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대학원신문에 실린글. 박소영( melonhat@naver.com)
황우석팀의 배아복제줄기세포실험이 한 편의 사기극으로 드러나면서 너도나도 관련토론회를 열고 신문 사설과 칼럼은 이 사건이 상기시키는 갖가지 한국사회의 모순을 언급하며 반성문써내기 바쁘다. 군사독재 잔재, 교수가 괴수로 군림하는 대학원문화, 국가주도 과학발전, 비판정신이 결여된 언론, 자본과 결탁한 생명공학/의료, 과학기술과 여성인권…… 그러나 반성문의 행렬은 전혀 새롭지 않다
1. 장애인의 고통과 복제된 미래
2. 난자제공의 고통 -고통을 비교하는 정치
3. 미래 – 존재할 권리?
황우석팀의 배아복제줄기세포실험이 한 편의 사기극으로 드러나면서 너도나도 관련토론회를 열고 신문 사설과 칼럼은 이 사건이 상기시키는 갖가지 한국사회의 모순을 언급하며 반성문써내기 바쁘다. 군사독재 잔재, 교수가 괴수로 군림하는 대학원문화, 국가주도 과학발전, 비판정신이 결여된 언론, 자본과 결탁한 생명공학/의료, 과학기술과 여성인권……
그러나 반성문의 행렬은 전혀 새롭지 않다. 매체들은 남의 참혹함이든 영광이든 가리지 않고 포르노적 묘사로 지면을 신나게 채우다가 거품이 꺼지면 구멍난 지면을 의례적으로 반성문으로 때우기 마련이다. 반성 자체가 구태의연하게 반복되는 현실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반성혹은 반성을 통한 조금은 나은 현실-미래는 불가능해졌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고 지루한 반성문 쓰기가 불가능해진 일 정도로 꼭 암담해할 필요도 없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대체로 남들보기 민망해서 현재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우기고 싶을때 써먹는 핑계일 뿐이지 않았던가.
과거는 반성하고 미래를 기획/상상한다는 반성문식 시간관. 그러나 과거는 지나가 버려 현재의 나자신과 떨어진 것이 결코 아니어서, 항상 모습을 바꾸며 내 안에 사는 현재이자 나도 모르는 어떤 미래이다. 또한 우리는 알게모르게 어느정도 예측된 일정한 미래를 기준으로 현재의 삶을 통제하거나 바꾸어간다. 소위 “황우석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무엇보다도 시급히 반성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우석 사건의 핵심은 미래를 담보잡아 어떤 특정한 현실을 정당화하고 그 현실을 다시 미래랍시고 재생산한데 있었다.
1. 장애인의 고통과 복제된 미래
2005년초 만들어졌던 인간복제배아줄기세포양성성공 특별 기념우표! 이 우표는 줄기세포실험논문이 허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미 심각한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표는 복제배아의 사진을 배경으로, 휠체어를 탄 것으로 상징된 장애인(실루엣 뿐이지만 머리가 짧은 여자 혹은 동성애를 그렸을 가능성은 없으므로 남자)이 휠체어에서 점차 일어나 걸어서 ‘비장애’여성(휠체어를 안타고 치마 입은 걸로 상징)을 껴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줄기세포실험이 행복한 미래를 가져다 준다는 메시지의 이 우표는, 행복하지 못한 현실은 휠체어를 탄 것으로, 행복한 미래는 비장애 이성과 연애하는 것으로 그려냈다. 그림이 한 남자장애인의 시간에 따른 모습이 아니라 각기 다른 다섯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동시에 등장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해보면-누군가는 휠체어에 앉아 불행하고 누군가는 뛰어다니고 누구들은 비장애들끼리만 연애(그것도 이성애만)하며 행복하다. 요약하자면 비장애이고 이성애자여야 행복할꺼라는 모종의 협박이 깔려있다. 실은 차별에 찌든 현재의 반복된 묘사 그 자체일 뿐으로 아무런 희망적인 미래도 표현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장애인이 겪는 고통의 많은 부분은 ‘신체적 고통 자체’라기 보다는 바로 이 우표가 대변하는, 장애‘치료’의 담론이 재생산하는 정상/결핍의 이데올로기 때문 아니었던가? 생물학적 의료적 처치가 장애현실을 개선한다는 담론은 개인들의 몸에 장애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크기나 모양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집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물한잔 떠마시기도 힘들게 만드는 폭력을 당연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만든 사회에 장애가 존재한다는 측면을 오히려 은폐하는 효과까지 가진다. 사회의 장애를 없애는 일-문턱과 계단을 낮추고 소위 ‘정상’내지 ‘평균’의 신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언어와 생활공간들을 좀 덜 편협한 것으로 바꿔나가는 일에는 거의 투자나 지원이 없는체로 막대한 자금과 희생을 (환자나 장애인보다는 주로 기업들에게 ‘대박’을 가져올) 미래의 신기술에 쏟아붙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고통이 동원된 것이다. 황우석 씨 말마따나 일년이면 어떻고 십년이면 어떤가? 어차피 현재의 반복인데.
2. 난자제공의 고통 -고통을 비교하는 정치
한편으로 황우석사건에 개입하는 ‘여성계’의 논리-배란유도제 투입과 난자추출시의 후유증 및 고통을 강조하고 이 고통을 다시 ‘여성인권’과 연결시키면서 이를 국익이나 과학기술발전 논리와 대립시키기. 이렇게 난자추출시의 고통을 강조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강제배란/난자추출 하는 것에 반대해야할 것 같지만 ‘여성계’의 움직임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불임시술시 강제배란제 투여와 난자추출은 막을 수 없는 ‘현실’이므로 국가가 법적으로 혼인한 부부의 불임시술에만 난자가 이용되도록 ‘투명하고 안전하게’ 관리해달라는 것이 최근 민우회의 요구이다. 이 요구는 난자기증여성의 인권의 측면에서는 장애인/불치병환자 가족을 위해 실험에 자발적으로 ‘안전하게’ 난자기증하겠다는 난자기증재단 여성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난자제공과정의 ‘고통’을 강조하며 마치 난자기증재단보다는 더 여성인권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두 입장은 그저 채취한 난자를 결과적으로 어디에 쓸것이냐에서 다를 뿐이다. 여기 적어도 세 가지 고통이 은연중에 저울질되고 협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난자제공자의 고통, 불치병환자/장애인의 고통, 불임부부의 고통.
난자제공자의 고통으로 ‘전체 여성’을 불러내며 ‘여성인권’을 거론해 얻는 효과란, 여성단체가 말하는 ‘여성문제’가 불치병환자/장애인과 그 가족이 겪는 문제나 불임부부의 문제와는 마치 별개의 것이라도 되는 양 보이게 한 것 뿐이다. 글쎄, 혹시 효과가 한 가지 더 있다면 여성단체가 고통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전체 여성을 대표/정책제안/입법할 정당성을 조금은 더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묘하게도 난자제공자의 고통을 정치적 정당성의 담보로 삼은 이 경우도 모종의 현실을 반복한다. 매체상에서 ‘여성계’의 많은 필자들은 난자채취와 그 후유증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묘사하는 데 글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터넷에는 굵고 긴 바늘이 질을 관통하여 난소를 찌르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이 돌아다녔다. 국가와 과학의 욕망에 무참히 관통당하는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할 여성의 몸! 이런 이미지에 안티-페미니스트들마저 동의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을 너무나 자명하게 보여주어서가 아/니/라, 이 이미지가 여성억압을 가능케하는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보호받아야 하는 몸이기에 밤에 길거리를 마음대로 돌아다녀서는 안된다는 식의 논리에 여성들의 신체와 행동은 통제받아 왔고, 한층 더 슬프게는 여성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자신의 몸과 행동을 통제해왔다. 여성인권을 ‘보호’할 제도를 주장하는 민우회등의 논리가 한편으로 생명공학/재생산기술에 다양하게 접근할 여성들의 선택의 여지(가뜩이나 없는데)를 국가가 차단해달라고 요구하는 결과가 되버린다면 어쩌겠는가? (실제로 민우회가 추진해온 재생산기술과 재생산권 관련 법안은 난자공여를 합법적으로 결혼한 부부-동성부부, 싱글맘, 외국인은 일단 제외되게됨-에 한정하고 있었으며, 수입난자를 제공할 수 있는 외국인 여성은 ‘여성인권보호’의 관심밖이다).
3. 미래 – 존재할 권리?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 현재의 고통. 고통은 종종 가장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진실처럼, 무엇보다도 다급하게 제거되어야할 통증처럼 언급되며 어떤 입장을 정당화해준다. 하지만 살펴보았듯이 고통이 비교될 수 없는 무엇으로서 어떤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바로 그 방식으로 고통들은 비교된다. 만약 소위 ‘황우석 사건’, 이 모종의 야단법석에 어떤 여성주의적 개입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고통을 통해 ‘여성’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고통들이 비교되게 만드는 정치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고통이 진실을 보증해주며 누가 더 옳은가를 견주어 특정한 목소리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정치. 이 정치는 묘하게도 그 이면에서 누가 옳은가를 넘어 누가 ‘자연스러운’가를 무시무시하게 판결내는 정치를 (중단시키긴 커녕) 진행시키고 있다.
장애가 ‘치료’담론을 통해 개인의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되고, 저출산이 불임부부를 상징삼아 의료적 ‘치료’가 필요한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되어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있어 문제란 ‘정상가족의 생물학적 재생산여부’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일정한 가족형태(이성애부부와 그 유전적/생물학적 자식을 기본단위로 하는)와 일정한 인간형이 ‘온당하고 자연스러운 가족/인간’인 상황, 특정한 경우에만 가능한 현실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존재자체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규정되는 어떤 이들은 동등하다고 인정받을 권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특정한 현재를 현재로 반복, 복제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미래시제가 아예 할당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 나와 당신의 내부에 그리고 바로 옆에 살아있으나 존재할 권리는 없는 수없는 미래들이 보이는지? 우리는 과거를 반성하고 고통으로부터 우릴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한 미래들-낯선 시간들이 줄 새로운 상처와 고통들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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