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미국에서는 192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1945년에서야, 스위스에서는 1971년에서야 인정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성참정권.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의 부인들이 <여권통문>을 통해 남녀평등한 참정권을 주장했고, 1919년 임시정부 당시 남녀평등을 ‘대한민국 임시헌장'(헌법에 해당)에서 천명하였으며,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의원을 뽑는 첫 선거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된 선거를 치렀다.

여성참정권의 확립만 본다면 한국사회도 소위 선진민주국가들에 못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최근에 YMCA 여성참정권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으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매듭이 지어질 것으로 믿는다. 참정권과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는 재외동포들의 경우이다.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기에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다만 ‘국민’이 아니라 ‘주민’, 즉 그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는 거주지에서의 정치적 권리의 인정 여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국경없는 이동의 시대에 있어서 이중국적 허용 여부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거꾸로 한국에서 장기간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문제 역시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진보적인 여성참정권 실시와 도발적인 제안들을 무색하게 하는 내용들이 한국의 선거법에 버젓이 남아있다는 내용이다. 바로 ‘동표시 연장자 우선 당선’ 조항이 그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국회의원 및 지방의회 의원선거에서 최고 득표자에 2인 이상이 같은 수의 표를 얻었을 경우, 나이가 많은 사람을 당선자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좀 자세히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현행 공직선거법(개정 2005.08.04) ‘제12장 당선인’

제188조(지역구국회의원당선인의 결정ㆍ공고ㆍ통지)

① 지역구국회의원선거에 있어서는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가 당해 국회의원지역구에서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다만,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연장자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제190조(지방의회의원당선인의 결정ㆍ공고ㆍ통지 <개정 2005ㆍ8ㆍ4>)

① 지역구시ㆍ도의원 및 지역구자치구ㆍ시ㆍ군의원의 선거에 있어서는 선거구선거관리위원회가 당해 선거구에서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지역구자치구ㆍ시ㆍ군의원선거에 있어서는 유효투표의 다수를 얻은 자 순으로 의원정수에 이르는 자를 말한다. 이하 이 조에서 같다)를 당선인으로 결정한다. 다만,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인 때에는 연장자순에 의하여 당선인을 결정한다. <개정 1995ㆍ4ㆍ1, 2000ㆍ2ㆍ16, 2005ㆍ8ㆍ4>

대한민국 헌법 제2장 11조 1항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ㆍ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나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발행 <월간 인권> 2005년 1월호에 실린 특집 ‘너, 몇 살이냐?’ 제하의 칼럼에서는 연령에 의한 차별이 심각한 차별기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투표에서 같은 수의 표를 얻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냐며 무시할 수도 있겠다. 사실 투표권자가 몇 만 명 이상이 되는 국회의원 선거는 동표자가 나올 확률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몇 천 명 단위의 지방선거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 2002년 6ㆍ13 지방선거 당시 경기도 동두천시 상패동 기초의원 선거에서 이수하, 문옥희 후보는 똑같이 1,162표를 얻었지만 ‘득표수가 같을 경우 연장자순’이라는 선거법 제190조 규정에 따라 42년생인 문 후보가 53년생인 이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보다 앞서 1998년 6ㆍ4 지방선거 당시에는 인천시 남구 주안4동 선거구에서 구의원에 출마한 배 아무개 후보(55)와 임 아무개 후보(54)의 경우 재검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후보가 3,794표를 얻어 연장자인 배 후보를 당선자가 된 사실이 있다.

뿐만 아니다. 선거법의 동표시 연장자 우선 원칙에 기대어 사회 곳곳에 비슷한 선거원칙이 ‘활약’ 중이다. 예를 들면 전남 영광군 옥당초등학교의 경우 초등학교 운영위원 선출시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일 경우 연장자가 당선”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2004년 부천시의회 부의장 선거에서도 동표 상황이 되자, 연장자가 부의장으로 당선 인정된 바 있다. 포항시 개인택시면허업무처리규정 제5조(우선순위적용) 1항을 보면 “같은 등급에서 경합이 있을 때에는 장기 무사고 운전경력자순으로 하되 택시, 기타 사업용자동차, 자가용자동차의 장기 무사고 운전경력순으로 적용하며 이때에도 경합이 있을 때에는 주민등록상 연장자를 우선으로 한다”는 규정이 있다. 울산태권도협회 회장 선거 규정에는 “동표일 경우 3차까지 투표 후 연장자 우선”이라는 규정이 있으며, 한국방송대학교 부산지역 경영학과 총학생회 회칙에도 제12조 (권한대행 및 불신임) 1항에 “학생회장이 궐위되었거나 부득이 한 경우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에는 부회장중 연장자가 그 직무를 대행한다”는 규정이 있고, 서울강동구약사회의 회장 선출 규정에도 “동표일 경우 연장자 우선 순으로 당선이 확정”되며, 주민자치를 위한 교양강좌의 교본에서조차도 입주민 대표가 유고시 연장자에 의해 입주자대표회의가 운영되는 안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 같은 풍토는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한국건축시공학회 회장 선거 역시 동표시 연장자 우선 규정에 의해 치러지며, 대한치의학회나 대한교통학회, 한국정책학회, 대한간호학회, 대한수의학회, 전력전자학회, 한국재정공공경제학회 등등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동표를 얻은 후보들이 만약 생년월일도 같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원칙과 기준으로 당선자를 뽑아야 할까? 남녀? 학벌? 출신지역? 피부색? 정말 궁금하다. 현실적 가능성은 희박할지라도 원칙의 문제인 것이다. 선거법이 공정하게 후보들의 능력과 도덕성에 기초하지 않고 연령에 의한 차별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에서 형식과 과정의 민주주의 및 주민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는 제도는 실종된 것이다.

국회의원선거 및 지방의회의원선거에서 하루빨리 결선투표제나, 찬성투표제ㆍ보다산출제 등을 도입하여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바란다. 아울러 차제에 민족주의ㆍ순혈주의에 입각한 국적법과 참정권에 관한 논의들이 시작되기 바란다. 말로만 하인즈 워드가 ‘한국사람’이라고 떠들지만 말고, 그들에게 참정권을 주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학계에서는 ‘동아시아론’이 이미 10년 전부터, 그리고 최근에는 동(북)아시아에서도 자유로운 인적 교류나 공동화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고 있다. 언젠가는 이 지역에서도 EU식 통합 논의가 시작될 텐데,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의제를 선점해서 새로운 질서를 주도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현명함’이다. 연령 차별과 같은 사회 내적 모순부터 해결해야 더 큰 모순들과 싸워 이길 토대가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의 대전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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