근의-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많은 비판과 분석이 쏟아져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논란에서 ‘여성’은 신체를 침해당한 피해자로 재현되었는데, 이러한 재현 속에서 여성주의적 ‘대안’이란 ‘정보에 입각한 동의 informed consent’라는 생명윤리법상 규정이 철저히 지켜질 것과, 가능한한 안전한 난자채취의 요구, 난자기증시의 기회비용보상과 부작용에 대한 보상의 요구에 그쳤다. 한편에서는 난자와 배아 채취와 보관과정을 국가가 센터를 세워 관리통제해야한다는 목소리까지 있다. 물론 이런 요구를 한 여성주의자들도 이 지점에 머무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난자를 물리적으로 여성의 몸에서 분리시키는 과정이 어떤 고통을 수반하는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하는 고발을 넘어서 이미 난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담론적 시각적으로 여성의 몸에서 분리시킨 기술-문화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한때 우리 신체의 뗄 수 없는 일부분이 었던 것이 따로 떨어져 명명되고 거래가능한 것이 되었을 때 그것이 희망이 될지 재앙의 시작이 될지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난자라는 ‘생식’세포가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몸의 안/밖으로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명명-거래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여성들에게 억압적이었던 기존의 가족, 친족의 명명-거래 구조를 완전히 뒤바꿀 가능성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르나) 아직 드러나지는 않은 가능성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괴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방벽이 아니라 생명공학이라는 괴물의 눈을 빌려 자신의 신체와 정체성과 관계들을 재조합하며 대담하게 그 가능성의 영역으로 도약할 상상력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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