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하인즈 워드 현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배타적 내셔널리즘을 버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교과서 개정이라든가, 그밖에 별별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내게는 다르게 읽힌다.

워드는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다. ‘혈통’이라는 것이 있다면(사실은 관념에 불과하지만), 그는 절반만 한국인의 피를 가진 사람이다. 국적도 한국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를 한국인 내지 한민족이라 부르는가? 워드를 통해서 혼혈인들에 대한 차별이 덜해진다면 그건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경계인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국적도 다른 사람을, 한국어도 모르는 사람을 절반의 핏줄만 지녔다는 이유로 한국인 내지 한민족에 넣고 싶어하는 그 생각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워드의 성공을 보여주며 언론은 한국인의 피의 우수성을 오히려 역으로 부채질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워드 현상은 한국의 강고한 내셔널리즘을 깨는 계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교묘하게 강화시키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언론이 유포시키는 ‘순혈주의를 반성하자’라는 구호는 하인즈 워드의 성공이 ‘한국인’의 피와 ‘한국인 어머니’의 희생적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암시로 둘러싸여 그저 겉돌 뿐이다. 왜 언론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라고 부를 수 있음에도 그를 ‘한국계 선수’라고 부르는가? 부계 혈통을 강조하는 한국사회가 왜 갑자기 모계 혈통에 환호하는가? 인종차별주의, 배타적 순혈주의, 단일민족 신화가 깨질 때가 되어서 그런가? 천만에! 내가 볼 때는 오히려 그것들을 해체시켜서 더 강력한 사고와 관념을 만들어 내는 중이라고 보인다. 지금 우리 안의 ‘한국’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이데올로기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2006년 4월 10일 현재, 이곳 필진네트워크의 머릿기사로 이 땅의 혼혈인들을 코시안이라 부르지 말자는 글이 올라와 있다. 코시안이란 차별적 용어 대신 코리안이 되고 싶은 그들을 코리안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혼혈인에 대한 차별을 그만 두자는 글임에도 우리 안에서 자라는 이데올로기로서의 ‘한국’이 슬쩍 모습을 드러낸다.

‘코시안’은 그 자체로 차별적인 용어가 아니다. 다만 코시안을 한국사회가 차별하는 것뿐이다. 오히려 코시안은 ‘혼혈’이라는 말에 비해 가치중립적이다. 혼혈이라는 말 자체가 피의 순수성이 오염되었다는 투의 어감이 들어 있고, 그 용어가 쓰이는 맥락들도 매우 차별적이다. 그에 비해 코시안은 그야말로 한국인과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태어난, 그래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는 비교적 가치중립적인 용어이다.

용어야 그렇다치고, 코시안을 ‘코리안’으로 멋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들을 그렇게 내 맘대로 부르는 것은 “그동안 차별해서 미안했다, 앞으로는 같은 편으로 끼워줄께” 하는 식의 발상 밖에는 안 되는, 언어적 폭력이다. 그들은 절반은 코리안이지만, 절반은 필리핀인이기도 하고, 태국인이기도 하며, 베트남인이기도 하다. 왜 꼭 그들을 한국인으로 넣어야 하는가?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더 바람직함에도 우리는 왜 그들을 저쪽 아니면 이쪽으로 줄 서도록 하는가?

문제는 이 사회가 열광하는 ‘한국’이 주변에 대한 배려나 주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봐서 기분 나쁘면 내팽개치고, 기분 좋으면 한국인이라 부르며 반겨주는 것, 그런 취급을 당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분명 폭력이다. 만약 코시안 중에서 누군가 대단한 성공을 하고, 그 사람을 두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민족이라고 주장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을 둘로 나눠 가져야 하나, 아니면 두 사회에 모두 속한 코스모폴리탄이라고 이해해야 하나?

우려되는 것은 ‘한국’과 ‘한국인’의 새로운 범주에 북한과 북녘 동포들을 포함시키지 않는 쪽으로 그러한 관념이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민족(ethnic group)보다는 국가(nation)를 우선하면서 귀속감도 1차적으로는 국가, 즉 ‘한국’이라는 단어에서 느끼고 있다.

하인즈 워드 현상은 얼핏 한국사회의 닫힌 문을 여는 계기일 것 같지만, 불행하게도 권력은 워드를 통해 이데올로기로서의 ‘한국’을 강화시켜 가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동북아시아에서 국가주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조선족의 경우 일방적인 한국과 중국에 끼어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불명확한 틈에 놓여있다. 그들을 서로 자의적 기준을 들이대며 편입시키려 하다가는 큰 난리가 일어나고 만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과연 동북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EU를 모델로 할 것인지, 유고를 모델로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민족과 국가가 일치하지 않기에 그것을 일치시키려 전쟁을 벌인 유고와 민족이나 국가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보려는 EU의 노력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지금처럼 ‘한국’의 부정적인 모습을 고치자는 언설들 속에서조차 ‘한국’에 열광하도록 하는 은근한 부채질이 계속된다면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언제 금이 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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