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형법상에도 강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배우자가 아닌 부녀자에 대해, 동의 없이, 폭행이나 협박이 수반되어야 한다. 미 형법상 강간죄 역시 우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의 법이 영미법과 대륙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에는 남성도 포함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남성에 대한 강간죄의 가해자 역시 남성만으로 한정지어 해석하고 있는 듯 하다.)

저자가 지적하는 강간죄가 다른 범죄와 다른 점은, 다른 범죄들은 가해자의 행위가 불법적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대신, 강간은 피해자의 행위가 가해자의 불법성을 규정짓는데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수사 역시 당시 피해자의 행위에 맞춰져 있다. 19세기 후반에는 강간죄의 피해자에게 ‘최대한의 저항’이 요구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힘을 총동원하여, 행위가 끝날때까지, 저항을 계속해야 ‘동의없는’ 성관계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백인 여성에 대한 흑인 남성의 강간이 그 반대나 같은 인종끼리의 경우보다 가혹한 처벌을 받았고, 모르는 사람에 의해 이뤄진 강간이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강간보다 기소율이 높았다. (알고 있는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 기소 자체가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서 강간의 역사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역사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강간의 역사는, 성차별과 유교 사상의 역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강간죄에서 동의의 문제가 논란거리가 된 것은 거의 20세기에 들어와서부터다. 저항은 경우는 말할나위도 없고, 부동의의 경우를 거절의 의사표시로 볼 것인가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점에 대해 논쟁이 전무했던 그 전 판례들에서는 많은 단순 강간 사건을 무죄로 처리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뛰쳐나와서 폭행이나 협박으로써 강간한 케이스가 아닌, 아는 사람에 의해, 그리고 뚜렷한 물리적 저항이 없는 단순 강간죄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좁혔다.

강간죄에서 피해자의 저항이 있었는가(최소한 멍이나 옷이 찢어졌다거나 하는 등의)는 중요한 문제로, 우리나라 판례를 보면 단순 부동의는 강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추세다. 그래서 알고 지낸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거나, 최초의 접촉이 자발적이었는지 여부는 동의가 있었음을 입증하는데 중요하다. 미국 형법상 강간죄를 심리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가해자와 알고 있었다거나 (특히 과거 가해자와 성관계 경험이 있었다거나) 가해자와의 접촉이 자발적이었는지, 그리고 피해자의 성적 전력 (sexual history)과 평소 품행 (정숙한가) 은 배심원들의 판단에 영향을 크게 미치며 그에 관한 질문 역시 허용된다. 즉, 피해자가 평소의 성생활은 어떠한지(처녀이냐 창녀이냐에 따라 엄청나게 차이난다), 주변의 평판은 어떤지 등이다.

피해자의 부동의가 물리적인 저항으로 인정받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 배심원들과 법원은 단순 강간사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피해자(대개 여성들)가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불신을 전제하고 있다. 당시에는 모호한 태도를 취해 가해자가 동의로 받아들였는데 후에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성관계라면 좀더 면책이 될까봐’ 태도를 바꿔 고소한다고 생각한다. 하버드 법대 교수인 저자는 자신이 강간 당한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그렇게 여길만한 어떠한 근거도, 논리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 일과 관계없는 사적인 부분도 재판과정에서 들춰지고 인간적인 모욕을 당하는 걸 감수하면서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도 동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부동의를 거절로 받아들이기도 난감하다. 여성 (물론 피해자가 남성도 될 수 있지만 논외로 한다.) 은 성관계시 의사표시를 정확하게 하는 경우가 많지 않고, no 를 yes 의 의미로 사용한다거나, 약간의 강제적인 섹스를 즐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경우를 다 강간죄로 처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데이트 중의 성폭력이 몇 년 전 논란이 되었다. 얼마 전에 다시 기사거리로 출현한 것도 슬쩍 봤는데, 강간에서 ‘폭행’의 개념 정립이 확실히 안 된 듯 하다. 먼저, 어렸을 때부터 성폭력에 관해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남녀 모두에게 해당된다.) 법의 수정, 법관의 평등하고 올바른 해석이 요구된다. 고등학교 때,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잡지에서 성폭력 예방에 관해 무척 실용적인 지침들을 봤다. 가장 최후의 방법이라고 나와있는 마지막엔, ‘목숨이 순결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였다. 순간 띵했다. 우린 무엇을 배웠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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