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한미재계회의”를 향해
1.
정치적 쟁점으로서 한미 FTA는 ‘큰 사안’이다.
어찌 말하면 ’87년의 ‘개헌정국’ 이래로 단일쟁점 속에 직접적으로 한국사회의 장래에 대한 총괄적인 전망이 표현된 최초의 사례이다. 거꾸로 말하면 한미 FTA 저지 투쟁을 어떤 시점, 어떤 맥락에서 진행하는지가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한국 진보진영이 한국사회에 대해 말하고 밝힐 수 있는 총론적 상을 예비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흔히 한미 FTA추진세력이 주장하듯, ‘한미 FTA가 아니면 무엇을 할 테냐’라는 질문에 따위에는 대답 할 필요가 없다. 안 하느니 못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니까.) 반대파이든 찬성파이든 모두 ‘국운이 걸렸다’고 주장하는 사안에 대해 반대하거나 혹은 찬성하는 이유는 대중이 그 사안을 크게 받아들이면 받아들일 수록 곧 그들의 ‘다른 이름’, 그들이 한국사회에 대해 발언하는 준거틀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FTA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결국 그 마지막 진실은 국익도, 을사늑약도 아니고, 미국의 패권주의도 아닌… (이를테면) “한미재계회의”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한미FTA 저지투쟁이 한국사회에 대한, ‘평등-연대적 전망’을 위한 플랫폼이 되게 하는 것에는 그 투쟁 속에 “vs한미 FTA” = “vs노정권” = “vs 한미재계회의” 의 등식을 얼마나 성립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과연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의 마지막 문제 일 것이다.
2.
한미FTA 저지 투쟁이 한편으로는 ‘국익/국권’의 담론을 중심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졸속추진에 대한 비판’으로 흐르는 것은, 발언자들의 정치적 습관과도 물론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쉬운 길/쉽게 보이는 길’에 대한 무의식적 경사이기도 하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전기가 저항이 약한 경로로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한미 FTA 반대투쟁과 물이나 전기의 흐름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사회적 운동은 ‘주관’을 지닌 ‘물분자’ 나 ‘전하’의 움직임이라는 점이다. 즉, ‘쉽게 여겨지는 것’이 실제로 쉬운 길, 실제로 목적달성에 더 용이한 길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미FTA저지투쟁에서 “vs한미재계회의”의 구도를 그릴 수 있다면, 사실 사태는 많이 단순해진다. 국익이냐 아니냐, 협상이 졸속이냐 아니냐, 미국의 압력이 있을까 없을까, FTA 안 하면 무엇으로 성장하는가 등등…은 적어도 한미 FTA에 대한 태도를 가르는 중요 논제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국적’ 초국적 자본과 ‘한국 국적’의 초국적 자본의 민중에 대한 공격이며, 사회적 약탈이라고, 자신이 미국계 초국적 기업이나 (사실상 초국적 기업인) 국내재벌의 대주주나 임원이 아닌 이상,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자해행위일 뿐이라고 알면 나머지는 2차적, 3차적 문제,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원래 반대하는 것을 더 잘 반대하기 위해 첨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른바 국익이나 ‘국권’의 문제, 협상과정의 졸속성 문제 등이 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상대의 주장에 대한 ‘조목조목 한 반박의 리스트’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대가 뽑은 주장들의 항목에 맞춘 반박, 즉, 한미 FTA 추진세력들이 주장하는 개별 항목들을 둘러싼 진실게임의 영역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거나 바보짓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미 FTA를 ‘수단’으로서 생각해내고 제시하는 관점 그 자체, 그것이 전제하는 가치와 전망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도, 대안도 되지 않는다. 즉, 이는 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가능성, 혹은 그들이 바보짓을 하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적어도 순 논리적으로라도) ‘0%’가 아닌 이상, 그들의 주장에 대한 진실게임만으로는 ‘결정적 박멸’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87년 개헌정국을 이끌고 간 동력은 전두환 정권의 ‘호헌’주장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든 상대는 독재정권이라는 근원적 불신과 적대에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이 ‘국민투표’라는 단어이다.)
3.
한미 FTA가 ‘큰 사안’이다. 반대이든 찬성이든 그 내부에 단일하지 않은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사회민주주의에서부터 사회주의 지향의 제 세력, 나아가 신 좌파적 급진주의에 이르는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적 좌파’가 한미 FTA 저지투쟁을 그들의 전망과 연결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특히 그들이 자신들의 전망이 한미 FTA 저지투쟁을 진정한 승리로 이끄는 데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말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한미 FTA 저지투쟁은 ‘반 신자유주의’, 시장물신주의에 대한 반대와, ‘반 자본’의 지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 자본’이다, ‘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이윤에 대한 갈망에 대항하지 않고서는, 어떤 수준에서도 유의미한 진보적 변화는 실현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한미 FTA 그 자체에 대해서는 ‘대안’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한미 FTA를 수단으로 도출해내는 흐름에 대해서는 우리는 분명 대안을 지녀야 한다. 사실은 지금 한미 FTA라는 인공재난을 강권하기에 이른 신자유주의적 운동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왜 한미 FTA에 대해 대안을 말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인지를 궁극적으로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한미 FTA의 실제 내용뿐 아니라 그것이 위치하는 사회적, 정치적 맥락과도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다.
즉, 노무현 정권이 그것을 “외부충격을 통한 개혁”이라고 지껄이듯. 1997년, 전임 DJ 정권때 부터 (IMF관리체제를 ‘핑계’삼아) 급격히 가속된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제도적 완성판이 이를테면 한미 FTA가 될 것이다. 실상 김대중 정부 때 시작되고, 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며 끈덕지게 추진하는 주요 사회경제 정책들은 거의 모두 ‘노동시장의 유연화 – 자본 자유화 – 공공재의 사유화’정도의 항목이면 모두 분류가 가능하다.
4.
그러나 좀 더 긴 시간을 놓고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소위 ‘민주개혁세력’이 친시장적이지 않았던 역사는 적어도 ’80년대 후반 이후로는 없었다. 그들의 ‘관치경제’에 대한 비판이 과거에는 좀 달리 들렸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때는 뭔가 달랐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귀가 그동안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 진보진영이 그들이 관치경제를 비판하고 ‘민간(즉,시장)주도’을 떠들 때 그것을 ‘위험한 시장주의’로 강하게 비판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1980년대 이미 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더불어, 개발독재시기의 국가주의적 발전노선에 대한 우리의 비판이 주로 ‘관료자본주의적, 천민 자본주의적’이라는 언술, 즉 ‘근대성의 부족’에 중심이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종속적, 천민적 자본주의’의) ‘왜곡과 기형성’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관념 속에서 그것이 근대자본주의의 이념형에 따른 자유주의적 정상화로 귀결할 가능성을 큰 위험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처가 (민간자율과 경쟁의 원리를 내세운)개혁으로 영국병을 치유했다’는 발언은 ‘민정당’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YS도 했고, DJ도 했던 발언이다.
‘시장주의자’의 정권이 IMF로부터 강도 높은 시장주의적 구조조정을 요구받았을 때, 그리고 그것이 노동대중의 (충분히)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을 때, 나올 수 있는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여기에 잠시 다른 측면을 더해 말한다면, 협상은 협상대표들에게는 언제나 피곤한 일이고, 외적변수는 종종 국내정치에 대해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과정을 우회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는 실용정치상식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군사독재의 ‘북괴’, 김대중의 ‘IMF’, 그리고 노무현의 ‘미국’은 그 점에서는 동일한 역할을 지닌다.)
따라서 IMF는 고양이에게 생선을 먹으라고 ‘강요’한 것이다.
5.
즉, IMF의 강압과 오판이 한국의 외환위기 후유증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국민적 정치공간에서의 과정을 통해 걸러지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무시할 수 없는 내적 저항이 없다면, 당장 돈을 쥔 국제금융기구와의 협상은 그 ‘국내 담당자들’에게 쉽게 넘어가고 싶은 일이고, 나아가 그 담당자 자신이 원래 시장주의자라면 더 말 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DJ정부는 IMF와의 협상조건에 대한 사회적 대화를 하는 대신 ‘금부치와 애국심’을 모았고, 그것이 효과를 보는 만큼 협상은 그 담당자들에게는 편해 졌을 것이며, 당연히 사회와 민중에게는 과도하게 가혹한 구조조정이라는 결과를 안겨준 것이다. (개발독재/발전국가를 거치며 구성된 성장물신주의와 국가주의-민족주의의 동맹은, 이렇게 다시금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가 사회적 논쟁과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을 회피하는 정치적 우회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들은 IMF관리체제를 예정보다 빠르게 졸업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그것은 대다수 사회구성원이 ‘비상조치’라고 여겼던 것을 ‘일상의 질서’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왜? 그들은 원래 시장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다소 급격하게 진행된 감이 있지만’이 그들이 그 과정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유감이다. 그들은 언제나 ‘경제운영이 관주도에서 ‘민간’ 즉, 시장의 자율성과 경쟁에 맡겨져야 한다고 말했었다.
이처럼 그들이 자신들의 소신에 해당하는 것을 ‘외부의 강압’까지 받으며 수행한 결과가 최근 ‘양극화’라 지칭되는 대중의 빈곤화와 경제적 불안정의 증대였다.
그럼 카드돌려막기로 지탱되는 ‘신 대중경제론’에서부터 부동산 버블로 ‘선진화’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지역균형투기’론에 이르기까지 경기활성화라는 명분으로 동원되는 갖가지 무리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시장주의자이지만, 동시에 정객인 그들이 자신들의 소신이 실현된 결과에 대한 단기적인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두른 파렴치의 기록일 뿐이다. 대중의 불만이 덮쳐오는 그 장소, 그 시간을 피하겠다는 목적만으로 실행된 정책들은 언제나 노동자, 민중에게 잠시 후 고리대의 이자를 붙여 덮치는 가중된 고통으로 결과했다. 물론 그들 역시 끝까지 피할 수는 없다. 결국 정치적 파탄의 지경에 몰린 열우당의 모습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아직 서막이다.
6.
매우 웃기는 일이지만, 시장주의자들은 시장이 실패할 때 항상 ‘시장원리가 충분히 관철되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되려 생떼를 쓰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즉 그들은 오늘의 사회적 위기를 IMF관리체제로 부터 본격화된 한국사회에 대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1단계가 ‘불충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떼를 쓴 다음, 그 대책이 ‘한미 FTA’라고 내놓는 것이다. (시장주의는 유사 종교이다. 22세기, 23세기가 와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언제나 인간들에 미천함에 의해 – 덧붙여 ‘반(反) 시장의 악마들’에 의해 – 왜곡되고 손상되는 세계만을 살 것이다. 아멘~)
즉, 한미 FTA 추진의 정치적 배경은 당연히 노무현 정권의 한탕주의에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현재의 역사적 정세에서 지니는 의미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 신자유주의 경쟁국가의 제도적 완성을 위한 강수인 것이다. 즉, 노무현 정권의 한탕주의는 그 ‘역사적 과업’의 수행자가 자기 자신이 되고픈 빗나간 정치적 공명심의 발현인 셈이다.
궁극적으로 한미 FTA 저지투쟁이 담는/담아야 하는 의미는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불리우는 폭력적인 시장주의, 초국적 금융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재-사유화 운동에 대한 거부이며, ‘평등-연대’적인 사회적 대안에 대한 촉구가 될 수밖에 없다/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이 사회적 투쟁으로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 중심 모티브는 실제로 누구의 이익을 위해, 누구의 삶이 대가로 지불될 것인가에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 이익의 주체가 초국적 자본 – 미국계 다국적 자본 뿐 아니라, 이미 초국적화된 한국 대자본 일 것이라는 점에서, 이른바 국익론, 주권론의 접근, 즉 ‘미국 대 한국’이라는 설정은 많이 취약하다. 당연히 그 가장 큰 함정은 초국적화된 ‘한국자본’의 존재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경쟁적 민족주의의 동반관계에 있다. 게다가 이미 앞서 말했듯, 미국이라는 외생변수가 그 동안 한국 정치에서 종종 ‘알리바이’로 기능해온 것을 생각한다면, 특히 그 많은 사례가 노무현 정권과 연관된 것임을 생각한다면, 근거가 박약함에도 끊임없이 미국의 압력과 강요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접근은 자기가 심은 지뢰에 자기가 폭사하는 자폭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독점적 수혜자가 (국적이 어디이든) 초국적화된 자본이라는 점에서 ‘국민경제의 통합성’이라는 주장은 일정한 전술적 유용함을 지니고 있으나, 핵심적인 피해의 주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추구하는 ‘탈 근대적 종획운동’의 가장 큰 제물이 노동, 빈곤대중의 삶이 될 것임을 명징하게 밝히지 못하는 한 초국적화된 토착자본에 대한 상상적 동일시를 통한 국익론에 대한 충분한 저항선을 형성할 수 없다.
7.
그런데, 그동안 적대자를 ‘자본’으로 설정할 때 난점으로 지적된 것은 그것이 국가나 정권과 같은 충분한 가시성을 지니지 않는, 즉 뚜렷한 얼굴이 없는 추상적 존재라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한미 FTA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에 동반되는 재-사유화 운동의 일환임에 걸맞게 초국적 자본이 국가를 넘어 직접 자기 얼굴을 들이밀어주고 있다. 바로 “한미재계회의”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초국적 자본, 특히 초국적 금융자본의 지배에 대해 가장 환호하는 미국과 한국국적 자본가들의 회의가 한미 FTA를 촉구해 왔다. 한국의 통상관료들은 그 회의장에서 스스로가 이룬/저지른 성과를 보고한다.
한편의 음모론 영화와도 같은 이 기막힌 설정을,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왜? 분명 자유주의 정치개혁세력의 몰락에 따른 정계의 지각변동, 부동산과 북핵문제 등 갖가지 정세의 요동 속에서도 한미 FTA에 대한 대중의 불안은 언제나 50%를 넘는 반대율을 유지할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나머지 모두가 찬성론자인 것조차도 아니다.
그러나 진보진영에게는 대중적 불안을 충분한 정치적 힘으로 전화시키기 위한 날카로움이 없다. 초국적 자본 대 노동자, 민중의 구도를 충분히 그리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쉽게 말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충분한 지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구도를 그릴 수 없었던 것은 한미 FTA 추진 그 자체가 깔고있는 맹목적 시장숭배에 대한 비판이 우리들 자신에게도 부족했다는 것에 있다. 즉 우리가 한미 FTA에 대한 ‘시장주의적 대안’을 질문 받지 않을 조건인,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그 폭력적 시장주의에 대해 단기적, 중기적 범위에서조차 ‘다른 전망’을 거의 제시하지 않아 왔다는 것에 한미 FTA 저지투쟁에 임하는 진보진영의 근본적 불안이 존재한다. 폭로의 정치, 진실의 정치만으로 삶의 방식, 삶을 생각하는 방식을 독점한 상대와 맞서는 것은 매우 불리한 전투일 수밖에 없다.
한미 FTA 추진은 결국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동안 진행되어온 국가주도형 발전국가로부터 신자유주의적 경쟁국가로의 변형을, 즉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완성하기 위한 강수에 해당한다. 그러나 변화의 시기는 또한 가능성들의 분기점이며 경합하는 선택지, 경합하는 사회적 벡터와 전략들 사이의 투쟁의 시기이다. 우리들이 그 속에서 또 다른 선택지, 또 다른 사회적 벡터를 구성하지 못하는 ‘현상유지적 저항’에 고착된다면 결국 우리에게 올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더 나쁜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의 성과를 지속하는 것만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상쇄할 만큼의 전진적 벡터일 수밖에 없다.
“한미재계회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노동자, 민중, 심지어는 미국의 노동자, 민중이 이익까지 희생물로 만드는 것이 한미 FTA 임을 말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 중요하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한미재계회의”로 상징되는 초국적 자본의 최대이익이 실현되는 게임의 룰 대신 다른 어떤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사회적 발전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다가올 질문이다. 설령 단기적, 중기적 수준의 것이라도, 설령 최소강령의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설득력 있는 ‘평등-연대’적인 사회적 대안을 구성해야 할 급박한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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