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헤드의 블로그 사진으로 걸려 있는 문구다. 아마, 1920년대 진정으로 급진적이었던 ‘신여성’들 중 누군가가 주장했던 것이라지. 가끔 돕헤드의 블로그에 들어가 눈팅함시롱도 나는 이 ‘혁명은 부엌으로부터’라는 문구에 반복적으로 호출당하곤 한다.
예전에 1910~30년대 출간된 여성 잡지들 영인본을 보면서, 이 시대 여성들의 탁월한 식견과 ‘우리’ 버젼의 급진 페미니즘에 매우 놀랐을 뿐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잡지들을 대충대충 훑어보면서 이 ‘신여성’들의 급진적 의식에 비하면 지금 여기 ‘우리’의 의식이나 스타일, 감수성은 진전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열라 순치되었다는 걸 부끄럽게나마 계속 깨달아야 했다.
‘혁명은 부엌으로부터’라는 말은, 여성해방없는 노동해방, 여성해방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뜻이다. 혁명이라 치더라도 그것은 남자들끼리의 권력투쟁일 뿐, 혁명이 지닌 해방적 의미는 근본적 수준에서 침해당한다는 뜻이리라. (엥겔스도 지적한 대로, ‘최초의 피지배계급은 여성이었다.’ 여기에 마리아 미즈를 위시한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덧붙힌다. “여성, 최후의 식민지”라고.)
20세기의 혁명적 운동들은 “여성들이 민족 해방에 끌어들어지면 페미니즘은 진보할 것”이라고 유혹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노동/민족이 먼저냐, 여성이 먼저냐”라고 윽박지르곤 했다. (물론 “남성이 먼저냐, 노동/민족/혁명이 먼저냐”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 왜냐? 이 세상에 남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의 성으로 인해서 정체성 분열을 겪을 필요가 없도록 구조화된 세상 속의 ‘주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혁명적이니 민족적이니 하는 형용사들은 매우 의심스럽다. 오히려 무장투쟁이든 평화투쟁이든 노동운동이든, 투쟁의 위기에서 여성들이 동지로 출현할 때마다, 젠더화된 육체에 대한 낡은 코드화들이 다시 자리를 잡게 된다는 것이야말로 20세기 운동들의 역사가 가르쳐준 바이다
부엌으로 상징되는 노동들,
말뜻 그대로의, 온갖 ‘살림 노동들,
사적인 것이라고 치부되지만 실상은 사회적인 노동,
흔히들 남성 영역이라고 정의되는 생산을 떠받치기 땜시롱 부차적이라고 정의되어 온 재생산 노동들,
재생산과 살림 노동들의 상당 부분인 감정노동들,
‘더 잘 살기 위해서’ 혹은 ‘어쩔 수 없이’, ‘여성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무엇이든간에, 여성들의 공적 노동과 소위 ‘사적’인 노동을 이중으로 착취해 먹는 자본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변혁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화 속에서 심화되고 있는 여성의 빈곤화, 여성들에게 점증하게 부과되는 가족부양의 상황등을 보다 진지하게 고려해 본다면,
이러한 체계에서 “여성의 육체는 최종심급이다.” 특히나,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정때문에 혹은 ‘모성’이라는 미명하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정서적 책임”(affective responsibility)의 사슬에서 여성/부엌은 최종심급이다.
(사실 우리 시대의 핵심은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이다. 모든 것은 재생산의 형식으로 생산된다. 뿐 아니라, 맑스주의 틀을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재생산에 실패하는 생산은 생산이 아니다. 이것이 자본이 맑스주의 통찰을 뛰어넘는 지점들 중 하나다.)
작년 올해 (앞으로 당분간?) 최대 쟁점이 될 비정규직 관련 투쟁을 보자면, 남성들과 여성들은 신자유주의적 노동 유연화의 논리와 위력에 집단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최종심급으로서 여성의 몸은, 분명히 비정규직화 즉 신자유주의적 노동 유연화가 가동되는 핵심 기제인데도, 그 핵심으로 보여지지 않는, 딴데(elsewhere) 떨어져 있다. (KTX 비정규직 여성 승무원 투쟁을 보라)
성에 의한 임금과 직업의 차별은 마초 우글대는 시장 세력의 농간, 남성위주의 노동자 운동의 편협한 이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노동자 운동 역시 (세련된 경우라면 성차별주의는 아닌 척하면서) 가부장제를 철두철미 활용한다.
물론 여성들 사이에도 화해불가능한 차이들이 있으며, 하위층 여성의 경우는 도처에 널려 있으면서도 여러 가지 운동들과 담론들에 의해서 다시금 ‘여성’으로 단일화되어 여러 사회세력들이 가하는 억압이 은폐된다.
‘우리’는 급진적으로 다시 물을 필요가 있다. 누가 변혁운동, 노동운동의 (윤리적) 주체인가? 국제적 공산주의의 잘못된 모험은 맑스의 가장 취약한 부분, 즉 역사적으로 유럽에 그 중심을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지역에 유럽중심적인 예언적 시나리오를 부과함으로써 야기된 폭력적 결과에 대해서 일러주는 바가 있으리라. 또한, 20세기의 반체제 운동들의 부분적 성공과 부분적 실패, 역사적 퇴행 과정이 가르쳐 준 대로, 남을 억압하면서 혁명을 하려는 자들은 결코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혁명은 부엌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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