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위 게시판에 썼던 글이라 문체가 좀 간지럽지만, 다시 쓰기 귀찮을 수 밖에 없는 종류의 글인 관계로 살짝 편집해서 그대로 울궈먹는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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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동안 상설연대체 논란에 대해 말을 하거나, 혹은 생각을 열심히 한 적이 없던 것 같네요. 아마도 일종의 ‘찜찜한 귀찮음’의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실 상설연대체 이야기, 그리고 그 기반에 있는 ‘전선체’론은 생각보다 그렇게 당연스러운 주장도 아니고, 그것을 당연스러운 것인양 말하기 위해서는 사실 굉장히 많은 전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제가 동의하거나 혹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항목이 별로 없다는 게 도리어 사람이 말하기가 상당히 귀찮아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대체로 일반화된 공통준거를 통해 비판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또 제 나름의 일정한 경향성에 의해 비판적인 부분도 있고 말이지요. 앞에 비중을 두면 성에 안차고, 뒤에 비중을 두면 확실히 설득력도 제한되고 또 말해야 할 것도 늘지요. 그래서 아마 그냥 넘어갔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뭐, 제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내의 이런 저런 사람들, 그룹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비판의사를 개진하기도 했구요…
뭐, 일단 많은 부분 조금 시간이 지난 이야기지만, 그런 만큼 편하게, 인상비평정도로 두서없이 짚어 보겠습니다.
1.
일단 첫번째 문제는 ‘효율성’입니다.
‘상설연대체’가 대중투쟁의 집행에 더 효율적이라는 이야기는 모든 주장 중에 제일 난해한 부분입니다. ‘상설’이라는 단어가 붙으려면 어느 수준 이상의 정치적 의견일치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사회적 투쟁을 이루는 개개의 의 사안이나 이슈에는 일반적인 정치적 지향과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방식으로 여러 형태의 이해나 관심이 결부되고, 그에 따라 여러 사회집단들이 일정하지 않게 개입됩니다. 심지어는 이슈의 흐름에 따라 한 집단, 세력이 들락거리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급식조례제정’에 함께 하는 사람들 중에는 총선때 열우당은 물론 한나라당 찍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괄하지 않고 만나지 않으면 급식조례제정운동 할 수 없겠지요. 나아가 그걸 통해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역량을 확대하는 것도 할 수 없을거구요.
한미 FTA 저지운동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포괄성 만큼이나 다양한 집단의 이해가 결합되며 진행될 수 있고, 또 협상의 양상을 따라 그들의 입장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한의사들 같은 경우입니다. 당연히 그들 모두에게 ‘상설기구’ 수준의 정치적 태도를 전제로 요구하며 FTA저지투쟁을 진행 할 수는 없습니다. 비제도적인 형태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게 거의 할 수 있는, 그리고 해도 되는 일의 전부에 가깝습니다.
때문에, 사회적 투쟁 속에서 대중적 관심이 형성되고 대중적 동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사안과 이슈들을 타고 진행되는 것인 한, 설령 ‘상설연대체’가 만들어지더라도 국면 국면의 활동을 실제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사안별 연대기구를 만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할 일거리와 접촉하고 획득할 사람이 있는 곳에 조직이 따라간다는 것은 조직형성의 원칙입니다.
여전히 연대기구의 숫자는 사안만큼의 숫자가 될 것이고, 상설연대체가 실제로 해주는 것은 +1, 회의와 사무실의 갯수를 상시적으로 하나 더 늘려주는 것이 되겠지요. 사회운동의 공간에서 ‘일거리와 사람’, 즉 고유의 대중, 고유의 의제도 없는 곳에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한 ‘낭비’입니다. 때문에 그런 종류의 조직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보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솔직하지 못한 정치적 술수로 비쳐질 수도 있습니다.
민중운동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만 형성되어, 사실상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후비대 역할만 하다 망한, 일군의 시민운동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 시민운동까지 말이 나온김에 덧붙여 말해버리면, 고유 대중의 이해를 축으로 한 조합적 운동체나, 아니면 특정 의제에 대해 전문성을 지니는 운동체가 아닌 사회운동체를 저는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제가 정당의 당원이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조직은 결국 정당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진보정당이 아직 없을때 장외의 정치적 단체, 상설적인 정치적 투쟁기구라는 것은 나름의 의미를 지닐 지 모르지만, 원내 진보정당까지 있는데 고유의제나 고유대중 없는 상설적인 정치적 투쟁기구는 상당히 무의미 한 ‘옥상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맥상통한 이야기지만, 조직 여러개를 한데 묶으면 ‘대중투쟁이 잘 되지 않을까’하는 식의 발상이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관료적인 ‘행정편의주의’입니다.
처음부터 대중투쟁이라는 것은 대중의 자발성이 핵심이 되고, 그 자체 정치활동의 성과에 해당합니다. 즉 대중투쟁을 잘 하려고 이 조직, 저 단체를 상설적으로 묶어놓는다는 이야기는 투쟁의 기술적 방식으로서 ‘가두군중투쟁’과 대중적 정치활동의 성과로서 고양된 자발성의 발현인 대중적 투쟁/대중행동에 대한 혼동입니다. 꽤 정치적 의식이 높다는 조합적 대중조직은 물론이요, 심지어 정당조차도 대중적 조직구성인 한 활동력은 조직적 동원체계 이상으로 ‘사회적 분위기’에 좌우된다는 것은 모를 수 없습니다. 조직체계를 하나로 묶는다고 정치적 설득력이 커진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안에 대한 관심을 통해 다양한 집단과 개인을 엮는 사안별 연대기구가 계속 등장하고 또 등장할 것임은, 그리고 그것이 정당과 함께 사안 사안에 대한 대중행동을 구성하는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안별 연대기구는 그 형성 자체로서 사안에 대한 태도와 관심을 표명하는 수단이라는, 즉 그 자체가 의제설정의 수단이 되는 정치적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사안별 연대기구는 만들고 또 만들게 될 것이고, 정치적, 정책적 대표성은 정당의 몫입니다. 상설연대체는… 글쎄요 무슨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2.
두번째는, 흔히 말해 전선체 운동이라는 용어가 한국의 진보운동 역사에서 가진 독특한 맥락과 의미를 따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운동 속에서 ‘전선체’라는 용어 자체는 ‘통일전선’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제 운동의 역사에서 그와 떨어질 수 없는 단어 중 하나가 지금은 사용되지도, 그리고 사실 사용할 이유도 없는 ‘반합법’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진보세력의 공개적 정치활동이 합법적 정당과 선거를 축으로 진행되는 그 정치활동을 통해 정치적으로 대표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인식에 의해, 가두 군중투쟁을 주된 정치활동 수단으로 삼는 ‘법외적’인 그러나 공개적 조직형태를 ‘전선체’로 상정한 것이지요. 물론, 그 명칭이 ‘전선체’인 이유는 ‘전위당’이 아니라서라는 인식에 의해 붙여진 것인데, ‘전위당’은 비합법, 비공개여야 한다는 이유에서 공개기구는 ‘전선체’라는 식의 작명이지요.
즉 한국적 맥락에서 ‘전선체’라는 용어의 의미는 ‘통일전선 형성을 동반한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당시의 일반적 인식 하에서는 일정하게는 비합법, 비공개 조직의 외곽 역할을 하며, ‘당면의 정치적 과제’를 내걸고 가두군중투쟁을 지도하는 공개조직이라는 뜻이었습니다.
’89년 만들어진 ‘전민련’, 그 후 대중조직을 결합해 만들어진 ‘전국연합’, 뭐 그런 조직들이 대체로 그런 구상의 연장에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반합법이라는 용어는 이제는 쓰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보를 대표하는 정치조직은 진보정당입니다. 정치활동의 기본 양상은 정당의 활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상설연대체 이야기는 제게는 자꾸 ‘민주노동당의 시대’에 ‘전민련’ 또 만들자는 식으로 들려 이해가 꽤 어렵습니다.
3.
세번째, 이왕 전선체 이야기가 나왔으니, ‘통일전선’에 대해 따져보지요.
반파시즘 인민전선이나, 반제 민족통전이 유명하지만, 용어 자체는 ‘노동자전선’에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노동자전선이냐, 인민전선이냐는 논쟁도 있지만, 제 생각에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통일전선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기술적 핵심에 있는 것은 ‘제 당파의 연합’이라는 사실입니다. ‘제 당파의 연합’을 뺀 통일전선론은 팥이 아니라, 아예 밀가루가 없는 찐빵입니다.
통일전선 구상의 핵심은 언제나 정권구성 차원의 정치적 협약을 통해 당장 이데올로기적으로 불일치를 지닌 광범한 대중을 포섭한다는 구상입니다. 그 정권이 ‘개량적 노동자정당과 혁명적 노동자정당이 연합한 (방어적)노동자정부’냐 ‘부르주아 정치세력 일부도 참여하는 인민전선/민족전선정부냐’ 하는 것은 그 다음의 논쟁꺼리입니다.
솔직히 저는 우리가 지금 개량과 혁명을 무 자르듯 하는 것이 유의미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다. 하지만 그것은 일단, 논외로 치고 꽤 급진적인 사회주의 그룹들과 사민주의 지향의 그룹들이 한 정당에 있는 것이 민주노동당이고,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이 아닌 순수한 사민당이나, 순수한 급진적 사회주의 정당이 쉽게 성공할 법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사회적, 대중적 당면과제는 한편으로는 세계적 흐름인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자본주의의 오랜 노동배제, 민중배제적 성격에 대항해서 대중의 생존적,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자체를 당장 극복할 수는 없다고 해도, 당장 기본적인 사회적 통합, 인간적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동배제적 정치지형과 노동력의 안정적인 재생산조차 보장하지 않는 사회적 양상은 극복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시대적 요청‘입니다.
그럼 한국사회에서 이 요청에 걸맞는 정당/당파는,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그리고… 끝입니다.
최소한 ‘노동’이 국가, 자본과 동등한 자격의 사회적 교섭상대로 인정되어야, 자본주의 사회로서의 ‘안정성’을 위해서라도 사적자본의 개별적 이해와 자산소유계층의 사적 이해는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제약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최소 합의선’입니다.
즉, 사회국가적 타협의 주체 자격만 따져도 노동의 이해, 노동, 빈곤대중의 이해를 집약적, 우선적(배타적)으로 대변하고, 자본에 대한 대항세력으로 자임하고 또 대중적으로 이해되는 정치세력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치적 가치가 인정되는 진보블록의 한계는 민주노동당에서 끝입니다. 민주노동당 보다 더 오른쪽의 진보라는 범주는 사회적으로 무의미합니다. 즉 지금 조건에서 유효한 ‘통일전선’이라고 해봐야 핵심은 ‘민주노동당과 사회당의 공조’입니다.
게다가 언제나 ‘통일전선’의 핵심은 더 왼편이 아니라, 더 오른편을 끌어들여 광범한 대중을 포괄한다는 것에 있어온 이상, 당면의 사회적 과제에 부합하는 세력의 범위가 거의 민주노동당의 당내 스펙트럼 정도에서 끝나는 ‘통일전선’은 양 진보정당의 선거공조 이상의 할 일이 없습니다. (물론, 그건 전혀 잘 될 것 같지가 않지만…)
한마디 더 하자면, 통일전선이 다양한 계급계층의 이해를 통합하고… 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특히 ‘반봉건 농민혁명’이 필수적인 사회적 과제라도 되는 조건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실질이기 보다는 수사에 해당합니다. (코민테른 시절의 고전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치적 조류를 ‘계급이해의 표현’으로 직접적으로 환원하던 경향 탓에, 그렇게 운율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인구의 다수가 이미 노동자계급이거나 노동자계급과 결정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부수적, 과도적 계층인 사회에서 ‘제 당파의 연합’이 수행하는 실질적 역할은 다름아니라 당면 요구를 축으로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넘어 노동자계급을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30년대 유럽에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구성하는데 핵심사항이 무슨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혁명단계’를 수행하려고 ‘일부 진보적 부르주아 분파의 경제적 이해를 인정하는 것’ 같은 것일리는 없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당면의 과제’를 위해 연합할 수 있는 범위에 열우당이나 참여정부의 외곽 역할을 하던 종류의 사람들까지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넘어 노동자, 민중을 통일시키는데 기여할 ‘통일전선’이라는 것은 논의할 필요 이전에 논의할 대상 그 자체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그리고 좀더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몇 가지 생각을 덧붙이지요…
첫번째로, 저는 상설연대체구상, 그리고 그것이 기반에 깔고 있는 ‘전선체론’의 한국적 맥락과 ‘통일전선론’적 맥락 모두가 현재의 한국사회에서는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지금 노동운동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실질적인 계급대표성의 문제’입니다. 이는 노동자계급/노동시장의 위계적 분할이 객관적인 사실인 만큼 심각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영향 아래서 주변화, 탈안정화된 노동자들은 당장 다수라는 것을 넘어,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존재양태로서 지배적 경향입니다.
왜 상설연대체 이야기를 하다가 비정규직 문제를 말하는지 궁금하실텐데, 그것은 통일전선형 구상에서 계급은 대중의 현실적인 사회적 존재방식으로서 다뤄지지 보다, 이미 그 통일성이 주어진 ‘정치적 표상’으로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즉 계급존재와 계급적 운동의 조직적 표현 사이의 거리는 전선적 구상에서 다뤄질 수 없습니다.
전선론의 구도 속에서는 당장 ‘전선체’에 포괄되는 조직적 실체로서 계급적 운동체의 계급대표성은 하나의 선험적 전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양한 계급, 계층의 연합을 중심의제로 삼으면, 당장 ‘전선체’에 포괄되는 조직적 실체로서 계급적 운동체의 계급대표성이 선험적 전제가 되어버리고, 노동대중 내부의 점증하는 위계적 분할의 문제는 보편적 정치의제가 아니라 부문적 문제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게다가 통일전선론, 특히 다양한 계급계층의 연합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노동자계급’과 중간층 혹은 부르주아 일부의 동맹을 상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 포괄성의 범위에서 현실적인 정치적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통일전선론의 구도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대표체’는 중간층과 부르주아, 즉 ‘소자산가계급와 자본가계급’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무산계급의 일반이해’를 대표하는 것으로 가정됩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실질적 계급대표성의 문제’라는 것은 결국 노동자계급의 내적 분할 속에서 그 ‘하층’이 아닌 ‘상층’의 이해가 과다 대표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계급계층의 통일전선’이라는 구도 속에 지금 그 전선구성에 참여한 조직적 실체에 의해 대표되는 노동자계급의 이해 보다 ‘더 낮은’ 이해는 사고 가능한 범주가 아닙니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그것은 보편적인 정치적 쟁점이 아닌 부문, 영역의 국지적 문제가 됩니다.
이는 주변화, 탈안정화 된 노동대중의 고유이해에 대한 정치적 저평가, 심하게 말해 하나의 정치적 배제의 구도가 될 수 있는 것이고, 나아가 그 자체 뿐 아니라, 주변화와 탈안정화된 노동대중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지배적 경향인 상태에서 ‘계급정치’ 자체를 불구화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계급계층을 포괄한다’는 말이 함의하는 바에 걸맞는 정치적 연합 자체가 정세적으로 유의미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구도를 정치적 중심의제로 상정하는 것 자체가, 지금 진보정치의 최대의 문제인 노동대중의 위계적 분할과 그로 인한 빈곤과 배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부차화 시키는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5.
게다가 ‘민중의 다양한 요구와 이해를 통합하는 연대투쟁을 위해서’ 대중조직과 사회단체를 상설연대체/투쟁체로 묶는다고 해도 역시 문제는 발생합니다.
일단 부문적 이해의 평면적 배열이 곧 연대투쟁인가라는 원론적인 문제도 있습니다만, 더 심각한 문제는 부와 권력 뿐 아니라, 대중 내에 사회적 교섭자원 역시 불균등하게 배분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교섭자원의 차이는 단지 ‘운동과 투쟁의 역사적 유산’인 것만이 아닙니다. 기업별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개별자본의 시장지배력이 지니는 상관관계처럼 일정한 수준에서는 사회적 불평등과 배제의 구조를 반영하기도 합니다. 즉 비정규노동자도 그렇지만, 심지어 실업노동자나 빈곤층처럼 사회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조건에서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사회적 상황은 빈곤화와 배제가 증대하는 것이고, 점점 더 많은 대중이 생활의 인간적 최소한 이하로 내몰리는 상황입니다. 여러 대중운동체나 단체들 사이에서 이미 지닌 조직력과 대중적 세력이 발언력과 등치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더 빈곤하고 더 취약한 대중의 일부는 또 한번 시야 밖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실상은 정당인 민주노동당에서 조차 그런 경향이 다분한데, 각종 대중단체를 총망라하는 상설연대체라면 더하면 더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여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테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를 언급하는 것이 ‘시혜주의’라는 식의 비판입니다. 사회적 투쟁의 전체 양상에서 특정 계기가 대중의 직접행동이냐 ‘시혜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이냐라는 것만으로 평가하는 것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것은 대중의 자발적 행동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엄호가 의제설정/의제의 사회화라는 것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경제적 배제가 대중 전체를 통제하는 기제로서 작용한다는 기초적 사실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적 상황은 대중에게 실제적, 사회심리적 불안이 증폭되는 상황입니다. ‘사회적 최저선’의 상승이 없다면, 대중은 대신 최저선과 자신 사이의 격차 그 자체에 집착하게 됩니다. 연대는 ‘낮은 곳으로부터’라는 것은 윤리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불균등하게 배분된 사회적 교섭자원의 차이를 정치적으로 넘어서 더 빈곤하고 더 취약한 대중의 문제를 의제화 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 진보정치, 진보정당이 더 취약한 대중을 과다대표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차피 ‘정당’의 필요성이 조합의 질을 넘는 보편적 연대를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정당과 대중운동 사이의 상보적 관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논의되는 상설연대체가 그런 실천을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조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7.
마지막으로, ‘계급동맹’을 중심으로 삼는 전략적 구도 자체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는 ‘계급, 계층의 연합/동맹’이 정치적 사고의 중심이 된다는 것 자체가 지금의 시점에서 그다지 유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계급, 계층의 연합/동맹’이라면 생태운동은 어디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여성이나 소수자 운동은 또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생태학적 문제나 여성과 소수자의 문제 같은 것이 계급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은 저도 동의하지 않고, 대체로 더는 별로 주장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계급운동과 생태주의, 여성과 소수자 운동은 현재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발본적 비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진보운동의 중심 축’이라고 이야기되지 않던가요?
나아가 ‘사회주의적 접근’이 모든 것을 자동으로 해결해 준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세 운동은 일정한 차이 속에서도 또한 자본에 대한 대립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적어도 공공성과 사회적 생산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확대가 생태주의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둘러싼 차별을 극복하는데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한다고는 충분히 주장할 수 있습니다.
계급과 생태학, 여성과 소수자는 그 각각이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의 보편적 측면에 대해 역시 보편적 재구성을 함의하는 운동들인 만큼 그 운동들의 연대는 가장 보편적인 사회변혁운동을 구성하게 될 것 같습니다. 즉 지금의 시점에서 더 보편적, 총체적인 구상은 ‘계급들의 연합/동맹’의 구도가 아니라, 복수의 그러나 사회적 관계 일반을 관통하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적대들에 대응하는 ‘운동들의 연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첨언한다면 이미 대한민국은 임노동자가 인구의 절반을 넘고, 이른바 자영업자의 하층은 실상 임노동자의 ‘은퇴형식’에 해당합니다. 소농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무슨 봉건지주계급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본과 국가와 대립합니다.
즉 ‘계급계층의 객관적 이해관계’를 따지면 ‘자본에 대항해서’ 결집해야 하는 것이 이미 ‘국민대다수’입니다.
‘계급계층’의 차이 보다, 노동자계급의 내적 분할이 더 직접적이고 중대한 정치적 문제로 작용할 정도입니다.
나아가, 그런 분할은 비정규직의 70% 이상이 여성노동자라는 통계가 의미하듯, ‘비 계급적’차별과 계급적 착취의 절합과 연관됩니다. 즉 지금은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연대구상’이 정치적 다수성 획득에 더 도움이 될 상황입니다.
덧붙이자면, 2차 대전 이후 정리된 ‘통일전선론’의 핵심주제가 된 통일전선 형태로의 장기적인 ‘자본분파 일부와의 제휴’내지, ‘애국적, 민주적 부르주아 정당과의 제휴’라는 이야기는 원래 ‘국유화’와 ‘인민민주주의 형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과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당 강령에 나오는’국가사회주의’와 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실상 ‘인민전선’의 대표 사례로 언급되는 프랑스나 스페인의 인민전선정부는 ‘좌파연립정부’나 ‘민주연립정부’에 해당합니다. 좌파적 영향이 강해지는 조건이니 일정한 사회적 성과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국유화’ 문제를 중심에 놓는 전략적 제휴형태라고 말하기는 좀 어폐가 있다고 봅니다. ‘통일전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행)형태로서 인민민주주의 독재’의 지위를 얻는 이후의 공식적 해석은 프랑스나 스페인이 아니라 바로 ‘동유럽’의 경험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에 가깝지요. 입헌적 과정을 통해 집권하는 연립정부 수준에서 ‘국유화’를 염두에 두고 자본분파를 세분하는 전략적 제휴 어쩌구 까지 갈 필요는… 글쎄요 있을까요?)
실상 ‘비 입헌적 이행’이라도 상정해야 제대로 이야기 가능한 ‘무상몰수’라도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특정 자본 분파에 대한 ‘국유화에 있어 예외적인 관대한 처분’이 핵심인 ‘전략적 제휴’가 필요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사민주의적 접근처럼 소유의 집산화 보다 사회적 조절과 통제, 공적지출과 사회적 차원의 교섭구조를 주요한 기제로 상정하면 자본 분파에 따라 달리 대접할 특별한 이유도 별로 없고, 특히 그것이 중소자본과 대자본 사이에 상정될 이유는 더 없습니다.
무엇보다 어떻게 설명해도 ‘봉건잔제를 일소해서 자본주의의 정상적 발전을 도모한다’거나 ‘민족자본 육성’이 현실적인 의제가 아닌 이상, 자본에 대한 통제는 부분적이든, 전면적이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반 부르주아적’인 것이고,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에서는 ‘계급이해’는 이데올로기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경향적으로 두 축인 것이고, 때문에 자본분파와의 제휴가 빠지면, ‘제 계급계층의 연합’이 ‘전략적 구상’의 지위를 얻을 이유도 사라집니다.
그 수위가 당장의 고통을 줄이는 ‘개량’이라 해도 어떻게 되던,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다수 대중의 ‘노동소득자’로서의 이해 공통성을 불러일으키고, 시장주체의 개별이익에 대한 사회공공적 요구의 우위를 요구하는 쪽입니다. 그것이 ‘자본’의 대한 대항전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상, ‘계급연합’적 접근이 지닐 정치적 이점은 없습니다.
8.
민중연대와 통일연대를 한 묶음으로 묶고, 또 외견상, 그리고 대중의 인식에서는 이미 민주노동당의 지지세력으로 각인되었고, 실제로도 그 구성단체들이 적잖이 이미 민주노동당과 연루된 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을 형식적으로 묶는다고 정치적 영향력이 어떻게 확대된다고 말 할 수 있는지 끝까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솔직히 함께 욕먹고, 덤으로 칭찬 듣는 처지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분명히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일상적 활동이 곧 정치행동으로 연결되는 공인된 정치적 대표자이고, 집권을 (심지어는, 싫더라도) 주장하고 다녀야 하는 정당이 스스로 잘 하는 것 보다, 정치적 외연을 확장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수단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두군중투쟁’이 대중과의 유일한 접촉면에 가까웠던 과거의 시기도 아닌 상황에서 동원력을 형식적으로 높이려는 구상으로 정치적 타개책이 나온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정치적 수세는 근본적으로 의제형성능력, 문제제기 능력의 빈곤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는 ‘눈치보기’와 ‘해오던 일’에 대한 관성적인 경사 탓인 듯 합니다.
이른바 ‘상설연대체’가 실용적인 목표달성에 뭔가 딱히 보태주는 것이 없다는 점이, 그동안 상설연대체를 주요선거 일정을 앞두고 추진하고, 당의 긴밀한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 당에 당외 단체를 동원해 특정한 정치적 압력을 넣기 위한 정치적 술수의 영역이 아닐까 의구심을 받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정당은 정당으로서 자기 몫을 다 해주어야 결국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상설적으로 단체들을 묶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는 당의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다가오는 선거는 민주노동당이 간판이 되어 치르고, 그 양상이 이후 정세에 하나의 정치적 준거로 남게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미 대중에게 진보와 노동의 정치적 대명사로 간주되는 민주노동당이 설득력 있는 무엇을 내놓지 못할 때 예상되는 파괴적 결과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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