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으로서 최지영의 글쓰기는 집단적 망각과 공모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자, 변혁의 공간을 창조하는 투쟁이다. 최지영이 마련해 주고 있는 변혁의 공간을 채우는 몫은 이제 당신들과 우리 자신이다.

(너부리)

최근에 고통 속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최지영의 글쓰기는 고통을 가로질러 여러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들도 불러내고 있다. 체험이란 공유함으로써 경험이 되고 집단의 기억이 되며 정치가 된다. 최지영과 다른 여성들의 따로 또 함께 글쓰기/말하기는 사회적 소수로서 여성들의 말하기가 갖는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이들의 글쓰기가, 특히 최지영의 글쓰기가 분명하게 보여주듯, 개인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여러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통해서 보면, 최지영이 활동했던 조직에서는 몇 년 전의 김원호 성폭력 사건과 지금 여기서 진행중인 최지영의 말하기를 마치 몇몇 개인들 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 그리고 조직 일부(성폭력 대책위원회라던가)의 문제쯤으로 치부하고 자픈 집단 무의식과 여전한 비민주적 몰성적 위계적 이해관계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노동자 운동 조직이라는 노동자의 힘 기관지에 연재중이라는 최지영의 글쓰기는, 성폭력이란 개인들간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관계)의 문제이며, ‘회피노력’이니 ‘도덕적 규율’ 등으로 은근슬쩍 가려질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며, 그러므로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최지영은 자신의 경험과 고통, 되새김의 성찰과 다시 보는 과정을 통해서, 성폭력을 젠더권력 문제이자, 일상에 농밀하게 배여들어서 도저히 각성이 잘 되질 않는 일상적 문제이자, 조직 내 관계맺기(즉 문화)의 문제라는 점을 또박또박 지적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지영의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급진적일 수 있는 (재)해석의 정치이다.

회원이 아니라서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최지영의 말하기를 보다 집단적인 것이자 집단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팀블로그 및 지지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눈팅하자면, 최지영이 관련했던 조직 내부에서는 이러한 급진적 재해석의 정치에 구태의연한 자기방어와, 역피해의식, 그리고 몇 년 전 성폭력대책 위원회의 미숙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는 가 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힘 역시 계몽주의자들의 한계를 고대로 노정한다: 깨인자는 깨지 못한다.)

최지영의 글은 성폭력을 둘러싼 해석의 정치들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깊숙이 연루했던 활동가의 경험으로부터 노동운동 단체의 일상의 단면들을 잘 보여준다. 노동-계급 지상주의와 (알고보면 일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자기들이 반대하는 가치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위계적 문화(관계맺기 ways of relating), 당위와 신념을 내세우지만 또한 동시에 위선적이고 추상적이기 짝이없는 도덕적 엄숙주의에 찌들어 있는 노동운동은 당위를 내세운 내부억압에 기반하고 있다. 내부로 부터 억압이 존재하는 한 근본적인 의미의 해방활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억압하면서 해방하려는 자들은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한다. 여성주의적인 정치와 섬세한 감각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노동해방을 외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자들의 비민주성은 권력의 속성과 꼭 닮아 있다. 권력은 반성하지 않는다. 권력은 반성할 줄 모른다.

반면, (눈팅으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최지영의 글쓰기를 전후하여 따로 그러나 또 함께 촉발된 성찰의 몸부림들은 천천하지만 급진적인 어떤 과정을 보여준다. 몇 년 전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노동자의 힘은 집단적으로 미숙했던 듯하다. 성폭력이 문화전반에 깔려있으면서도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부됨으로써 젠더 권력관계와 (성)착취적, 성차별적 권력문화/조직문화를 그들은 잘 알아보지 못했던 듯. 상황이 이러하다면, 최지영의 글쓰기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매우 근본적인 수준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최지영의 글쓰기는 몇 년 전 당시의 미숙했던 정치적 경험들을 급진화시키는 촉매제이다. (물론 그녀의 글쓰기가 관련 조직에 집단적 촉매제로 작용할 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그만큼 관련 조직은 반성할 줄 모르는 권력을 닮은 조직으로 경화된 듯 하고, 다른 한편 성관련된 일들은 우리의 무의식과 도덕적 터부, 우리도 강력하게 내장하고 있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들을 다 불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지영이 지적한 대로, 이 게임은 철저하게 권력관계 게임이 된다. –노동운동 혹은 급진 운동한다고 지배 이데올로기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강력한 대항의식을 형성하지만 다른 지배 이데올로기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우리 안에 내면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농밀하게 팽배해 있는 여성혐오증! 특히나 급진운동,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루한 여성활동가들의 여성혐오증은 조직 내 남성지배를 공고히 하는데 활용된다.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여성들끼리 싸우는 것처럼,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정치적 문제이자 권력, 문화의 문제를 ‘사적인’ 것 혹은 개인들 간의 문제로 치부하게 도와줌으로써…..)

20세기 사회주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의 혁명들은 언제나 최대한 절반의 혁명이었을 뿐이고, 남자들만의 잔치였다. 그리고 쇠락해 갔다.

이제 출발점에 있는 최지영의 글쓰기는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의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더욱더 힘겨운 싸움임을 이미 예상하고서 시작된 그녀의 글쓰기의 출발점에서, 의지란 사치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살겠다고staying alive 자기 경험을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열어놓음은 웰빙be well에 관한 것이며,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것은 부서진 경험 파편들과 마음의 조작조각들을 다시 모아놓는 작업이다. 그녀의 글쓰기는 온전한 삶being whole에 관한 것이자 온전한 삶을 위한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우리 사회의 노동이론/운동진영은 유독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계급지상주의적 반지성주의의 맹점들 중 하나랄까)

최지영의 글쓰기로부터 우리는 다시금,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조직적인 것의 구분(예컨대, “그래도 나는 조직을 믿는다” 운운하면서 최지영을 지지하는 척하면서 최지영의 글쓰기가 들려주는 어떤 진실을 회피하고 그것을 부분적인 파편으로 부수려는 것)이야말로 지배가 지속적으로 실천되는 방식이라는 점을 보게 된다. 더 중요하게는, 소위 “개인적/사적인” 영역들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심하게 상처받고 다치고 비인간화되는 곳이라는 점을 일어준다.

최지영의 글쓰기는 개인적 성찰 속에서, 자기 경험을 여성으로서 (다시) 생각하면서, “사적인” 영역 운운을 통한 지배와 억압의 뿌리를 들어내고 있다. 그녀가 리얼what is real이라고 써내려 가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만큼이나 현실적인 요구가 된다. 우리를 더 이상 기만하지 마라. 우리는 현실적인 것을 원한다. 관련 조직 내에서 이런 목소리들이 얼마나 될지 참 궁금하다. 젠더권력에 의한 식민화로서 남성지배의 역사는 배반과 거짓과 사기와 침묵의 역사여 왔다. 최지영의 글쓰기는 노동운동의 대의와 명분하에 가려진 내부의 배반, 거짓, 사기, 침묵을 들추어내면서, 매우 현실적인 것을 요구한다. 현실적인 것에의 요구는 다름 아닌 개선, 집단치유, 변혁의 요구이다. 저항하고 드러내는 글쓰기 속에서 그녀는 허위적인 현실(노동운동의 대의와 명분, 당위만이 판치는, 즉 남성중심적 조직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말하는 어떤 –알고보면 허위적일뿐더러 위선적이며 역시 위계적 권력관계로 성층화된– 현실)을 드러내고, 여성으로서 우리들 자신을 다시 주장하고reclaim 재발견한다.

최지영의 글쓰기는 지배에 대한 것이자 고통pain에 대한 것이다. 활동가로서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배리되는 경험들에서, 급진운동의 대의, 명분과 충돌하고 모순적인 관계 맺기의 방식들에서, 여성으로서 폄훼되고 비인간화되며 소외되는 과정들에서, 상실과 2차, 3차 소외의 과정들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고통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투쟁으로서 최지영의 글쓰기는 집단적 망각과 공모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자, 변혁의 공간을 창조하는 투쟁이다. 최지영이 마련해 주고 있는 변혁의 공간을 채우는 몫은 이제 당신들과 우리 자신이다.

최지영의 글쓰기 투쟁을 지지하면서, 그녀가 열어젖히는 변혁의 공간들에서 급진적 되기radical becomings가 춤추고 더 해방적이고 더 민주적인 문화가 뿌리내리는 실험들이 펼쳐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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