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에서, 일상의 성정치학이라는 정희진의 주체와 구체적인 분석들은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라는주제곡의 다양한 변주곡들이다. 이것은, 서구의 근대성이 형성된 주축이기도 한, 소위 공/사 구분에 입각하여, 20세기 (실패한) 혁명들처럼, “공적” 영역, 즉 사회적 영역들에 대한 변혁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여성들의 경험과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소중한 통찰이기도 하다. 이 “나의 변태는 곧 사회의 변화이다”는, 부르주아적 개인주의나 종교적 도닦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붉은사랑 블로그 설명글마냥 “관계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를 촉발하는 출발점인 것.
정희진의 책은, 모든 것을 성/젠더 초점으로 굴복시키는 일종의 돋보기라기 보다는, 빛을 퍼져나가게 하는 회절기같은 책이다. 그러면서, 바이러스처럼 나를 (그리고 독자들을 행복하게 그리고/또는 불편하게) ‘감염’시켜 다른 눈들을 선사한다. 회절기이자 바이러스로서 이 책은 억압적 단결통합이나 융합 대신 확산시킨다.
예컨대,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은 자본주의를 탈영토화하면서 사회적 영역들에 대한 재배치를 시도했고,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새로운” 체제에 맞는 “새로운 인간”을 생산, 재생산하는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즉, 공적 영역의 변화가 사적인 영역에까지 들어 오지 못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선적으로는, “사회주의” 소련이 자기 이념을 전파하고자 주변 국가들을 “위성”국가로 만들고 동유럽의 인민들과 국가들에 “해방”의 미명하게 폭력을 자행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보라.
그리고, 사회적 변화가 개인들의 미세한 일상에 침투하여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키지 못할 때, 그러한 변혁은 “꼬인” 변혁이자 언제나 파편적인 변화(변혁이라기 보다는)에 그친다. 사회주의 국가를 자임했던 소련의 경우 역시 일상의 재배치에 있어서 가부장제는 고스란히 있었고 (물론 경제적 필요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들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 나갔지만), 남성중심적인 전지구적 자본의 지속적이고 은근한 압력 하에서 결국은 그 압력에 무릎을 꿇게 된 그런, 대안적 사회 실험 쯤으로 역사에 기록될 운명을 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야 말로 그에 맞는 인간/주체를 생산, 재생산하는데, 사회의 모든 기제들을 동원하여, 성공한 역사적 체제다. (그래서 인식론적 투쟁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며, 인식론적 투쟁의 핵심은 “나”들의 삶을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즉 “변태”하는 것이다.)
“변태”하며 유목하기: 재배치-유통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내는 지배 기제들을 보다 정합적으로 분석하고 여러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성과들 중 하나다. 정희진 역시 구체적인 물적 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에 따라 여성들 역시 차이를 띠기 마련이며, 다른 운동들이 그러하듯 여성운동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방식으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한다.
여러 (집단적) 차이들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을, 사안이나 관계성에 따라 복수적인 입장을 띠는 한 개인들이기도 한 여성들을 싸잡아 “여성”으로 호명하는 것이야말로 여성억압이라고 일갈하는 저자에게, 예컨대,
정체성, 진보, ‘운동’이란 경합에 열린 대화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보편으로 화하지 않는 특수, 차이들을 구체적으로 맥락화하고, 내부의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대화와 소통은 시작될 수 있다.
즉, 보편화, 동질화, 자연화, 민족화가 주는 편안한 ‘순수’나 (알고보면 사이비인) ‘본질’보다는, “자신을 ‘오염’에 개방하면서” “소통가능한 보편”을 지향하는 횡단의 정치를 추구하자는 것(20). “소통, 경합, 횡단의 정치, 페미니즘”이라는 정희진판 페미니즘의 핵심에는 인식론적 투쟁이 페미니즘 이론과 정치의 심장부를 차지한다는 온당한 인식이 있다.
구닥다리 보편주의를 거부하면서 “정황적 지식들”과 복잡성에 좀더 주의를 기울이는 이 책에서 페미니즘은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퍼져나가는 유통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즉, 물질적, 제도적 사건들, 투쟁들과, 상징적 혹은 비가시적인 효과들을 텍스트 삼아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 넣어 다른 의미들과 가치들을 뽑아내고 새로운 관계성의 양상들을 유통시키는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
몇 가지만 예로 들자면,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은유로서 모성, 아줌마가 폄훼적 용어로 쓰이는 맥락과 성정치적, 사회적 함의, 말과 성차별, 여관의 성경제학, ‘위안부 누드’의 지배 에로티시즘, 다이어트와 섹스, 진보 및 인권이라는 의문스런 개념들,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성역할, 여성으로서 늙는다는 것, 군사주의 등 각각의 분석’텍스트’들은 한 여성의 입장에서 본 구체적인 사회적 역사적 맥락 속에서 다시/다르게 보았을 때, 다른 의미들을 드러낸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다름 아닌 폭력이었으며, 폭력이 권력으로 둔갑하는 것은 남성지배에 유리하게 의미와 해석을 부여하는 인식-권력 네트워크를 통해서라는 것. 성, 젠더, 성적 실천, 섹슈얼리티, 나이 등이 사회적 의미와 가치들을 규정하는 권력 관계의 네트워크로 작동한다. (남성)권력의 복잡하고 미세한 작동 네트워크를 포착하는 또 다른 네트워크로서 페미니즘은 지배적인 의미들을 생산하는 주조틀을 비틀고, 넘의 둥지에 알을 낳아 키우는 뻐꾸기 마냥 권력 네트워크 안팎에서 지배적 의미망들에 균열을 내고, 다른 의미들을 산출하고 대안적 세계관들을 바이러스처럼 확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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